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빈자리
나는 지금도 다리미를 놓을 때 안절부절못한다
가족 중 누구 한 명이 세상을 떠나면 남은 가족들은 최소 1년간 심한 후유증에 시달린다. 명절이면 다 같이 모이는 자리에 한 자리가 유난히 크게 보이고 생일이 다가오면 기일보다 더 슬퍼서 안절부절 못 하고.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생일 한번 챙겨주지 못한 것이 그렇게나 가슴 아프게 남을 줄 몰랐다. 오히려 동생이 내 생일에 때때로 서프라이즈 해주곤 했는데.
동생은 말을 툭툭 내뱉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한 아이였다. 하루는 동생이 전활 했다. 동생이 먼저 결혼하는 바람에 그때 나는 혼자였는데 내 생일을 챙겨준 것이다. 동생이 대학로에 있는 유명한 바에 자릴 잡고 앉아 나를 불렀다. 동생의 전남편은 성격이 좋아선지 주변에 친구가 많았다. 그 친구 중에는 유명 건축가 동생도 있었는데 그 건축가가 디자인한 바였다.(그 바는 나중에 우리 자매의 아지트가 되었다.)
바에 가자 나를 위한 파티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목걸이를 선물로 주었다. 그 바에는 지금은 유명해진 그룹들도 수시로 오고 유명 디자이너들도 자주 왔다.
또 하나 떠오르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내가 입힌 상처다.
대학생이었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급하게 옷을 다려 입고 나갈 일이 있었다. 우리 자매가 같이 썼던 방은 작아서 다리미판이 머리맡에 있었고 그때 동생은 자고 있었다.
그런데 급한 마음에 나가느라 다리미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동생이 뒤척이다가 그 다리미에 팔을 데었다. 그 상처가 꽤 크고 오래갔다. 그런데 역시 여장부 같은 동생은 그 일을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나중에 물어보고 알았다. 우연히 동생 팔을 보았는데 화상 자국이 있었다. 동생말이,
"네가 며칠 전 다리미를 머리맡에 두고 갔잖아. 자다가 데었어."
나를 원망하는 마음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팩트만 나열하는 아이였다. 그게 더 미안했다.
동생이 세상을 떠나자 그 상처가 자꾸 기억이 났다. 그때 미안하다는 말을 못 한 것 같아서. 괜히 쑥스러웠나 보다. 그런데 그 다리미 데인 상처가 내 가슴에는 지금도 커다란 상처로 새겨져 있다. 그때 나에게 욕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동생과 있었던 몇 개의 장면들이 무한 반복되어 내 머릿속에 나타났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내가 잘해준 건 기억이 안 나고 못 해준 것만 기억이 난다는 게. 그리고 반대로 세상을 떠난 가족이 못해준 건 기억이 안 나고 나에게 잘해준 것만 기억에 남는다. 그게 참 잔인하다.
동생을 그리워한 건 우리 가족만이 아니다. 우리는 암투병 기간 동생을 많이 보았지만 그 임종조차 몰랐던 전남편은 동생을 더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남편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동생의 전남편은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뒤 동생이 살던 집을 찾아갔었다고 한다. 꽃다발을 들고서. 죽기 전 동생은 용인에 있는 전원주택 단지에 있는 주택에 머물고 있었다. 번화한 곳에 살던 동생을 내가 억지로 끌어내서 옮겼다. 임시로 얻은 집에서 두 달가량 머물렀는데 그 빈 집에 혼자 찾아간 것이다. 동생이 좋아하던 꽃다발을 사 들고서. 목적이 있었다. 동생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느끼고, 그토록 보고 싶은 동생을 꿈에서라도 한 번 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용서는 해도 보고 싶지는 않았던 걸까? 동생은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걸 몹시 서운해했다. 남편은 그 말을 전하면서 글썽거렸다. 남편도 감정이입이 되어서였다.
남편은 전남편이 착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놈의 바람이 원수지. 남자가 잘 생기면 얼굴값 한다고 하더니 옛말이 하나도 안 틀린다. 전남편은 키가 180도 넘는 데다가 모델 같은 비주얼이었다. 그런 남자가 갑자기 결혼한 유부남이 되었다고 해서 여자들이 가만 놔두지는 않았나 보다.
갑자기 동생의 전남편이 보고 싶어 진다. 동생은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갔다. 내 동생은 이렇게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는 참 못된 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