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경 Jul 18. 2021

항우울제의 의미

최승자 - 수면제


  대낮에 서른 세 알 수면제를 먹는다.

  희망도 무덤도 없이 윗속에 내리는

  무색 투명의 시간.

  온몸에서 슬픔이란 슬픔,

  꿈이란 꿈은 모조리 새어나와

  흐린 하늘에 가라앉는다.

  보이지 않는 적막이 문을 열고

  세상의 모든 방을 넘나드는 소리의 귀신.

  (나는 살아 있어요 살 아 있 어 요)

  소리쳐 들리지 않는 밖에서

  후렴처럼 머무는 빗줄기.


  죽음 근처의 깊은 그늘로 가라앉는다.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바다에 눕는다.


최승자, 수면제 (全文)



  수면제를 잔뜩 입에 털어 넣고는 하필 연탄불 옆에 쓰러져 손가락을 잃은 남자를 생각한다. 그가 눈을 떴을 때도 연탄은 재가 되지 않고, 솥에 든 곰국은 졸지 않았다. 다만 손가락은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검지는 물처럼, 중지는 농처럼, 약지는 묵처럼.

  잠에 든 동안 그는 아프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나고도 없어진 손가락은 없어진 손가락이니 물론 아프지 않았다. 아프지 않기 위해 그 후로도 그는 몇 차례 연탄불을 지펴놓고 수면제를 먹었다. 손이 없어지고, 손목이 없어지고, 팔이 없어지고, 팔꿈치가 없어질 때까지. 그래도 아픔은 녹아 나오지를 않았다.

  연탄을 두 장 올리고, 세 장 올리고, 네 장 올리고, 다섯 장 올려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수면제를 많이 먹는 날이면 어쩌다 연탄은 재가 되고, 솥에 든 곰국은 졸았다. 그러나 아픔은 녹는점이 높다. 그는 이제 물이 되고, 농이 되고, 묵이 되었다. 어떻게 주워 담을 수도 없다. 베이지색 연탄재는 쓸려 갔고, 시커먼 솥은 팔려 갔다.

  그의 아픔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어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의 아픔? 이제 사라진 그는 사라진 그이니 이건 누구의 아픔이라 해야 할지. 좀처럼 식지 않는데 이를 어쩌면 좋을지. 대체 누가 나서서 치울 건지.


  결국 항우울제란 손가락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 그가 처음에 수면제를 먹은 건 자살을 하려는 시늉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담자의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