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에서 셋째 날_근데 이제 작품 설명을 곁들인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이 스스로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공과금, 병원, 각종 계약들까지 앞으로 나 혼자 해결하고 책임질 일이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부모님의 보호자가 될 것이다.
여전히 내 보호자는 나의 부모님이다.
하지만 간혹 부모님이 전자기기를 바꿀 때 내가 옆에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며, 엄마가 중고거래를 할 때 등장하는 진상들을 내가 퇴치하곤 한다.
점점 부모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상황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며, 내가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여행을 하면서, 내가 엄마와 동생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다.
해외 경험도 어느 정도 있었고, 엄마 대신 동생의 병원을 따라갔던 것과 별 차이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난 26살이었고, 나 하나 건사하기도 쉽지 않은 외국에서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기에는 버거웠다.
그리고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국외 상황은 천지차이였기 때문에,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그 순간부터 긴장을 많이 하고 있었다.
마드리드쯤에서는 그 긴장이 버거웠고, 조금 지쳤었다.
내게도 보호자가 필요했다.
오늘의 메인 일정은 프라도 미술관이다.
예전에 혼자 스페인 여행을 할 때, 시간 관계상 마드리드에는 지나쳤었다.
그래서 다음을 기약하며 마드리드에 가게 되면 꼭 하기로 했던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내일 있을 톨레도&세고비아 투어, 그리고 두 번째는 프라도 미술관 관람이다.
그 두 가지는 똑똑히 기억한다.
하지만 왜 그 두 가지를 하고 싶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났다.
톨레도&세고비아 투어는 가보지 않은 근교이니 가고 싶었을 것이라고 치자.
하지만 프라도 미술관에는 왜 가고 싶어 했을까?
끝나 기억하지 못했고, 일단 나는 프라도 미술관 투어를 신청했다.
오늘 프라도 미술관 투어는 우리 셋 말고도, 또 함께 할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여행시기가 겹쳤던 전 회사의 동기 언니였다.
동생과 함께 여행 중이었던 언니는 오늘 마드리드에 도착해, 함께 미술관 투어를 듣기로 했다.
우리가 여행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다돼가는데도, 엄마는 여전히 잠을 잘 못 잔다고 했다.
나는 이제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전날 밤에 수면제를 먹지 않았냐고 물었다.
엄마는 수면제는 잠에 들게 만들긴 하지만, 그게 양질의 잠은 아니라고 했다.
여행을 하면서 그날그날의 일정을 우리의 카톡방에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동생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읽는 것보다 듣는 것에 익숙한 엄마는 매일 아침마다 오늘은 무엇을 하냐고 물었다.
슬슬 나는 몇 번씩 일정에 대해 반복해서 말하는 것에 짜증이 났다.
오늘의 일정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고, 엄마가 씻는 사이 동생을 구석으로 불러냈다.
내가 이미 공유했거나, 설명했던 것에 대해 엄마가 다시 묻는다면 그때는 네가 대답해주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내가 짜증을 낼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것을 어떻게 외우냐는 동생에게, 카톡방에 올린 것 정도는 숙지하라고 언성을 높였다.
동생과의 실랑이를 들은 것인지, 그 뒤로 엄마는 일정에 대해서 다시는 물어보지 않았다.
노환이 와서 침침한 눈으로 카톡방만 확인할 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내일모레 리스본, 그러니까 포르투갈로 이동한다.
당시 포르투갈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72시간 내의 PCR 혹은 48시간 내의 안티젠(신속항원검사)의 음성 결과지가 필요했다.
PCR보다는 안티젠의 가격이 절반가량 저렴했기 때문에 우리는 안티젠을 받기로 했다.
연구소는 마드리드 내에 여러 곳이 있다.
원래는 숙소 근처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검사를 받을 계획이었지만, 늦장을 부리다 이미 예약이 꽉 차버렸다.
결국 그다음으로 가까운 연구소로 예약을 해두었다.
그다음으로 가깝긴 했지만, 지하철을 타고 나가야 한다.
마드리드의 시내를 벗어나는 것이다.
