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에서 첫째 날
사춘기 때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뭐 그런 것까지 기억하니?’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춘기 때의 기억은 잘 안 난다.
어쩌면 흑역사를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종의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기억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어학연수를 갔을 때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세 달간 어학연수를 가는 삼촌네 가족 사이에 나도 껴서 간 적이 있다.
거기서 단어시험의 성적을 체벌 대상으로 보는 숙모의 훈육방식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
성적이라는 나의 노력의 결과가 매를 맞아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한 나는, 납득이 안 가는 그 상황에 이를 부득부득 갈며 시험지를 조작했었다.
훗날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사춘기의 나는 감정 기복이 아주 심해 양육이 어려웠다고 한다.
엄마가 나를 어학연수에 보낸 것은 만만치 않은 숙모에게 한 번 당해 보라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는 후일담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내 사춘기는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엄마를 닮은 것일지도 모른다.
전날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리스본까지는 수월하게 도착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체크아웃을 하고, 우버를 불렀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부른 우버만 타봤지, 직접 부르는 것은 난생처음이라 조금 떨렸다.
우버는 빠르게 정해진 장소로 왔고, 기사가 트렁크에 짐도 실어주었다. 우버, 정말 좋은 것이구나!
비행기가 좀 많이 흔들리긴 했지만, 리스본에도 잘 도착했다.
그뿐인가?
짐도 연착되지 않고 바로 찾았으며, 코로나 음성 검사지를 포함한 포르투갈 입국서류검사도 무사히 통과했다.
마치 운수 좋은 날처럼 말이다.
포르투갈로 말하자면 자신이 있는 나라였다.
리스본과 포르투 모두 경험이 있는 도시였고, 어떤 식당이 맛있었는지, 어디에 마트가 있었는지도 훤하게 기억이 났다.
다만 문제는 과거의 내가 버스를 이용해 리스본에 도착했었기 때문에, 리스본 공항에는 가본 적 없었다는 점이다.
첫 우버의 경험으로 우버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 붙어, 리스본 공항에서 시내까지도 우버를 이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리스본 공항에는 지정된 장소에서만 우버를 탈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정된 장소를 찾지 못하겠으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된다.
그러나 당시에는 우버에만 꽂혀서 우버 탑승장만을 찾아온 리스본 공항을 헤맸다.
비가 왔었는지 바닥에는 물 웅덩이가 잔뜩이지, 태양은 뜨겁고 덥지, 길은 모르겠지, 캐리어는 무거워서 손목이 아프지,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틱틱거렸고, 엄마와 동생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난 또 짜증이 났다.
아니 좀 같이 찾아주면 안 되나?
고생 끝에 힌트를 찾아냈다.
리스본 공항은 저층과 지상층이 나누어져 있었고, 우리는 저층에 있어서 탑승장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입국서류검사로 인해 공항 안으로 이동할 수 없었고, 다새 돌고 돌아 우버를 탈 수 있었다.
달리는 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도로가 공사 중이어서 우버는 숙소 근처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캐리어를 끌고 돌길을 지나는데 손목이 얼얼했다.
스물두 살의 나는 캐리어를 끌고 돌길 위로 지나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는데, 지금의 나는 손목이 아작 나는 것 같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장기여행을 할 때 캐리어 대신 배낭을 메고 다니는 건가 보다.
숙소 입구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안내받은 비밀번호를 아무리 눌러도 대문이 열리지 않았다.
우리의 숙소는 오피스가 없고, 키오스크만 있는 아파트먼트 숙소였다.
그런데 대문이 열리지 않으니 키오스크 이용은 고사하고 문의를 할 곳도 없어 곤란했다.
길거리에서 대문을 잡고 씨름하는 우리에게 건너편의 식당 직원이 다가왔다.
뭐지? 이 와중에 호객행위를 하려는 건가? 짜증이 솟구쳤다.
잔뜩 예민해져 있는 나에게 식당 직원은 이 숙소는 보통 두시는 되어야 운영한다고 알려주었다.
오해한 것이 정말 미안했다. 알려주어서 고맙다며 저녁에 그 식당에 가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지키지는 않았지만.
