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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넘어파 Jan 26. 2024

로또 맞은 결혼

장인어른께 100억 상속받기 8화



집은 어떻게 할 거니?



"선이가 자기 사는 집에 그냥 들어오래."


"그럼 네가 혼수를 해가야 하는 거 아냐?"


"살림살이가 다 장만되어 있어."


"그래?  허.. 참.."


"아, 전기밥솥 하나만 사 오면 좋겠다고 했어."


"참..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우리 선이가 모자란 아이는 아니지?"


"허허허."


결혼을 앞둔 아들과 어머니의 대화다.




나와 여자친구는 8년을 연애했다. 둘 다 직장인으로 자리 잡고 삶의 변화가 필요할 즈음, 여자친구에게 프러포즈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예약한 후 미리 맞춤 제작한 커피잔을 맡겼다. 식사 후 커피를 이 잔에 담아달라 부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친구는 맛있게 식사를 즐겼고, 나는 다소 긴장했다. 식사가 끝나가자 매니저가 다가왔다.


매니저: 식사 후 음료로 커피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여자친구: 커피 말고 다른 건 없나요?

매니저: (당황하며) 아.. 캐모마일차가 있긴 합니다만..

여자친구: 캐모마일차로 주세요.

나: (매우 당황하며) 캐모.. 뭐?


돌발상황이다. 나는 캐모마일차가 뭔지 몰랐다. 의도한 대로 흘러가려면 커피잔 속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아, 투명하면 안 되는데... 캐모, 캐모, 캐모'


노련한 매니저님은 캐모마일차와 함께 서비스라며 내가 미리 맡겨 둔 커피잔에도 커피를 담아 오셨다. 뭔가 있음을 눈치챈 여자친구는 커피잔을 들었고 잔 받침대에 자기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보았다.


"아, 뭐야?"


천천히 커피를 마신 여자친구는 커피잔 아래에 적혀있는 글귀를 본다.


Marry me



여자친구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제 우리는 곧 부부가 된다.





내가 프러포즈한 날짜는 1월 18일. 결혼한 날은 4월 22일. 3개월 남짓의 시간 동안 결혼 준비를 끝냈다. 청첩장 제작을 끝으로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야 상견례를 했다. 순서가 제대로 잘못됐다. 그만큼 양가 부모님은 우리를 믿었고 모든 걸 포용할 준비가 되셨다.


속전속결의 결혼준비가 가능했던 이유는 주거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여자친구는 취업 후 1년 간 오피스텔에서 살다가 눈여겨본 동네에 정착하고 싶다며 대출받아 아파트를 샀다. 그녀에게 4, 5년 후 부동산 가격 폭등기가 올 거라는 혜안이 있었던 건 결코 아니었다. 그녀의 부자아빠가 집을 사라고 조언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는 대출조건도 지금만큼 까다롭지 않았고 금리도 낮았기에 이자 갚으며 살 수 있겠다 싶었던 거다. 부자아빠는 비과세 한도 내에서 도움을 주셨다. 집을 산 김에 살림살이도 제대로 갖췄다.


청혼 후 결혼 준비를 시작할 때, 여자친구가 제안했다.


"오빠, 결혼하면 그냥 내가 살고 있는 집을 신혼집으로 하자."


"음.. 대한민국에서는 신랑이 집을 마련하는 게 보편적이긴 한데.."


"그런 게 어딨어. 번거롭게 이사할 것도 없잖아."


"음.. 넌 정말 혁신적이고 창의적이고 실용적인 거 같아."


"히히, 뭐래."



집 문제는 이렇게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의 어머니는 믿기 어려워하셨다. 아들의 집 마련을 위해 어떻게 도와줘야 하나 고민하던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참 고마워하면서도 이렇게 해도 되나 망설이셨다. 며느리가 모자란 아이는 아니냐고 농담하실 만큼 신부가 너무 손해 보는 결혼이 아닐까 생각하셨던 거다.




여자친구의 아버지, 부자아빠가 물으셨다.


"훈이는 학교에서 일할 때, 손해를 보는 편인가?"


"어떤 의미인가요?"


"월급 받는 만큼만 일을 할까, 아니면 그보다 더 많이 하려고 노력하니?"


"아, 저는 월급 이상은 하려고 노력합니다."


"선생님들과 같이 식사할 때는, 밥값을 내는 편이니?"


"선배님들께는 주로 얻어먹는 것 같고요, 또래들과 먹을 때는 돌아가며 사는 편이에요. 요새는 더치 문화도 많고요."


"시간 약속을 하면 보통 몇 분 전에 도착하지?"


"시간 맞춰서 정각에 가는 편입니다."


"일할 때, 바보처럼 '헤' 할 때가 종종 있나?"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훈이는 똑똑한 스타일이라 바보처럼 행동하지 않을 거 같아. 매사에 딱 부러질 것 같고. 손해 보는 행동도 하지 않을 것 같고."


"그런 편이죠."


정확히 보셨다. 나는 손해 보는 걸 못 참는 편이다.


"그런데 바보처럼 굴어야 할 필요도 있어."


