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에서 첫째 날
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원제목은 바로 ‘돈키호테 드 라만차’, 즉 라만차의 돈키호테다.
그리고 이 돈키호테를 뮤지컬 무대로 옮긴 것이 ‘맨 오브 라만차’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오버츄어, 그러니까 서곡은 듣고 있으면 붉은 평야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맨 오브 라만차의 극 중 배경은 스페인이다.
하지만 바르셀로나는 붉은 평야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궁금했다. 도대체 맨 오브 라만차의 서곡과 어울리는 도시는 어디일까?
나는 그 답을 찾기 위해 마드리드에 왔다.
오로지 나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방문하는 낯선 도시 마드리드.
마드리드에 대한 내 첫인상은 바로 황량함과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바르셀로나를 떠나는 날이 밝았다.
이번 여행에는 비행기 이동만 3번이 있는데, 그중 첫 번째 비행기를 타는 날이기도 하다.
오후 12시 비행기인데도 9시에는 나와야 한다니, 이래서 비행기 이동이 싫다.
이제는 눈에 다 익은 바르셀로나의 길을 구글맵도 안 보고 걸을 수 있는데, 바르셀로나를 떠나는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만 가득했다.
이번 비행기는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스페인 내에서 이동하는 비행기이기 때문에 따로 준비할 서류는 없었다.
무사히 체크인을 하고, 보안검색대도 지났다.
유럽의 저가항공사는 수화물 검사가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다.
나는 게이트 앞에서 기내에 가지고 탈 내 짐가방과 엄마와 동생의 캐리어의 크기를 눈대중으로 재보며 불안해했다.
티켓의 등급대로 나누어진 긴 줄을 서서 탑승을 시작했다.
걱정했던 우리의 짐은 승무원들의 관심 한번 받지 않고 무사히 통과했다.
엄마는 ‘너는 사서 불안해한다’며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불안한 걸 어떡하겠는가!
비행기에서 나만 홀로 떨어져 앉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내 옆에는 아무도 앉지 않아 편하고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4일 만에 누리는 혼자만의 시간!
우습게도 작은 해방감이 느껴졌다. 앞으로 남은 날들을 어쩌려고….
마드리드에 가까워질수록 붉은 평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찾고 싶었던 그 스페인의 모습이다!
기대가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는 기대고, 우리 앞에는 실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역과는 달리, 대부분의 공항들은 시내와 멀리 떨어져 있어 대중교통을 타고 시내로 이동해야 한다.
시내에 가기 위해서는 시외 기차, 지하철, 택시가 있는데 우리는 시외 기차를 타기로 했다.
이 선택은 지금 생각해도 후회스럽다.
마드리드 공항 터미널은 총 4개가 있는데, 터미널 4에서 기차를 탈 수 있다.
나는 우리가 터미널 4에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표지판대로 기차를 타는 곳을 찾아 열심히 돌아다녔다.
영어는 할 줄 모르지만, 우리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하던 아주머니 덕분에 드디어 어떤 교통수단의 플랫폼을 찾아냈다.
그런데 티켓박스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모양이었다.
안내데스크에 물어보니 이건 시외 기차가 아니라 지하철이라고 한다.
우리는 터미널 2에 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눈앞에 보이는 그 지하철을 타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기차에 꽂혀있었고, 누구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
시외 기차를 타기 위해 우리는 공항 순환버스를 타고 터미널 4로 향했다.
드디어 시내로 향하는 시외 기차를 탔다.
그런데 구글맵에는 기차를 중간에 한번 갈아타야 한다고 알려준다.
이게 맞게 가는 건가?
함께 탄 아저씨에게 구글맵을 보여주며 이 기차가 맞냐고 물어봤지만, 모른다는 답만 돌아왔다.
그렇게 불안과 함께 기차는 출발했다.
구글맵은 조회할 때마다 루트가 바뀌기 시작했다.
불신이 높아질 즈음, 맨 처음 갈아타라고 했던 역에서 기차가 정차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고, 우리도 일단 따라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얼핏 전광판을 보니 우리가 타야 하는 기차가 곧 도착한다고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뛰어!!
캐리어를 들고 정신없이 뛰어 무사히 기차에 탑승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기차는 역에서 한참을 정차해있었다. 이 역이 회차지였나 보다.
잔뜩 허무해하고 나서야 기차는 출발했다.
엄마는 캐리어를 들고뛰는 것이 무리였는지, 퉁퉁 부은 손가락을 주물렀다.
마드리드에서 공항과 시내를 오가는 택시는 정찰제다.
그러니까 갱년기의 엄마를 무리하지 않게 하려면 마드리드 공항에서 이동할 때는 택시를 타는 것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드디어 도착한 마드리드 시내에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바르셀로나에선 관광객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었다.
코로나 시기에 여행하는 장점이라고 생각했고, 앞으로 남은 도시들도 그럴 것이라고 감히 예상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에 없던 관광객들은 모두 마드리드에 모여있었던 것이다.
마드리드 숙소는 동생이 찾아보기로 했다.
동생이 자신만만해하며 앞장섰지만, 갈수록 번화가와 멀어진다.
반대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다시 내가 앞장서서 숙소를 찾아갔다.
엄마는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TV를 켰다.
알아듣지 못하는 스페인어 프로그램인데 뭐하러 켰냐고 물어보자, 엄마는 그래도 틀어놓는 게 좋다고 했다.