마드리드의 교통권은 하나만으로도 여러 명이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10번 사용할 수 있는 교통카드를 하나 구매했다.
엄마와 동생에게 내가 개찰구를 지나고 나서 교통카드를 건네줄 수 있도록 가까이 붙으라고 했다.
그런데 엄마와 동생은 이를 잘못 이해했나 보다.
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통과하려는데 엄마가 내 어깨를 잡고, 동생은 그 뒤를 이어 엄마의 어깨를 잡았다.
마치 기차처럼 우리는 찰싹 붙어 쪼르륵 개찰구를 지나갔다.
이게 아니라며 동생과 엄마를 개찰구 건너편으로 다시 보내고, 한 명씩 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통과했다.
하마터면 무임승차로 직원에게 잡힐 뻔했다.
마드리드의 시내 바깥은 어떨까?
물음의 답은 그냥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것이다.
붉은 벽돌 건물들을 지나 연구소에 도착했다.
예약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오래 기다리지 않고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외국은 코로나 검사를 안 아프게 한다던데 한국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방심한 사이에 반대쪽 콧구멍으로도 면봉이 훅 들어왔다.
알싸함에 눈물과 콧물이 찔끔 났다.
우리가 뽑은 ‘최고로 아픈 코로나 검사’였다.
점심까지 시간이 꽤 남아 연구소 근방에 위치한 쇼핑센터에 가보기로 했다.
여러 스파브랜드들을 둘러보며 이것저것 입어보았다.
하지만 이것을 꼭 사야 할까?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순간의 분위기에 휩쓸려 샀다가, 결국 안 입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옷들을 떠올렸다.
결국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가죽자켓을 내려놓았다.
정말 사야 하는 옷이라면, 나중에 또 만나겠지 뭐.
하지만 나중에라는 것은 없다.
이 이후로는 내 손을 떠난 가죽자켓을 다신 볼 수 없었다.
여행 중에 정말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바로 사야 한다.
엄마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 투어에 참여하며 가이드에게 추천받았었던 속옷 및 잠옷 브랜드인 ‘오이쇼’를 가장 궁금해했었다.
하지만 막상 가격표를 보더니, 이 돈을 주고 잠옷과 속옷을 사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며 그냥 나왔다.
동생은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아쉽지만 모두 빈손으로 나왔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지하철역으로 돌아가기 위해 언덕길을 올랐다.
가는 길에 신호등 앞에서 한 늙고 작은 개를 만났다.
개는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너다 중간에 뒤를 돌아 가만히 서있었다.
개가 자동차에 치일까 봐 걱정하는 동안, 곧 지팡이를 짚은 한 할아버지가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제야 개는 마저 횡단보도를 건너고 다시 뒤돌아 할아버지가 무사히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을 기다렸다.
할아버지가 개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개는 뒤따라오는 할아버지를 계속해서 확인하며 앞장서갔다.
이제 할아버지의 보호자는 저 늙은 개구나.
저 개는 언제부터 주인의 느린 걸음을 기다리고, 주변을 살피는 보호자가 되었을까?
엄마는 개가 너무 힘들어 보인다고 했다.
프라도 미술관에 도착했다.
우리는 미팅 장소인 스페인의 화가 고야의 동상 아래 앉아있었다.
왠지 건너편에 있는 중년의 신사분이 오늘의 투어 가이드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먼저 아는 척은 못하고 어색하게 우리끼리 속닥이며 앉아있었다.
미팅 시간이 다가왔고, 예상대로 신사분이 오셔서 인사를 하셨다.
안녕하세요..
빗방울이 떨어져 우리는 미술관 안에서 동행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투어를 앞두고 엄마와 동생에게 앉아있을 수 있을 때 최대한 앉아두라고 했다.
엄마의 첫 미술관 투어다.
엄마가 많이 좋아했던 외할아버지의 취미는 그림 그리기였다.
