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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Sep 29. 2022

내겐 말기 너무 어려워 김밥

김밥 하나 못 만다고 해서 요리 고자는 아니다.

 아이들이 크고 나면 해방되는 일이 많다. 그중 하나는 김밥을 싸는 일이다. 초등학생 학부모라면 공감할 것이다. 현장체험학습 가는 날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을 싸야 한다. 그 전날 미리 재료를 장만하고 밑 손질해 놓는 건 필수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 우에서 우영우는 이 김밥을 좋아했다. 눈에 훤히 보이는 재료들 때문이다. 이는 자폐스펙트럼의 소유자로서 사람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온갖 것들을 버무려 놓은 음식은 무엇을 섞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김밥은 재료들이 선명하게 눈에 보이니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우영우 변호사가 김밥을 좋아하는 이유는 거꾸로 나에게 요리하기 어려운 이유다. 일단 여러 가지 재료가 섞이니 간 맞추기가 힘들다. 밥은 알맞게 간을 맞추었다 쳐도 당근에 소금을 또 얼마나 쳐야 하는지, 또 시중에서 사 온 햄이나 우엉, 단무지 등의 염도는 얼마나 되는지, 계란지단을 부칠 때 넣는 소금 한 꼬집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꼬집 어야 하는지, 또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등. 무엇보다 동글동글 눈에도 보기 좋게 말기란 쉽지가 않다.


 내 솜씨로 볼 때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즉 김밥 끝이 잘 붙지 않는 것이었다. 뭐든 자주 하면 기술이 축적되겠지만 김밥은 1년에 한두 번만 하는 요리라서 그게 안된다. 마지막 작업인 '접착 단계'에서 매번 난감해지곤 했다. 지금은 물로 붙이는 방법을 알아냈지만, 그 전에는 밥풀로 해보았다. 그런데 결국 풀어져버렸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와서는 자기 김밥은 해체되어 못 먹었다는 말을 했을 때 어찌나 속상하던지. 쿨한 아들은 결국 어미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현장체험학습 가는 날 아침이었다. 이제 자기가 나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겠단다. 그러더니 천국에 들르면 된다고.('김밥천국'집에서 사가겠다는 말) 그 말은 나를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나는 꼴랑 워킹맘이랍시고 평소 준비물도 못 챙겨주고 운동회날도 혼자서 밥을 먹게 만드는 엄마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1년에 한두 번 싸는 김밥 하나 제대로 못 싸주다니. 그게 무슨 엄마냐고 소리쳐 울었다.(속으로)


 현장체험학습에서 학생들과 점심을 먹을 때마다 그 상처는 나를 더 깊이 쑤셔대었다. 솜씨 좋은 엄마들이 집에서 싸준 알록달록 예쁜 김밥들... 퍼스로 돌려 그린 것처럼 정확하게 동그란 김밥들...(내가 만든 김밥은 원형과 사각의 중간쯤 되는 정체불명의 도형인데) 그 김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 당당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내, 스티로폼 도시락 뚜껑의 노란색 고무줄을 잡아당겨 김밥을 꺼내먹는 아들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나중에는 김밥을 못 만다는 콤플렉스가 점점 부풀어 올랐다. 급기야 나 스스로를 '요리 고자'라고 낙인찍기에 이르렀다. 고작 김밥, 그거 하나 못 말면 요리 고자가 되고도 남으리라고.






 가끔은 헷갈린다. 남편이 나에게 요리 잘한다고 추켜세워줄 때다. 맞벌이하는데도 저녁밥을 내가 하는 게 불문율처럼 되어 버린 우리 부부. 극도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밥을 할 때마다 남편은 '최고 요리사'라고 나를 치켜세운다. 그럼 나는 요리사인가 아닌가. 내 정체성이 헷갈린다. 얼렁뚱땅 찌개를 끓일 땐 손맛이 좀 있고, 모양내기가 필요한 요리를 할 땐 한 없이 겸손해지는 이 '요리자'란.


 그렇다. 나는 '요리자'일 뿐이다. 김밥은 못 말고 찌개는 곧잘 끓이는. 둘 다 잘하는 사람은 글자 그대로 '요리사'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국민 모두가 요리사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요리 말고도 잘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요리에 대한 콤플렉스는 방송의 폐해일 수 있다. 방송에서 보이는 연예인이 요리까지 잘하는 모습을 볼 때다. 평범한 나는 저 정도는 해야 한다라는 무언의 압박감이 작용한 결과로. 바쁜 연예인도 살림, 요리가 완벽한데 나는 이게 뭐야 하는 열등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작은 흠집으로 시작된 열등감에 전전 긍긍하는 날이 있다. 열심히 일한 결과 다들 좋다고 평가해주었는데 딱 한 사람이 나쁘다고 하면 온종일 기분을 망치기도 한다. 비관적인 성격이라서일까. 그럼 관론자와 비관론자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미국 심리학회 회장을 역임한 마틴 셀리그먼 박사는 비관론자와 낙관론자 사이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고 했다. 비관론자는 부정적 사건을 곧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고정적 특성으로 연결한다. 그래서 자신이 문제이며 사건 해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낙관론자들은 이와 반대다. 그들은 부정적 사건을 '일시적이며 구체적인 상황'과 연결한다. 그들은 무언가가  잘 못되었을 때 상황을 파악하고 앞으로 그 상황을 어떻게 바꿀지 전략을 세운다.


 '요리자'와 '요리사' 사이엔 심한 간극이 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저 하루하루 요리 자일뿐이다. 가끔씩 남편의 '최고 요리사'라는 아부에 놀아나는.


 그러니까 나는 요리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자 모든 게 분명해졌다. 나는 모든 걸 잘할 수 없다. 그리고 나 스스로 꽤 잘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도 가끔은 잘하고 가끔은 못 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리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결론, 고작 김밥 하나 예쁘게 못 만다고 해서 요리 고자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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