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치과 진료를 하러 갔다. 초진이라 문진표를 작성했는데 직업란이 있었다. 주부라고 적을까 무직이라고 적을까 고민하다가 무직이라고 적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며칠 전 큰아이 학교생활 관리 애플리케이션을 열었다가 무심코 부모 정보란을 열었는데 내 직업란에 무직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어로 써도 되었다면 ‘주부’든 ‘무직’이든 철자 걱정하지 않고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고민하지 않고 주부라고 썼겠지만, femme au foyer (주부)와 sans profession (무직)의 철자에서는 며칠 전에 본 sans profession 이 더 자신 있었기 때문이다.
둘. 아이 학년말 행사로 (프랑스는 여름 방학 전에 한 학년이 끝난다) 학부모들을 만날 일이 많았다. 그럭저럭 아이들이나 날씨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즈음 서로에 대한 정보를 묻기 시작했다. 직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글을 쓴다고 대답했다. 병원 문진표처럼 한 단어로 내 직업을 설명해야 할 때는 글을 쓴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후 사정 설명이 가능한 경우에는 비록 현재 대단한 수입은 없지만 향후 몇 년 안에 수입을 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직업란에 ‘글 쓰는 사람’을 집어넣고 구구절절 설명한다.
“대단한 작가는 아니지만 최근에 <포포포>라는 잡지에 글을 썼어. 그리고 친구와 책을 준비하고 있어.”
어차피 사람들은 내가 얼마를 버는지, 얼마나 훌륭한 글을 쓰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내 마음속 직업으로 나를 소개하고 있다.
주부, 무직, 글 쓰는 사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엄마와 아내의 삶에 나름 적응하며 사는 것도 같다. 얼마 전까지도 적응을 못 해서 우울증도 앓고 나는 도대체 누구냐며 울부짖었지만, 지금은 일에 대한 (미칠 것 같은) 욕심이 사라지고 요리, 장보기 고민, 청소, 아이들 등하교, 자잘한 학교 행사 준비 등이 당연하게, 심지어 보람 있게 느껴진다. 주부 7 년 차에 드디어 적응한 것인가!
그렇다고 다른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 마음은 갈대니까!) 이번에 파리로 공부하러 떠나는 한글학교 동료 선생님을 보면 석사 1 학년을 마치고 파리의 한 인턴 자리에 붙은 내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동료 선생님과는 다른 선택을 했더랬다. 당시 나는 남자친구와 동거 중이었다. 오평 짜리 방에서 종일 말없이 지내던 삶이 둘이 함께하는 안정감 가득한 삶으로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다시 작은 방에서 말없이 지낼 용기가 없었고 둘이 사는 삶의 안락함을 새로운 일의 불안과 맞바꿀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파리행을 포기했다.
동료 선생님을 보며 내가 한 선택이 과연 좋은, 혹은 용감한 결정이었을까 돌아본다. 관계야 이어질 거면 이어졌을 것이다. 아니지. 그때 내가 두려웠던 것은 관계 유지가 아니라 다시 비좁은 방에서 혼자 지내는 삶이었다. 기댈 사람이 없다는 버거움. 모든 일을 오롯이 혼자 씩씩하게 해야 한다는 부담. 누군가에게는 손가락 사이로 물 흐르듯 당연한 일에도 두세 배 아등거려야 한다는 피로감.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소용없는 상상이다. 다른 선택을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보다 열세 살이 어린 동료 선생님에게 ‘나처럼 살지 마요. 놓지 말아요.’라고 말하는 나를 상상한다. 마치 그 나이의 내게 말하듯 말이다. 물론 꼰대가 되고 싶진 않으니까 그런 말을 하진 않았다. 앞으로도 할 생각은 없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와 응원을 한다. 트럭을 빌려 직접 운전해서 이사할 생각이라고 말하는 동료 선생님에게 ‘씩씩하다!’라고 말해주었고 파리의 학교에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이제 못 보게 되어 아쉽다.’라는 말 대신 ‘축하한다.’라고 말했다. 오늘 점심에는 밖에서 만나 점심을 사줄 것이다.
떠날 사람, 그것도 그렇게 깊은 관계도 아닌 이 사람에게 어째서 이토록 마음을 쓰는 것일까. 내게 사랑을 쏟아준 사람들에게 그것을 갚는 일도 잘못하고 있으면서. 그렇게 ‘무심한 사람' 자리에 머무는 내가 어째서 그 귀한 시간을 사랑을 갚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동료 선생님에게 쓰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동료 선생님에게서 힘들게 유학 시절을 보낸 나를 보는 것 같다. 가난하고 궁상맞으며 외로웠던 그 시간. 양파가 싸면서도 다른 채소에 비해 보관기간이 길다는 이유로 그것만 잔뜩 사서 카레를 한 솥 끓이고, 코인 세탁기에 쓰는 돈이 아까워 밤새 술 마시고 와도 손빨래는 하고 자던 나. 전기세 아낀다고 한겨울에도 라디에이터를 틀지 않고 두꺼운 옷과 담요를 잔뜩 걸치고 공부하던 날들. 남들은 귀로 듣고 뇌가 시키는 대로 필기하면 끝인 수업을 집에 와서도 녹음본을 들으며 다시 정리하던 그 시간. 턱관절이 아파서 입이 벌어지지 않는데 주치의도 의료보험도 없다는 이유로 쌩으로 버티던 시절.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이 내게는 노력과 버티는 힘이 필요했던 시간.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던 날도 있던 그때.
매끼 신선한 채소를 먹고 따뜻한 방에서 책을 보며, 당연한 듯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리는 요즘은 그 시절을 어떻게 버텼는지, 가끔은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
그때 이런 아줌마를 만났으면 어땠을까. 조미김과 직접 만든, 하지만 맛은 그저 그런 쿠키를 건네는 아줌마. 어쭙잖은 충고 대신 씩씩함을 칭찬해 주는 아줌마. 가끔 불러서 비싼 건 아니더라도 식당 밥 사주는 아줌마. 같이 영화 보자고 하는 아줌마. 그리고서 커피 사주며 신나게 떠드는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아줌마. 모르겠다. 그때의 나는 어쩌면 그 아줌마가 고마운 사람이라는 생각조차 못 했을지도 모른다. 혼자서 느끼는 감정들에 휩싸여 타인과 함께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는 없었을 테니까. 어쩌면 동료 선생님도 그럴지 모른다. 당장 이번 달에 오롯이 혼자서 방도 구하고, 이사도 해야 하는데. 시간 많고 여유로운 아줌마가 불러내면, 안 그래도 없는 시간, 더 쪼개야 하는 부담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괜찮다. 밥은 어차피 먹어야 하는 거고 혼자 보다는 둘이 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