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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Jun 27. 2023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승진누락 그 울분에 대하여


둘 다 승진에서 물을 먹고 난 후 회사밖에서 뭐라도 좀 해보자 하고 브런치로 의기투합했던 최대리는 나보다 6개월 빨리 승진을 했다.

온갖 굴욕을 다 겪고 난 뒤의 승진이긴 했지만, 어쨌든 한 고비를 먼저 넘긴 최대리가 나는 부러웠고, 이제 그녀도 회사에 대한 입장과 시선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예상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승진하고 나서 회사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굳건하게 닫혀버렸다. 뭘 또 이렇게까지... 난 그때가지만 해도 최대리가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었다.


승진하고 1년이 돼 가는 지금 나는 최대리가 왜 그랬는지 조금 알 것도 같다.


 승진누락됐니? 회사의 인사제도와 인사권자에 대한 입장정리 끝났니? 에이 그러지 마, 이번에 정말 네 차례인 걸? 이것 봐, 드디어 승진! 자 그럼 이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지?라고 한다면 이건 원인과 결과를 지나치게 선형적인 구조로 접근한 꼴이 된다.


어떤 원인으로 인해 이미 발생한 결과가 (그 원인이 제거됐다고 해서) 사라지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사가 그렇게 일차원적으로 풀렸다면 우리가 지금 하는 고민의 상당 부분은 이미 고민이 아닐 것이다.


 그때를 떠올리다 보니 간신히 아문 생채기에서 통증이 올라오는 기분이 든다.


 시쳇말로 직장생활은 승진과 월급 빼면 시체인데,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핵심 동인이 한 큐에 날아간 때였다. 일절 준비가 안 된 상태라 절치부심을 하더라도 빅엿을 준 회사 안에서 해야 한다는 그 구질구질한 신세에 한도초과의 자괴감을 느꼈던 것도 그때다.


내가 있는 곳은 어딘가? 나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근데 아까부터 어디 드립을 치는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승진누락과 그로 인한 굴욕감은 생각보다 진하고 파급력이 있었다. 그래서 한 동안 동냥하는 거지처럼 세상의 지식을 수집하러 쏘다녔었다. 온갖 강의와 강연을 중독자처럼 들으러 다니고, 평소 읽지 않았던 분야와 장르의 책들을 격파해 나갔던 것도 전부 다 그때였다. 그때 노선을 확실히 정하고 정교하게 한 칼을 갈았다면 지금 이 글은 회사밖에서 쓰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시절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무지했고, 겁이 많았다.


 당시 내게 용기와 인사이트를 준 글들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이데일리에 연재되는 이재형 님의 칼럼이었다. 칼럼을 통해 존 프렌치와 버트램 레이븐이 조직행동론에서 권력의 원천을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 네 가지가 회사와 연관된 것 같아 이제와 승진 누락의 울분을 담아 곱씹어본다.


1. 보상적 권력


급여 인상과 승진, 과업 배당이 여기에 속하는데 권력 행사자의 보상 능력에 기인하는 권력으로, 권력수용자에게 보상이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한다.

 

일반 직원들이 인사권자에게 순응하고 근무평가자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그들이 바로 이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월급쟁이인 내게도 보상은 의미 있었고 영향력도 컸지만, 그 보상을 하사하는 권력 행사자의 기준(기준이란 게 있긴 했다면)에 동조할 수가 없어 결국 내 정신건강을 챙기는 것을 선택했다.


2. 강압적 권력


권력 행사자가 권력 수용자에게 벌(해고, 징계, 작업 시간 단축 등)을 줄 수 있다고 인식하는 데 기초한다.


공공기관이라 이건 참 다행인 건가. 그럴 권력은 규정이 정하는 절차에서만 나온다. 혹시 착각해서 상사라는 이유로 행사했다가는 역풍을 맞을 것이다. 적어도 여기는 벌 받을 사유가 대부분 권력 행사자 쪽에 차고 넘친다는 것이 정설이다.


3. 준거적 권력


어떤 사람이 특별한 자질(웅변술, 인간관계 능력, 높은 도덕적 자질 등)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닮으려고 할 때 생기는 권력을 말한다.


솔직히 이 설명을 읽을 때 이건 권력계의 해태나 유니콘과 같은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권력을 가진 자가 있다면 리스펙이고, 이런 자와 일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축하한다, 부럽다.


4. 전문적 권력


사람들이 권력 행사자가 특정 분야나 상황에 대한 지식수준이 높다고 느낄 때 발생하는 권력으로, 직무경험과 연관된다.


회사를 다니며 직위와 직급에 비례하여 전문적 권력이 있을 거란 '상식'으로 접근했다가 가장 세게 뒤통수 맞은 지점이 바로 여기다.

대체 이런 미천함으로 어떻게 저 자리를 꿰찬 거지? 하는 의문들은 나를 시대유감과 세대유감으로 들끓게 했고, 종국엔 인생지사 다 쌧복이구나 하는 쌧복론자로 만들었다.





 승진 누락이라는 트리거로 최 대리는 승진한 이후에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곧 시험인데 최대리의 준비와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온갖 쌧복이 그녀와 함께 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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