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디 Jun 27. 2023

내 18번이 용비어천가였더라면


 학창 시절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국어였다. 생선토막처럼 잘린 작품의 한 부분을 시험문제의 지문으로 만나 문제로 풀어내야 하는 건 비극이었지만, 수업시간에 문학 작품을 배우는 건 언제나 설레고 신나는 일이었다.


물론 나라고 모든 작품이 다 재밌었던 건 아니었다. 특히 고전문학 작품들은 고어로 씌어있고 그 내용이 난해해서 그걸 배울 때만큼은 (아무리 국어시간이어도) 흥미를 갖기 힘들었다. 그중 가장 끝판왕은 역시 용비어천가였는데, 회사원이 돼보고 나니 용비어천가를 '불러야 하는' 어려움에 비하면 '배우는' 어려움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시대가 변했기에 윗세대같이 용비어천가를 대놓고 부를 일은 극히 드물긴 한데, (나같이 비뚤어진 인간에게는) 자화자찬 셀프 용비어천가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은은한 추임새를 넣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다.


  주말에 책(브라이언 클라스, 권력의 심리학)을 읽다가 북한이 개발한 주체사상이라는 통치 신학이 언급된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국인 저자가 소개해주는 북한 얘기가 다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라 남한의 한 사람으로서 신기하기도 했다)

저자가 공식적으로 전해지는 몇 가지를 나열해 줬는데 김 씨 일가는 수천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고, 보통 사람들과 달리 화장실을 갈 필요가 없으며, 햄버거를 발명했다는 신화가 있다고 한다.


 곰이 쑥과 마늘만 먹고 사람이 됐다는 것보다 더 믿기 어려운 내용으로 권력을 세뇌시키려는 발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이 신화의 놀라운 점은 내용은 거들뿐, 핵심적인 목적은 따로 있다는 것에 있다.

 이 신화는 북한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을 분류하는 충성도 테스트로 쓰이고 있었다. 즉 '친애하는 지도자'에 관한 거짓말을 공개적으로 입 밖에 낼 수 있는 사람은 정권의 신뢰를 받아도 좋은 사람일 가능성이 더 크고, 이 말도 안 되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수 있는 부하는 투자해도 좋은 부하로 분류된다.


 이 미친듯한 신화를 누가 믿는지, 믿지 않는지를 살펴보면서 정권과 사회에 속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테스트한다는 것이다. 독재자가 정신을 놓아서가 아니라 정교한 전략을 가지고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에 난 또 허를 찔렸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는데, 심지어 그는 권력유지목숨을 건 독재자인데 그 이면을 놓치고 말았다.





 

 이 회사에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게 던져졌을 수많은 충성도 테스트를 떠올려본다.

 수차례 오답을 적어냈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수차례 백지를 낼 때의 애티튜드는 그 얼마나 무례하고 불손했던가.


 생물학적인 목숨을 앗아가는 북한의 처형과 비할 순 없겠지만, 충성도 테스트의 이면을 파악하지 못한 대가로 (직장인으로서의) 사회적 목숨이 날아간 정도의 대가를 치렀다. 작년에 다닌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다니는 거 보면, 질릴 정도로 질긴 건 회사가 아닌 나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서문탁의 '사미인곡'은 좀 부르는데?라는 평가를 제법 들어왔는데...


 다음 회사 행사 때, 비공식적인 충성도 테스트가 난무하기 직전에, 공식적인 축하무대로, 제대로 한 번 불러 젖히면, 재밌을 거 같단 상상을 해본다.

이전 06화 조직문화를 빙자한 풍토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