지금도 집에 할아버지가 그렸던 그림들이 걸려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엄마도 미술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엄마는 미술관 투어라면 당연히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도 생소한 작품들이 많았던 프라도 미술관 투어를 엄마가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bts를 좋아한다는 외국인 친구에게 내 취향의 온갖 마이너한 한국 노래를 소개하는 것과 같았다.
드디어 미술관에 도착한 동기 언니가 저 멀리서 오고 있었다.
아는 분이 언젠가 혼자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여행하는데, 우연히 전 남자친구를 만났다고 한다.
그때 전 남자친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해외에서는 지난 흑역사를 공유한 인연도 반갑게 느껴진다는데, 하물며 사이가 꽤 괜찮은 동기 언니를 만나니 마치 여기가 한국인 것처럼 안심이 되었다.
본격적인 투어 시작에 앞서, 최근 스페인 정부에서 미술품들을 정비하며, 작품 위치가 많이 바뀌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비교적 현대작인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근처의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으악!
목구멍에서 비명이 튀어나올 뻔했다.
맞아, 게르니카!
그제야 내가 왜 프라도 미술관에 오고 싶어 했는지 기억이 났다.
바로 나치의 게르니카 폭격 비극을 전해 들은 피카소가 일주일 만에 완성했다던, 8m나 되고, 보고만 있어도 그 참상이 그대로 전해진다던 게르니카를 보고 싶어서였다.
이걸 잊어버리다니! 그리고 게르니카가 다른 미술관으로 옮겨졌다니!!
심지어 게르니카가 있는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은 일요일과 평일 저녁에는 무료입장이다. 바로 방황하던 어제 말이다.
세상에,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가야 했는데….
난 잠이나 잔 것이다. 애통했다.
투어가 시작되었다.
투어를 들으며 인상 깊었던 몇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작가의 이름인 엘그레코는 스페인어로 그리스인이라는 뜻이다. 본명이 아닌, 그리스라는 그의 출신을 특징지은 것이다.
강렬한 색감의 화풍 그의 특징인데, 무엇보다도 빛의 사용 방식에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에서도 빛의 방향이 태양 등의 외부로부터 오는 자연스러운 방향이 아닌, 아기 예수에게서 빛이 나와 그 주변인들을 비춘다.
요즘에는 자주 볼 수 있는 화풍일 수도 있으나, 당시에는 충격적인 도전이었다고 한다.
쾌락의 정원은 세 폭의 제단화로, 꽤 큰 규모의 작품이다.
조금은 괴기스럽기도 한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데, 후에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 섬세한 작품은, 가까이에서 하나하나 뜯어보면 섬뜩함이 느껴진다.
‘쾌락의 정원’이라는 제목이 작가 히에로니무스 보쉬가 아닌, 후세 사람들이 붙인 만큼 많은 해석의 여지가 있는 작품이다.
만약 미술관에 불이 난다면, 어떤 작품을 가지고 나갈 것인가?
이 질문에 수많은 미술가들이 벨라스케스의 작품 ‘시녀들’을 뽑았다고 한다.
시녀들은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준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이다.
미술을 예술이 아닌 기술로 취급하던 시대에, 벨라스케스는 자신의 얼굴을 작품에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재능을 당당하게 선보인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것은 뒤쪽의 거울을 통해 외부의 관람객을 작품 속으로 끌어왔다는 점이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내가 작품을 보는 것인지, 그림 속 인물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경계가 흐려진다.
그리는 대상은 없고, 상황을 재현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빛은 정면, 오른쪽 창문, 그리고 뒤쪽 문에서 들어온다.
따라서 관람객의 시선은 그림의 중심에 서있는 마르가리타 공주에게서 뒤의 문으로 옮겨진다.
이러한 기법으로 작품 안의 공간을 확장시킨다.
많은 작가들이 시녀들의 형식과 기법을 재해석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은 한 사람, 피카소뿐이라고 했다.
물론 피카소도 완성품을 만들기 위해 58점이나 시녀들을 그려보았고, 완성품조차 스스로 만족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야는 사실적인 화풍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고야는 왕실 가족을 그릴 때조차 미화를 하지 않고 냉정하게 그렸다.
