에덴동산의 남녀 이야기를 상징적 설화가 아닌 기원전 4000년경에 실제 일어난 사건으로 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21세기를 맞이한 지금까지도 그런 사람들은 제법 많습니다.
기독교의 원죄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바람에 죄가 시작되었고 그것 때문에 죽음이 생겼다고 보는 유대 전통사상을 답습한 것입니다. 선善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토브טוּב는 좋은 것, 선, 이익, 번영을 뜻하고, 악惡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라רַע는 나쁜 것, 악, 손실, 재난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 설화를 창작한 저자들이 처했던 환경과 그에 따른 창작의도를 고려해 보면 조금 더 중요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는 장면은 이분법적 선악 관념에 빠져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가 집필되기 시작할 당시의 히브리인의 유일신 신앙은 크나큰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을 지배한 제국들과 적대국들은 하나같이 선신 대 악신이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대결하는 구도와 인간사회의 계급적 차별의 당위성을 세뇌하는 종교 관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의 상실과 그에 따른 육체노동과 죽음의 도래는 인생의 고통과 불행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지 않으려 한 고대 히브리인의 태도를 반영합니다. 사실 신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이지 죄는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죄의식은 근거도 없고 심지어 병적입니다.
『창세기』 저자들이 풍요와 평안을 바라보는 시각은 당시 다른 국가들의 시각과 달랐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안전과 풍요야말로 에덴 설화 창작자가 이상적으로 보는 모습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곳에서는 육체노동도 없고 출산의 고통도 죽음의 공포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실제로 인간을 제외한 피조물의 탄생과 죽음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생태계 속에서 원활하게 순환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신학은 병적인 죄의식을 없애기 위해 억지로 끼워 맞춘 이론이 아니라 이웃과의 나눔과 지구환경 회복에 궤를 함께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어찌할 도리 없는 인간의 운명입니다. 인간은 애초에 죽지 않는 존재로 탄생된 적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공정한 분배, 무상 의료, 환경회복, 문화예술 향유 등은 실현 가능한 부분입니다.
예수의 계명은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같은 다신교 숭배자의 경쟁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였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독교와 상관없이 이미 오래 전부터 익숙한 계명이지요. 경천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