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하기 1단계
대학교 3학년 중간고사 기간이었나, 우연히 SNS에서 독일의 ‘본’이라는 도시의 겹벚꽃길 사진을 보게 되었다.
얼마나 아름답던지!
때는 친구들이 하나둘 휴학을 하고 학교를 비우던 시기였고, 나는 겹벚꽃길을 실제로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휴학을 하고 유럽여행을 결심했다.
많은 인생의 선배들에게 휴학은 뚜렷한 목표와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있을 때 하라는 조언을 듣곤 했었다.
인생에 대한 목표와 계획!
그 시기의 나에게 그런 건 없었다.
인생은 막연했고, 그저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꽃이 필 때 여행을 가고 싶었고, 그래서 휴학을 했다.
처음으로 혼자 가는 장기간의 해외여행을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 달 동안 5년 간의 꽃이 피는 시기를 조사하고 날짜를 계산해 여행 계획을 짜고, 항공권, 숙박, 교통 예약까지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렇게 도착한 본.
내 철저한 계산과 달리 몇십 년 만에 기상 이변으로 꽃은 이미 다 져있었다.
눈물을 찔끔할 뻔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구나.
비록 화려한 겹벚꽃길을 보진 못했지만, 여행은 꽤 괜찮았다.
길거리에서 연주하는 중년의 악사들,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젤리들이 가득했던 젤리 아울렛, 넓은 잔디밭, 게다가 소매치기의 위협으로부터 긴장하고 있던 내게 지갑을 찾아준 한 청년까지!
평화로운 순간들이었다.
한 번의 여행은 일 년 정도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라 했다.
벚꽃을 보겠다는 목적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그 여행은 내가 일 년을 행복하게 살게 하는 힘이 되었고, 그 경험을 버팀목 삼아 교환학생을 갈 결심도 하게 되었다.
내가 굳이 이 시국에 엄마와 유럽여행을 결심한 것은 힘을 내고 싶어서였다.
우리는 힘들었고, 여행이 힘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는 위드코로나의 시대, 전 국민 백신 접종 완료율 70퍼센트 돌파!
식당이나 카페의 시간제한도 없어졌고, 재택근무도 없어졌다.
해외 몇몇 나라도 닫혔던 문장을 다시 열었다.
사실 당시 나는 남미에 푹 빠져있었다.
그런데 남미 국가들의 문은 도무지 열릴 기미가 안보였고, 엄두도 안 났다.
반면 유럽은 그냥 그랬다.
독일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면서 '유럽'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도시들을 가보았을뿐더러, 여동생과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중 대판 싸웠던 기억 때문인지 유럽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디든 떠나야 했다.
왜냐하면 여행 한 번이면 엄마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었기 때문이다.
많은 미디어 매체에서는 갱년기를 겪고 있는 엄마를 위해, 자식들이 엄마를 모시고 네일을 받으러 가거나, 예쁜 카페 혹은 여행을 가며 기분전환을 시켜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는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 엄마에게 괜한 일거리를 준다. 그럼 엄마는 집안일을 하며 가정 내의 자신의 필요성을 되새기곤 한다.
그런 과정들을 지나면 엄마들은 환하게 웃으며 갱년기를 회복하고, 가족들 역시 다시 화기애애해지곤 했다.
내가 그동안 봐온 갱년기란 그런 것이었다.
아마 주제넘게도 여행으로 엄마를 구원하고자 한 자신감은 거기서 나왔을 것이다.
물론 실제 여행을 통해 미디어 매체에서 보여준 갱년기 극복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허상인지 깨달았지만 말이다.
때마침 엄마는 차승원과 유해진이 나오는 예능 ‘스페인 하숙’ 재방송을 보곤 스페인에 관심을 가졌다.
스페인은 위드코로나와 함께 여행객들에게 문을 연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였으니 스페인에 안 갈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맞물려서 일단 스페인에 가기로 했다.
여행의 시작은 아무래도 항공권이다.
항공권을 사기 전엔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in과 out을 어디로 설정할 것인지
두 번째는 여행기간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결국 여행 계획에 대한 어느 정도의 구성이 있어야 항공권을 구매할 수 있는 것이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도시 바르셀로나로 들어가는 도시를 정했다.
그렇다면 나가는 도시는?
머릿속으로 세계지도를 떠올려 본다.
스페인을 가는데 바로 옆에 포르투갈을 포기하기에는 아깝다. 그렇게 포르투갈도 추가된다.
하지만 포르투갈 도시의 공항들은 규모가 크지 않다.
그렇다면 out을 위해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나? 그럴 계획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계획을 짜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바로 위가 프랑스인데?
이왕 오랜만에 나가는 유럽인데 내가 가장 감명받았던 도시이자, 나만 보고 있는 것이 죄스러워서 엄마 생각이 가장 많이 났던 도시, 파리를 추가하자!
그렇게 In은 바르셀로나, Out은 파리가 되었다.
가는 나라들의 윤곽이 잡히니 파티원이 추가되었다.
이탈리아에서 대판 싸웠던 그 동생이 파리에 꼭 가고 싶단다.