한편, 이제 열두 시 반인데 한 시간 반이나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나는 호출 버튼을 누르고 ‘오픈 더 도어!!’를 계속 외쳤다. 플리즈를 덧붙일 마음의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별안간 옆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사람이 나왔다. 숙소의 숙박객으로 보이는 그 사람은 의아한 얼굴로 계단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고정문을 잡고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캐리어를 들고 있는 우리를 보고 젠틀하게 문을 잡아주었다.
나는 마치 고정문을 잡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드디어 건물 안으로 입성했다.
키오스크로 체크인 처리를 하고 배정받은 숙소로 올라갔다.
숙소는 아직 청소 중이었다.
짐보관은 가능하다는 말에, 우리는 짐을 맡기고 식사를 하러 갔다.
포르투갈에 왔으니 해물밥을 먹어줘야 한다.
숙소 근처에 위치한 꽤 유명한 해물밥 식당으로 향했다.
해물밥은 해산물이 풍부한 포르투갈의 국민음식이다.
여러 해물과 밥을 넣고 토마토소스에 뭉근하게 끓여낸 맛이다.
그래서 국밥을 먹는 것 같았고, 해물을 좋아하는 엄마도 조금 짜지만 맛이 괜찮다고 했다.
우리 모두 아주 만족스럽게 오늘의 첫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약속된 두시다.
우리는 캐리어에 자리가 없어서 최대한 많은 옷을 껴입고 있었고, 리스본은 더웠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게 하는 이 두꺼운 옷을 벗어던지고 싶었으나, 숙소는 여전히 청소 중이었다.
청소를 하고 있는 직원에게 언제쯤 끝나냐 물었더니, 세시는 되어야 한단다.
로비도 없는 아파트먼트형 숙소라 갈 곳이 없던 우리는 일단 눈에 보이는 옷가게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동생은 청치마를, 나는 노란색 가디건을 샀다. 엄마는 이제 옷은 관심이 없다고 했다.
다시 약속된 세시,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드디어 옷을 벗어던지고 침대에 뛰어들었다.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와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그런 나를 보고, 엄마가 동생과 둘이서 마트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대신 유럽 돈을 계산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나는 엄마와 동생에게 간단하게 지폐, 동전 단위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엄마와 동생이 나가니 숙소 안은 고요해졌다.
막상 이렇게 조용해지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가 없어 짐을 풀었다.
슬리퍼들을 꺼내 두고, 멀티탭을 연결해두고, 전기방석을 깔았다. 그리고 다시 누워 하루를 복기해보았다.
포르투갈 신고식도 너무 힘들었고, 공항에서 이동하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도 리스본은 잘 아는 도시이니 이제부터 잘하면 된다고,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 사이 엄마와 동생이 물을 사들고 도착했다. 동전을 딱 떨어지게 썼다는 말에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우리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 전망대에 가기로 했다.
나와 동생이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는데, 엄마는 가져온 옷이 트레이닝복 세트밖에 없다며 똑같은 옷을 입기 싫다고 했다.
그런 엄마에게 동생이 본인의 트위드자켓을 추천했다.
엄마는 본인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거절하다가 못 이기는 척 한번 자켓을 걸쳤다.
우리는 너무 잘 어울린다며 온몸으로 박수를 쳤고, 엄마는 그 트위드 자켓을 입기로 했다.
리스본의 구시가지에는 여러 전망대가 있고, 각 전망대마다 조금씩 다른 리스본의 전경을 즐길 수 있다.
숙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기에, 우리는 전망대들에 걸어가기로 했다.
시작은 화기애애했다.
지나가는 노란색 트램도 구경하고, 가게에 걸린 옷들도 한번 둘러봤다.
하지만 내가 간과하였던 것은, 도시의 전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는 높은 곳에 위치해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리스본에 왔을 때는 전망대가 나올 때마다 잠시 멈춰 이야기도 나누고, 전경도 구경했었다.
그 여유로움도 좋았고, 높은 곳에서 보는 리스본의 붉은 지붕들도 좋았다.
나와는 다르게 엄마와 동생은 도대체 전망대에서 무엇을 봐야 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뭐긴 뭐야, 리스본의 전경이지.
