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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Jul 02. 2021

내담자의 편지

심보선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全文)



  선생님, 저는 늘 세상엔 그런 사람도 있는 것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그저 그런 사람인 줄만 알았지, 저에게 그런 사람일 수 있음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도 그런 사람에게 그런 사람일 수 있음도. 그래서 올여름엔 유독 장마가 늦게 찾아오나 봅니다. 지겹도록 길어질까요?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모를 일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그런 사람과 그런 사람은 바람이 차가워서 밤길을 걷고, 어떤 그런 사람과 그런 사람은 정신을 차리려고 술을 마시고, 어떤 그런 사람과 그런 사람은 온 세상이 다 들으라고 귓속말을 나누고, 어떤 그런 사람과 그런 사람은 동이 트도록 깨어 있으려고 팔베개를 해주고, 또 어떤 그런 사람과 그런 사람은 놓친 손을 다시 잡으려고 있는 힘껏 손목을 긋습니다.

  이걸 몰라 화를 냈습니다. 사실은 손목이 너무 아파서 그랬어요. 이 말을 세련되게 하고 싶어서 발이 아프다가, 무릎이 아프다가, 골반이 아플 때까지 젖은 땅 위를 걸어 다니며 적절한 비유를 찾아 헤맸습니다만… 그런 건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는 다시 올 것이고, 이 편지지가 종이 죽이 되어 버리기 전에 이 마음을 옮겨 써두어야 하겠죠.

  선생님, 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저는 얼마나 많은 문장을 뱉던가요. 그중에 똑같은 문장은 몇이고, 새로운 문장은 또 몇이던가요. 상담실은 얼마나 고요하였던가요. 하늘은 얼마나 파랗고, 저는 얼마나 창백하던가요. 손목은 얼마나 문지르던가요. 이제 우리의 상담은 끝났습니다. 어떤 그런 사람과 그런 사람이 나란히 누워 부르던 저 노래처럼, 딱 그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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