왕이 아닌 왕비를 그림 중앙에 배치해 왕의 무능을 표현했으며, 박색인 왕세자비의 얼굴을 아예 그리지도 않고 뒤를 보고 있는 것처럼 그렸다.
그렇기에 이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음에도 왕족으로서의 위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왕족을 이렇게 그리고도 고야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는데, 왕이 고야를 많이 아꼈거나, 이 풍자를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무능했던 것이다.
‘1808년 5월 3일’은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민중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 작품에서 민중들의 얼굴에는 비장함보다 두려움을 담겨 있다.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어리둥절, 억울함, 두려움과 절망을 사실적으로 담았다.
내가 아는 고야의 작품은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뿐이어서 고야가 궁정화가였다는 것도, 다양한 색상의 그림도 그렸다는 것이 새로웠다.
귀머거리의 집이라고 불리는 한 전원주택에는 성격이 괴팍한 귀머거리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죽은 후 사람들이 주택 안에 들어가 보니, 어두운 방의 벽에 기괴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 중 하나가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였고, 귀머거리 할아버지가 말년의 고야였던 것이다.
고야는 말년에 인간의 어두운 면을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일명 ‘검은 그림’들 중 하나인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아들에게 왕좌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아들들을 차례로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신화를 표현한 것이다.
한때 궁정화가로서 왕을 풍자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던 고야는, 말년에는 인간에 환멸을 느끼고 허무주의자가 되어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그리고 결국 고향을 떠나 프랑스에서 ‘검은 그림’을 그리다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처음부터 대중들에게 공개할 목적이 아니었던 이 우울하고 그로테스크한 그림은, 현재는 벽채로 뜯어져 프라도 미술관의 어두운 방에 걸려있다.
사실 고야를 제외하고는 내게 생소한 작가들이었는데, 마치 미술사 교수님의 설명 같은 가이트 투어에 재미있게 작품을 볼 수 있었다.
그런 나와 달리, 엄마와 동생에게는 이 미술관 투어가 너무 힘들었다.
엄마와 동생은 서로 속닥이더니 마지막 고야의 방에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곧바로 미술관 직원이 와서 엄마와 동생에게 경고를 주었다.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바닥에 앉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게 투어가 끝이 났다.
우리는 가이드에게 건너편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제자가 다빈치와 함께 작업하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쌍둥이 모나리자의 전시를 하고 있으니 한번 들려보라는 조언을 받았다.
하지만 쌍둥이 모나리자 전에, 우리는 일단 쉬어야 했다.
다리가 아프다는 엄마와 동생에게 1층 카페에 자리를 잡아 앉아있으라고 한 후, 카운터로 향했다.
그런데 문득, 영어가 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은 영어가 잘 통하는 나라는 아니니까.
메뉴판은 온통 스페인어였다.
어떻게 주문해야 하는 것이냐!
그때 함께 투어를 들은 동기 언니가 유창한 스페인어로 내가 주문하려던 오렌지주스를 주문해줬다.
맞아, 이 언니 스페인어학과였지!
언니는 내 구원자였고, 나는 눈물이 날 뻔했다.
언니는 우리 엄마와 스몰토크까지 능숙하게 해냈다.
이런 게 정말 어른인 걸까? 낯선 외국에서 보호자가 생긴 것만 같았다.
언니와 나는 내일 있을 톨레도&세고비아 투어 때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있다는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도 가보고 싶었지만, 엄마와 동생은 미술관투어로 너무 지쳐있었다.
그래, 일단 숙소로 가자.
동기 언니를 만났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혹은 그 사이에 마드리드가 익숙해진 것인지, 숙소로 가는 길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제저녁에 밤의 마드리드를 보지 못한 엄마도, 아름답다고 했다.
숙소 근처에 도착했다.
그런데 경찰이 우리의 숙소 입구를 통제하고 있었고, 저만치 앞에는 엄청난 인파의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또 시위를 하는 것인가?
앞을 막는 경찰에게 저 숙소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니 우리를 들여보내 줬다.