엄마가 기대한 큰 랜드마크도 없어서인지, 아니면 언덕을 오르느라 쌓인 신체적인 피로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엄마의 침묵이 시작되었다.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몇몇 농담이나 말을 건네며 대화를 시도했지만, 엄마는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엄마는 빨리 올라가기나 하자 말만 했다.
이 전망대를 가도, 저 전망대를 가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마 엄마와 동생은 더 높은 곳에 올라가면 대단한 무언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쉬어가며 전망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사진만 툭툭 찍고 계속해서 올라가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이게 관광을 하는 것인지, 등산을 하는 것인지 나도 헷갈리기 시작했고, 리스본이라는 도시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 나는 리스본을 좋아했었는데, 왜 그랬을까?
한때 너무나 사랑했던 붉은 지붕에 바다같이 광활한 바다가 함께 보이는 전망에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리스본에 처음 왔던 나와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엄마에게 미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모든 것을 새롭게 느끼고 좋아할 엄마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가 상상했던 엄마의 모습은 말 그대로 상상이었다. 엄마에게도 취향이 있었고, 이런 전망이나 여유는 엄마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엄마가 야속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내가 아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망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도 동생의 짧은 탄성과, 사진을 찍는 찰칵찰칵 소리를 빼고는 침묵만이 계속되었다.
숙소에서 출발할 때는 리스본의 전망을 볼 수 있는 노천카페를 갈 계획이었는데, 예상한 반응이 아니니 당황해서 잊어버렸다.
그저 무엇이 문제인지만 계속 생각했다.
동생이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지만, 엄마는 해가 지기 전에 어서 내려가자고 했다.
올라온 보람도 없이 다시 내려가게 되었다.
돌길에 물기가 약간 있어 미끄러웠다.
나와 동생은 호들갑을 떨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낄낄거리는 우리와 달리, 엄마는 홀로 쌩하니 가버렸다.
그러다 갈림길이 나오면 언제 오냐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엄마가 단순히 힘이 들어서 그러는 것인지,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러는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다.
공항에서는 엄마가 내 눈치를 보았다면, 이번에는 내가 엄마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엄마를 쫓아갔다.
날이 쌀쌀해져, 따뜻한 국물을 먹으면 엄마의 기분이 좋아질까 하는 마음에 구글에서 신라면을 판다는 슈퍼를 찾았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마트에는 신라면이 없었고, 나는 엄마와 동생에게 ‘그럼 그렇지’라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머쓱하게 코메르시우 광장으로 향했다.
코메르시우 광장에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큰 트리가 설치되어있었다.
동생은 오늘 하루 중 가장 큰 반응을 보이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엄마의 반응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래서 여기서 뭘 보라는 건데?”
바닥이 축축해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여유도 즐길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겠다.
이젠 나도 리스본이라는 도시의 매력을 잘 모르겠는 지경까지 와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도시 중 하나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어서 서글픈 마음이 들었고, 엄마에게는 미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모든 것을 새롭게 느끼고 좋아할 엄마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기대한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내가 상상했던 엄마의 모습은 말 그대로 상상이었다.
진짜 현실의 엄마에게는 취향이 있었고, 이런 전망이나 여유는 엄마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심드렁하게 서있는 엄마를 보며 그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엄마가 야속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슬슬 저녁을 먹어야 한다.
숙소 맞은편에 있는 식당은 햄버거를 파는 가게였는데, 낮에 도움을 주었던 직원이 보이지 않았다.
햄버거는 내가 썩 좋아하지 않는 메뉴인 데다가, 리스본 다음 도시인 포르투의 숙소는 호텔이라 주방이 없을 테니 오늘은 숙소에서 만들어 먹기로 했다.
이번엔 엄마가 숙소에서 있기로 하고, 동생과 내가 마트에 갔다.
마트에서 가장 먼저 본 것은 와인 코너다.
예전에 리스본을 여행할 때 청포도 와인을 정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서 그 와인을 찾아보았다. 그 와인이면 엄마가 리스본을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기억을 더듬어 비슷하게 생긴 와인을 발견해 집어 들었다.
내 손 든 이 와인이 내가 마셨던 향긋한 청포도 와인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고 파스타 소스를 찾았다.
