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상우 Apr 03. 2024

광화문, 청진옥

당신의 소울푸드는 무엇인가

소울푸드

: 그 음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추억이 있으며, 병들고 지친 내 몸과 마음을 위로해 주고 치유해 주는 음식. 


당신의 소울푸드는 무엇인가. 나에게는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소울푸드가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늘 잔병치레를 했다. 떠나가는 봄이, 떠나가는 여름이, 떠나가는 가을이, 떠나가는 겨울이 그리워서인지 하나를 떠나보낼 때면 꼭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아팠다. 혼자 하는 타향살이의 설움에 병의 아픔까지 더해지니 참으로 외롭고 서러웠다. 그런 날이면 힘도 없고 입맛도 없었지만, 엄마의 말이 나를 음식 앞으로 이끌었다.


"아플 때일수록 더 잘 먹어야 해. 엄마가 돈 보내줄 테니까 해 먹지 말고 뭐라도 사 먹어. 알겠지?"


나는 어렸을 적부터 엄마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하지만 아플 때만큼은 의사보다 엄마의 말을 더 잘 따랐다. 그 어떤 의사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그 어떤 사람보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엄마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플 때면 엄마의 말마따나 더 잘 먹어 빨리 병을 떨쳐버리게 위해 아픈 몸과 마음을 위로해 주고 치유해 줄 수 있는 그런 음식을 찾았다.


청진옥 특 선지해장국


광화문 청진옥. 이 음식점에 처음 가본 것은 23살의 겨울이었다. 한국장학재단의 근로장학생으로 종로의 한 시민단체에서 근무를 하던 때였다. 점심에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 조선의 주먹 김두환이 알바를 했다는? 국밥집이 있다는 말에 쪼르르 음식점으로 달려갔다. 당시 청진옥은 르미에르 빌딩 뒤편 주차장 입구에 아주 어둡게 숨어 있었다. 본래 청진옥은 좁은 피맛골을 지키던 터줏대감이었지만 종로 일대 재개발로 피맛골이 사라지면서 어두컴컴한 주차장 입구에 새로 자리를 잡고 외로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김두환이 알바를 하고, 모 대통령이 수행원을 시켜 자주 포장해 갔다는 그 유명한 청진옥 선지해장국. 그 맛은 가히 놀라웠다고 말하고 싶다. 처음 먹어본 청진옥의 선지해장국은 꼬릿하고 쿰쿰한 냄새가 코를 먼저 압도하는 그런 국밥이었다. 당시 어렸던 나로선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맛이었달까. 유명한 음식이라는 건 알겠지만 안타깝게도 나와는 맞지 않는, 내가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 결론 내리고 말았다. 


하지만 결론이 이렇게 빨리 내려졌다면 이 글이 쓰이지 않았을 터. 시간이 흘러 세월의 풍파와 국밥을 꽤나 말아먹어본 놈이 되었을 때, 청진옥을 다시 찾아갔다. 내가 왜 그곳에 다시 갔는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다. 당시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를 주 1회씩 방문하던 차였기 때문에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감정으로 방문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방문한 청진옥은 르미에르 빌딩 주차장 입구가 아니라 KT 신사옥 뒤편으로 옮겨져 있었다. 큼지막하게 햇살을 받고 있는 간판을 보니 이제야 그 명성에 어울리는 장소를 찾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실내는 너무 현대적이지도 또 너무 전통적이지도 않은 아주 적당한 디자인을 보이고 있어 더 기분이 좋았다.


다시 먹어본 청진옥 선지해장국의 국물 맛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꼬릿하고 쿰쿰한 맛은 온데간데 없고 짭조름한 감칠맛이 폭발하는 뜨끈한 보양 국물이 내 몸속으로 타고 들어왔다.


어? 왜 맛있지? 주인이 바뀌었나? 


잠시만 (한 숟가락 꿀꺽)


어? 너무 맛있는데? 


아니 왜 맛있지? 왜 잡내가 않나지?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냄새가 싫어 먹지 않았는데, 다시 먹어보니 쿰쿰한 잡내는 하나도 나지 않고 지금까지 이 맛있는 음식을 먹어오지 못한 세월이 야속하기만 했다. 못 먹어온 그 세월을 만회하고자, 그때부터 줄기차게 청진옥을 다녔다. 여러 번 청진옥을 다니다 보니 음식을 먹는 나만의 순서도 생겼다. 선지해장국은 무조건 특으로 주문하고(특에는 천엽, 양 등 건더기가 더 많다) 국밥이 나오면 경건한 마음 가짐으로 오늘의 국밥이 어떻게 생겼는지 찬찬히 살펴본다. 만족스러운 관찰이 끝나고 나면 우선 한 숟가락 국물을 떠먹어보고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적신 채 천엽, 양, 선지 등의 건더기부터 빨간 다데기 양념에 찍어 먹는다. 중간에 국물을 흠뻑 빨아들인 우거지도 한 입 후루룩 흡입하면서 입안을 물컹 물컹이는 재미로 가득 채운다. 어느 정도 건더기를 먹은 뒤에는 공깃밥을 반만 말아 건더기와 밥알을 함께 즐기고 나머지 반은 건더기를 다 먹은 맑은 국물에 말아 넣어 숭늉마냥 후루룩 들이킨다. 나만의 청진옥 먹는 법이라는 불리는 이 의식을 마치고 나면 사계절을 가리지 않고 이마와 목덜미에 삐질삐질 땀이 흘렀다. 그럴 때면 독소를 빼러 사우나를 간다는 아버지의 말마따나 몸속에 독소를 뺀 기분이 들어 참으로 마음이 상쾌했다. 


그 기분 때문이었을까. 바뀌는 계절로 인해 끙끙 앓던 어느 날, 무겁고 지친 몸을 가볍고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 그때 불현듯 청진옥의 선지해장국이 떠올랐고 곧바로 옷을 걸치고 어서 빨리 나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아픈 몸을 이끈 채 청진옥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나니 혼자 끙끙 앓으며 힘겨운 시간을 보낸 나와 달리 청진옥의 풍경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해 보였다. 자리에 털썩 앉아 늘 해왔던 대로 이모님 여기 특 하나 주세요!


맑은 국물에 양, 천엽, 선지, 콩나물, 우거지가 산더미처럼 쌓인 따끈한 국밥이 나왔다.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는 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느껴졌다. 지금껏 모르고 지냈던 무언가를 문득 발견한 기분이었다. 나에게 고향은 엄마가 있는 곳이다. 고향에 가는 이유도 엄마를 보기 위해서다. 고향에 엄마가 없다면 그곳은 내게 더 이상 고향이 아니다. 지금까지 서울은 엄마가 없었기에 고향이라 부를 수 없었다. 그러나 무척 아팠던 그날 청진옥의 선지해장국에서 엄마가 내게 주던 따뜻함, 포근함, 정성, 사랑을 느꼈다. 서울에도 내 영혼 한 조각이 박힌 음식이 생겼구나. 아 서울도 이제 내 고향이구나.


때로 음식은 그 물성이 가진 물질적 한계를 벗어나 한 사람의 영혼을 건드릴 때가 있다. 그 순간의 감동은 쉬이 잊히지 않고 영혼 속에 영원히 각인된다. 그리고 그 음식을 다시 먹을 때마다 이전에 영혼이 닿았던 그 순간을 회상하며 풍성한 미소를 머금거나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당신의 영혼을 건드리는 소울푸드는 무엇인가. 

나에게는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따끈한 소울푸드가 있다.




이전 04화 마곡, 산청 숯불가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