새로운 도시에 왔으니 짐을 빨리 정리하고 마트로 향했다.
분명 비행기 위에서 붉은 평야를 볼 때는 마드리드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컸었던 탓인지, 아니면 하늘이 우중충해서인지, 혹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인지 이상하게 마드리드에 정이 안 갔다.
테이블마다 투명 아크릴 가림막이 설치되어있던 바르셀로나와 다르게 마드리드의 오래된 식당들 안에 가림막도 없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것저것 장을 보고 있는데 엄마가 팔뚝만 한 무언가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엄마는 롤피자라고 했다.
포장지를 보니 페퍼로니 피자인 것 같다.
그리고 엄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생오렌지 주스를 샀다.
이번 숙소는 공용 주방을 써야 한다.
비록 가스레인지는 없었지만 올리브 오일도 있고, 전자레인지, 커피포트, 오븐, 다른 식기들이 있으니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오븐에 아까 산 롤피자를 구우면 되겠다 싶어 포장지를 부욱 뜯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피자라고 굳게 믿었던 그것은 포장지에 그려진 맛스러운 페퍼로니 피자가 아니었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허여멀건한 피자 반죽이었다.
이게 뭐야!
우리는 뒤집어지게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나니 먹을 것이 없었다.
남은 것은 냉동 빠에야였는데, 양이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그래서 결심했다.
바로 오늘, 한국인의 소울푸드 매운 불*볶음면을 먹자!
갑자기 매운 것을 먹으면 우리의 장이 무리하는 거 아닐까?
모르겠다. 일단 먹는 것이다.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불닭볶음면은 더 맵게 느껴졌다.
공용 주방 옆에는 포켓볼이 있었다.
포켓볼을 쳐본 적이 없다는 말에 나와 동생이 한수 가르쳐주겠다며 큐대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셋 다 비슷한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공만 맞추느라 도저히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
슬슬 질려가고 있을 즈음, 숙소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창밖을 내다보니 엄청난 인파의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피켓에 그려진 것을 보니 아무래도 코로나에 관한 시위인 것 같다.
2018-2019년에 매주 토요일 파리에서 과격하게 일어났던 노란조끼 시위가 떠올라 마드리드가 조금 무서워졌다.
방에서 쉬다가 따뜻하게 옷을 갈아입고 예약해둔 야간 산책 투어를 갔다.
그러다 문득 ‘투어를 신청한 사람이 우리밖에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설마.
마드리드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우리와 투어를 같이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겠어?
진짜로 우리밖에 없으면 어색하겠다며 동생과 키득거리는 사이 투어 미팅 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정말 우리밖에 없었고, 그렇게 프라이빗 투어처럼 투어가 시작되었다.
가이드에게 오늘 시위가 있었냐 물어보니, 그렇다며 사람도 많고 시위도 하니 조심하라고 했다.
마드리드가 더 무서워졌다.
투어를 하면서 스페인의 모든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인 ‘제로포인트’를 지났다.
가이드는 제로포인트를 밟으면 나중에 마드리드로 다시 돌아온다는 속설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제로포인트를 밟고 사진을 찍었지만, 내가 과연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오고 싶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번 가이드는 열정이 넘치는 분이었다.
하지만 카를로스 5세, 필레페 1세, 2세, 3세 등이 줄줄이 등장하는 역사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궁금한 것이 많은 학생이었던 엄마는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
반응이 없는 엄마를 대신해 나는 ‘아하!’, ‘오호!’, ‘야호!’를 외치며 나름대로 열심히 리액션을 했다.
그리고 동생은 사진을 찍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슬슬 투어가 언제 끝날 지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드디어 투어의 마지막 종착지인 알무데나 성당 앞에 도착했다.
성당 앞에는 광장과 달리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그제야 조금 숨통이 트인다고 생각했다.
투어는 마드리드 왕궁에는 지금도 스페인 왕이 산다는 내용으로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질문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두 가지를 물었다.
먼저 내일은 일요일인데, 일요일에는 상점 문을 다 닫냐고 물어봤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단다.
두 번째 질문을 했다.
일요일이라 문을 닫은 상점들이 많을 테니, 근교 도시에 가보려고 하는데 어디 추천해주실 곳 있나요?
대답은 ‘없다’였다.
3일 뒤에 방문할 도시 톨레도를 빼고는 개인적으로 대중교통을 타고 갈 만한 근교는 없다고 했다.
거기에 덧붙여 자신들의 투어사에서 진행하는 라만차의 배경지, ‘콘수에그라’ 투어를 신청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고 했다.
아, 네. 그러네요.
가이드가 떠나고 우리만이 성당 앞에 남았다. 역시 마드리드는 차가운 도시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머리가 어찌나 복잡하던지!
우리의 원래 계획은 내일 아까 가이드가 투어를 신청하지 않아 아쉬워했던, 라만차의 배경이자 마드리드의 근교 도시인 ‘콘수에그라’에 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가이드의 ‘추천하지 않는다’는 조언, 그리고 인터넷의 정보 부족으로 자신감이 떨어졌다.
만약 나 혼자라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가보겠는데, 엄마와 동생을 데리고 오늘 기차를 탈 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내일 정말 뭐하지? 정말 무엇을 하냔 말이냐!!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안 나오지 않는 마드리드의 차가운 첫째 날이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