그때, 사람들이 모인 곳에 조명이 쏘아지며 노래가 흘러나왔다.
동생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봐야겠다며 경찰을 지나쳐 뛰어나갔다.
이 자식아!
엄마와 나도 동생을 따라갔고, 우리는 서로를 놓칠까 손을 잡고 인파 속으로 달려갔다.
이번에 사람들이 몰린 이유는 시위 때문이 아니라,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해 진행하는 쇼 때문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쇼는 거의 끝나갔다.
잔뜩 상기된 동생은 저 쇼를 처음부터 봐야겠다고 했다.
쇼는 정각마다 하는 것 같으니, 먼저 동생을 진정시키고 한 시간 뒤에 다시 오기로 했다.
때마침 머리가 빨리 굴러갔다.
백화점 안에 있다가 쇼가 시작되기 직전에 백화점 입구로 나오면 가장 앞에서 볼 수 있지 않나?
한 시간만 백화점에서 버티자!
백화점 1층은 한국처럼 화장품이나 시계 브랜드로 가득했다.
그렇다면 혹시 지하에는 식품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내려가 봤더니, 큰 마트가 있었다.
그동안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마트를 갔었는데, 바로 코앞에 이렇게 큰 마트가 있었다니!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이것저것 장을 보다 보니 어느새 정각이 다 되어간다.
우리는 다시 달렸다.
백화점 앞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었고, 곧 조명과 노래들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게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몰릴 일인가?’였다.
한국의 크리스마스 일루미네이션과 비교했을 때도, 정말 소박해 보였다.
동생을 힐끔 보니, 실망한 것인지 표정 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반짝거린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내 말에, 동생은 그래도 반짝거리는 것이 좋다고 했다.
으휴 나이 먹어봐라….
동생은 나더러 팔 십 먹은 노인처럼 말하지 말라고 했다.
.. 알았다.
드디어 늦은 저녁을 먹는다.
공용 주방에서 저녁을 먹는데, 한 한국인 아저씨가 들어왔다.
아저씨는 한국인인 우리를 보고 반가웠는지 말을 걸었다.
“한국인이세요?”
엄마는 화들짝 놀라며 얼어붙었다.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네, 혼자 여행 오셨나 봐요?”
혼자 여행을 왔다는 아저씨와 간단한 스몰토크를 하는 동안 엄마는 계속 얼어있었다.
아저씨가 요리를 하러 주방으로 들어가고, 내가 말했다.
“혼자 여행하다 한국인 만나면 반가울 수도 있지. 나도 예전에 혼자 여행할 때 그랬어.”
“그래도 왜 모르는 사람한테 말을 걸고 그런다니?”
엄마는 싫다고 했다.
한국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우연히 이웃을 마주치면, 나는 고개를 한번 까닥이고 만다.
하지만 그런 나와 달리, 엄마는 이웃주민들과 스몰토크를 나누곤 했었다.
그때와 다른 엄마의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하면서, 엄마도 외국이라고 긴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아까 그 아저씨가 다시 돌아왔다.
아저씨는 우리에게 유튜브를 보고 직접 만든 깍두기를 먹어보라고 건네었으나, 엄마는 괜찮다고 거절했다.
“왜? 한번 먹어봐.”
내가 깍두기를 먼저 먹어보자, 엄마도 아저씨의 반찬통에서 깍두기 한 개를 집었다.
엄마는 아직도 그 깍두기가 맛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갱년기의 엄마와 여행을 한다는 것은, 내가 엄마의 보호자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여전히 내가 보호자로서 나서는 것이 쉽지 않다.
내가 보호자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나의 보호자가 필요했던 이때의 나는 갱년기의 엄마와 여행을 할 준비가 덜 되어있었다.
이 여행은 시행착오였던 것이다.
보호자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지금의 나보다 고작 한 살 많은 나이에 나를 낳고 나의 보호자가 되어준 엄마 역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행착오를 나도 거치고 있다.
이 시행착오를 모두 거치고 나면, 오랜 시간 나의 보호자가 되어준 부모님의 좋은 보호자가 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