'잉...?'


"바보처럼 지갑도 더 많이 열고, 일도 더 많이 하고, 조직을 위해 불편함도 참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허허' 하고 넘어갈 줄도 알고."


'음....'


"그래야 돈도, 사람도 훈이를 따르지."



부자아빠가 월급 받는 직원이었던 시절, 지방 출장 중 부자아빠는 찜질방에서 잠을 잤다. 출장 중 사용한 경비는 회사에서 주는 것이지만, 회사 돈도 내 돈처럼 아꼈다. 택시를 탈 수도 있었지만 버스를 탔다. 회사 경비라고 해서 단돈 1,000원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거래처와의 미팅에서는 반드시 상대방보다 먼저 도착했다. 혹여 상대방이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도 상대방이 부자아빠를 기다릴 일은 없다. 부자아빠는 약속 시간 1시간 전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다.


요즘 이렇게 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들 바보라 할 것이다. 일에서 뿐인가. 친구 관계에서도, 연인 관계에서도 손해 보면 바보라고 말한다. 그런데 부자아빠는 나에게 부자가 되려면 바보처럼 살라고 말씀하셨다. 손해 보는 사람에게 사람들이 따르고 결국 돈도 따라온다고 일러주셨다.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최근에 읽은 하형록 회장의 'P31'이라는 책을 통해 기꺼이 바보가 되라는 부자아빠의 조언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하형록 회장은 미국에서 '팀하스'라는 세계적인 건축 설계 회사를 운영한다. 이 회사의 경영방침 중에 '엑스트라 마일(extra mile)'이라는 개념이 있다. 고객을 위해 한 걸음 더 나가자는 의미다. 건설 현장에 10번 나가기로 계약되어 있으면 성실히 10번 나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10번을 채운 후에도 고객이 요청하면 추가 비용 없이 고객의 부탁을 들어준다.


'나는 내 욕망을 위해, 내 출세를 위해 고객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비우고 내가 손해 보는 쪽을 선택하며 고객과 관계를 맺는다.'(196p)


'희생이란 당장은 손해지만 길게 보면 신뢰를 얻는 열쇠이고 축복이다.'(214p)


손해 보면서까지 고객을 섬기는 경영 방식은 미국 정서와 맞지 않아 보이지만 하형록 회장의 '팀하스'는 승승장구 중이다. 젊은이들이 가장 일하고 싶어 하는 회사로 손꼽힌다. 무리한 부탁으로 팀하스를 힘들게 만드는 고객에게도 성실하고 일관성 있는 태도로 도와주다 보면 고객의 안하무인적 태도도 바뀐다고 한다. 팀하스가 고객을 존중해 주는 만큼 고객도 결국 팀하스를 존중하고 신뢰하게 된다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희생하는 정신은 결국 통하기 마련인가 보다. 



부자아빠가 회사 대표 되기 전 이야기다. 회사가 어려움에 처했다.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부자아빠는 사비를 털었다. 자신의 돈으로 직원들 월급을 챙겨 준 것이다.


최근에서야 이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정말 충격이었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제일 먼저 이직을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게 일반적인 사람의 선택 아닐까? 어떻게 직원이 직원들의 월급 채워줄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그 당시 부자아빠는 부자도 아니었다. 사람이길 포기하며 산다는 말의 무게를 더욱 묵직하게 실감했다.


부자아빠는 바보처럼 손해 보며 희생했지만 시간이 흘러 부자가 되었다.


손해 보고 살아야 부자가 된다.




그 아빠에 그 딸인 걸까. 아내는 보통의 시각에서 보면 크게 손해 보는 것 같은 결혼에 개의치 않아 했다. 집도 혼수도 다 아내가 마련했다. 나는 하이마트에서 디피 상품으로 세일하는 전기밥솥 하나 샀을 뿐이다. 예단은 생략하자고 말씀드렸지만 처가댁에서는 예단도 넘치게 보내주셨다. 여자친구는 어떤 명품백이나 보석도 요구하지 않았다. 결혼 이후에도 자신에게 쏠렸던 결혼 예산을 빌미로 어떤 권리도 주장하려 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생색이 없었다.


그녀의 시부모님은 부자가 아니다. 세련됨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며느리 어깨에 샤넬백을 매어주고, 손목에 까르띠에 시계를 채워주시는 분들이 아니다. 샤넬, 까르띠에가 뭔지도 모르신다. 그저 예나 지금이나 시골에서 쑥떡을 지어 며느리 입에 넣어줄 뿐이다. 아내 역시, 대학생 때나 지금이나 그 쑥떡을 맛나게도 먹으며 우리 어머니 최고라고 말한다.


제대로 로또 맞은 결혼이다.


문득, 프러포즈했던 레스토랑의 매니저님이 생각난다. 그분은 나를 위해 엑스트라 마일을 베풀어주셨다. 고객 입장에서 청혼의 순간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기 위해 서비스를 베푸신 그분이 꼭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나 재수 좋은 놈이 또 있을까. 이 여자를 사로잡은 나의 매력 포인트는 무엇이었을까? 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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