그래도 이젠 사이도 꽤 나쁘지 않고, 둘 다 이십 대 중반 정도의 성숙한 성인이니 괜찮지 않을까?
둘보다는 셋이 더 재밌겠지.
흔히들 하는 실수를 답습해 과거를 미화하며 동생을 파티원으로 받아들였다.
여행기간을 설정하기 위해 구체적인 루트를 정할 때다.
먼저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세비야는 각각 스페인의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도시로 유명하다.
그리고 마드리드는 그냥 스페인의 수도로 유명하다.
마드리드는 내가 가보지 않은 미지의 도시였는데, 그래도 그 나라의 수도는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바르셀로나, 세비야, 마드리드 세 도시로 정했다.
개인적으로 포르투갈을 좋아했다.
포르투갈에서 좋은 동행들을 만났었다.
같이 리스본에서 먹었던 에그타르트를 비롯한 맛있는 음식들을 맛있었고, 적당히 따뜻한 날씨가 좋았었다.
그리고 한참 SNS에서 포르투 사진들이 많이 올라와서 그런가 포르투에 꼭 다시 가고 싶었다.
포르투갈은 리스본과 포르투를 간다.
마지막 도시는 파리.
파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도시고, 동생이 가장 가고 싶은 도시, 그리고 엄마에게는 ‘유럽’하면 떠오르는 도시다.
그렇지만 파리는 물가도 비싸니 일정을 길지 않게 잡을 계획이다.
한국의 도시들도 종종 헷갈려하는 엄마와 동생에게 유럽 도시의 이름을 외울 확률은 아주 낮다.
그래서 도시 선정을 온전히 내 마음대로, 그리고 내 욕심대로 했다.
나는 자신 있었다.
이미 한 번 내지는 두 번 이상 가본 유럽 도시들이니 여행하기 쉬울 것이라는, 내가 좋아하니까 남들도 좋아할 것이라는 착각을 했으니 말이다.
여행 준비를 하면서 정말 놀랍던 것은 바로 항공권의 가격이었다.
항공권은 정말 저렴했다.
당시 여행업계는 얼어있었고, 그래서 그런지 왕복 티켓의 가장 최저가가 68만 원선이었다. 세상에!
그럼 어떤 항공사를 선택해야 할까?
가장 저렴한 티켓을 고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긴 하지만, 항공사를 선택하는 나만의 기준이 있긴 했다.
중동 항공사는 제외다.
중동 항공사를 타는 경우, 중동에서 경유를 하기 때문에 비행시간이 아시아나 유럽 항공사에 비해 4시간 정도 더 길다.
대략 스무 시간 정도의 비행시간을 견디는 것은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중동항공사는 무조건적으로 제외했었다.
하지만 그건 코로나 이전의 기준이다.
이 시국에 여행을 가는 것은 코로나에 걸릴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특히, 당시 한국의 정책에 따르면 코로나에 걸리면 음성이 나올 때까지 입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준비책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코로나에 걸리면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계획도 있어야 한다.
여행 중 코로나에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2021년 기준으로는 가장 먼저 귀국 편 항공권을 미루어야 한다.
대부분의 항공사들이 확진이 되면 무료로 표 변경이 가능했기에 문제없다.
그러고 나서는 자가 격리할 공간을 구해야 한다.
여행객들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보통 호텔이다.
그러나 PCR 검사가 음성이 나올 때까지 호텔에서 자가격리를 하며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국에서 들 수 있는 여행자보험은 병원에 가는 것이 아닌 이상, 자가격리 시 발생하는 비용을 보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항공사는 에티하드였다.
당시 몇몇 항공사들은 항공권에 코로나19에 대한 보험을 포함하고 있었다.
에티하드는 항공편을 이용한 지 31일간 유효하며, 코로나에 확진될 경우 1인당 하루 100유로씩 최대 14일간 지원하는 보험을 제공했다.
항공권을 사면 보험이 함께라니 완전 1+1, 만수르 만세다. (에티하드항공은 아랍에미리트의 국영항공사다)
게다가 에티하드는 탑승 전 72시간 내의 PCR 검사에서 음성인 승객들만 태우니 좀 더 안심이 되었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이 항공사, 최저가로 68만 원이니 선택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이게 내 첫 번째 실수였다.
첫 번째 실수에 대한 대가는 여행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여행을 끝나고 한국에 돌아오면서 치르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어 두 번째 실수를 하고 마는데, 바로 항공권을 항공사 공식 사이트에서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최저가를 쫓다 여행사를 대행해 표를 구매한 것이다.
이 실수로 인해 바로 다음날부터 고통받게 된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계획을 짜고 항공권도 예매하니 마냥 설레기 시작했다.
엄마와 동생이 바르셀로나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볼 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리스본에서 에그타르트를 먹으면 정말 맛있어하겠지?
포르투의 동루이스 다리에서 야경을 보며 와인을 마셔야지.
그런 상상을 한지 하루 만에 첫 번째 위기가 도래했다.
오미크론의 등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