대충 그간 산 파스타 소스와 비슷하게 생긴 붉은 소스를 집어 들었다.
유리병에는 마늘이 그려져 있었는데, 아라비아따 소스일 것이라는 속단을 내리고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렇게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빵집에 들러 프렌치토스트도 하나를 사서 숙소에 도착했다.
엄마는 고기를 굽고, 나는 파스타를 만들었다.
파스타 면이 다 익은듯하여, 파스타 소스의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이 냄새, 내가 아는 그 파스타 소스가 아니었다.
도대체 이 강렬한 냄새는 뭐지?
내 코는 이 소스는 파스타 소스가 아니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 손은 소스를 냄비에 다 부어버리고 말았다.
돌이킬 수 없었다.
치즈를 넣으면 괜찮아질까? 가지고 있던 치즈도 넣어보고, 숙소에 있던 설탕도 잔뜩 뿌렸다.
그래도 냄새는 변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요리가 완성되었다.
식탁 위에 냄비를 올리며, 내게 생소한 파스타 소스이기를, 냄새만 강렬할 뿐 맛은 좋기를 빌었다.
하지만 선뜻 내가 먼저 그 음식을 도전하진 못했다. 괜히 포크로 빵만 찢고 있는데, 엄마가 파스타를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곧바로 그것을 뱉어버렸다.
“이게 뭐야!!”
뒤이어 나도 한 입 먹어보았다가 다시 뱉었다.
그것은 뭐랄까, 마늘과 고추만을 간 소스에 면을 비빈 맛이라고 해야 하나, 괴랄했다.
엄마 말에 따르면, 김장을 할 때 넣는 재료 중 하나같다고 했다.
리스본에서 김장이요..? 그렇지만 나는 그냥 끄덕였다.
내가 저 괴랄한 음식을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파스타는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이 실수를 만회하고자 와인을 꺼내왔다.
와인을 따면서, 내가 과거 먹어보았던 청포도 와인의 예찬을 늘어놓았다.
초록빛이 도는 투명한 색의, 달콤하고 새콤한 그 와인!
드디어 코르크 마개를 열고 잔에 와인을 따랐다.
와인은 적색이었다.
아주 진한 적색.
그렇다. 와인도 실패하고 만 것이다.
엄마는 이런 와인도 좋다고 했지만, 한잔 이상을 마시지 않았다.
오늘은 뭐가 이렇게 잘 풀리지 않는 것인지.
그래도 숙소에 있으니 엄마의 기분은 다시 회복된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밥을 먹는데, 엄마는 오전에 공항에서의 일을 꺼내면서 내가 짜증도 잘 내고, 너무 예민하다는 말을 꺼냈다.
동생은 엄마 옆에서 어찌나 동조를 잘해주던지. 역시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이때쯤 나는, 내가 예민하고 짜증이 많다는 이야기에 질려버렸다.
그래서 대충 그랬군, 그랬구나라고 넘겨버렸다.
나는 내가 힘들 때 누군가 도와주기를 바라지만, 여기에 그럴 여력이 있는 사람은 없다.
내가 조금 더 상황을 유연하게 넘기는 법을 배우기 전에는, 이 간극이 좁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도, 나도 오르락내리락 한 리스본의 첫째 날이었다.
엄마는 혹독한 사춘기를 보냈다고 했다.
아동 훈육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던 시절, 엄마는 서울 할머니와도 트러블이 많았고, 청소년 시기가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우리의 사춘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엄마도 같은 시기를 겪었기 때문에 이해한다고 말해주었다.
동생은 체질적으로 엄마를 닮았다.
반면 나는 서울할머니가 엄마와 닮았다고 한 눈코입을 빼고 체격, 특히 발 모양까지 아빠를 닮았다.
하지만 나의 기질적인 부분에서 엄마와 닮은 점을 발견하곤 한다.
엄마를 보고 있으면, 아직 먼 훗날이지만 나의 갱년기는 얼마나 힘들까 싶어 두렵다.
동시에 그 순간이 되면 지금 내가 엄마에게 가지고 있는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나도 엄마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엄마를 이해하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남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