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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정용하 Dec 24. 2023

연말 파티




『투잡 하고 책도 써요』

2편

연말 파티







강남엔 오랜만에 오는 거였다. 역시나 2호선 강남역 지하철을 빠져 나오고부터 수많은 인파가 수류를 형성했다. 사실 사람 규모만 보면 홍대와 다를 게 없는데도, 이상하게 나는 강남역의 그 인산인해를 유독 숨막혀 했다. 친구와 약속 장소를 잡을 때도 누가 봐도 강남이 중간 장소인데도 나는 그곳을 피해 잡았다. 그곳을 거닐면 왠지 이국땅 유흥가를 방황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오늘 나는 강남에 와야만 했다. 그곳에서 열린 연말 파티에 초대되었기 때문이다. 파티란 단어는 내게 아주 낯설다. 친구들과 조촐하게 송년회, 모임은 많이 해봤어도 '파티'란 간판을 내걸고 만난 적은 없다. 사실 연말 파티나 송년회나 의미적으로 다를 건 없다. 하지만 내게 연말 파티는 뭔가 '인싸'들만이 가는 곳, 낯선 이와 함께 어울리는 곳이란 인상이 강하다. 나는 지금껏 그런 곳을 가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운좋게도 얼마 전 지인을 통해 연말 파티에 초대되었다. 무려 40명의 남녀가 함께 어울리는 자리다. 마케팅이란 키워드로 묶인 많은 남녀가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초대받은 날부터 몹시 기대되었다. 그렇다 보니 강남역 11번 출구를 나온 대규모 인파에 섞여도 전혀 답답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심지어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려 바짓가랑이가 젖어 가는데도 짜증나지 않았다. 그저 기분 좋은 기대와 설렘이 오랜만에 나를 감쌌다.



그 파티가 의미 있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를 초대해준 사람이 이성이었던 것. 지인이라고 부르기에 애매한 오래 전 인연이었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고, 대화도 많이 주고받지 않은 사이인데 1년 반 만에 나를 기억하고 연락해 주었다. 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안 그래도 한 번 보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이번이 기회다 싶었다. 과연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연말 파티는 강남역 메가박스 근처 레스토랑 2층에서 열렸다. 넓은 레스토랑의 한쪽을 우리가 전부 사용했다. 20명씩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 두 줄이 나란히 붙어 있는 구조였다. 나는 오후 7시 정각에 맞춰 도착했는데 내가 일찍 도착한 편이었다. 계단을 올라 정해진 공간으로 가자 그 분을 포함한 두세 분이 나를 맞아주었다. 그 분은 나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올 블랙의 깔끔하고 딱 달라 붙는 의상을 입고 있었다. 그 분을 본 나의 첫 느낌은 '와, 멋지다'였다. 이렇게 왜소한 분이 어떻게 이런 큰 자리를 준비했는지 그저 대단했다. 그 분은 살짝 반가워하면서도 큰 반응 없이 나를 바로 테이블 중간쯤에 앉혀 주었다. 거기엔 먼저 온 세 분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 분들에게 최대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모두 여성 분이었다. 그런 성비의 자리를 가져본 게 얼마만인지 시작이 좋았다. 나는 앉자마자 대화를 주도하며 분위기를 풀어나갔다. 한 분은 마케팅 회사에 다녔고, 다른 한 분은 고양시에서 작은 공방을 운영했으며, 또 다른 한 분은 남편과 사업을 하고 있었다. 모두 각기 다른 직종의 사람이 모인 것이었다. 그들의 새로운 이야기에 큰 호기심이 일었다. 중요한 것은, 분야는 전부 다르지만 마케팅이란 하나의 키워드로 묶였다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두 명은 마케팅 업계 종사자였고, 다른 두 명은 마케팅을 필요로 하는 입장이었다. 우리 테이블은 자연스레 내가 어떻게 마케팅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그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물어보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런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았다.



물론, 솔로로서 그런 자리를 가면 기대하는 게 있다. 역시 낯선 곳에서의 운명 같은 사랑이다. 안 그래도 이제 별도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새로운 만남을 갖기 어려운 상황에서 연말 파티 같은 자리는 내게 소중한 기회다. 그래 봤자 잘 안 될 것 같은 부정의 믿음이 크게 자리 잡았지만 그래도 운명은 언제나 우연히 다가오는 것이니까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내가 마케팅 관련 종사자이지만 그 모임에서 인사이트를 얻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오로지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자리는 대략 2~30분에 한 번씩 바꿨다. 한창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조금 무르익어가나 싶으면 주체자인 그 분이 큰 목소리로 '자, 자리 바꿀게요'라고 외쳤다. 그러면 나는 내 접시와 포크, 잔을 들고 일어나 테이블에서 떨어져 멀뚱멀뚱 서 있었다. 자유롭게 자리를 바꾸는 방식이라서 내가 앉을 자리를 직접 찾아가야 했다. 또 어떤 자리에 앉아야 내가 즐길 수 있을지 짧은 시간 동안 모든 자리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하지만 내겐 전부 낯선 얼굴이라 쉽사리 판단이 서지 않았다. 결국 그냥 남는 자리에 앉아 그 테이블 사람과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파티는 그야말로 MBTI 'E' 성향이 아니면 정신을 못 차릴 분위기였다. 그때 느꼈다. 이런 방식이라면 한 사람과 유의미한 관계를 만드는 것은 어렵겠다고. 사실 원래 알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인연을 찾는 건 희박한 가능성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던 것인데 역시는 역시였다. 그래도 이런 기회를 찾지 않으면 적은 가능성이 아니라 아예 없는 가능성이 돼 버린다. 이성적 욕심은 못 채웠지만 다행히 나는 파티원들에게 힘을 얻었다. 저마다 자기만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도 더 의욕을 불태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책을 쓰게 된 것도 그 모임 사람들의 영향이었다. 나도 그들처럼 내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파티 내내 그 분과는 얘기 나눌 기회가 없었다. 워낙 전체를 관리하고 분위기를 주도해야 했다 보니 시간이 따로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 분은 내가 자리 분위기를 주도하고 밝은 모습을 보인 것이 좋게 보였는지, 지나가면서 내게 한마디를 건넸다.



"용하님과는 얘기를 거의 못 했네요. 따로 한번 봐야겠어요."



나도 그 분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상태여서 조만간 날을 잡자고 말했다. 하는 일부터 어떤 삶의 방향성을 갖고 있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뭘 하면서 지내는 사람인지 개인적인 질문을 하고 싶었다.



모임은 밤 12시 반 정도에 마무리됐다. 2차까지 모임이 이어져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술은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취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수십 명의 낯선 사람과 열띤 이야기를 하니 체력이 방전될 만도 했는데 나는 여전히 기운이 남아 있었다. 요즘 사람을 만나는 것에 한창 재미가 붙었다. 날마다 약속을 잡아도 지치지 않았다. 이런 시기가 드문 것을 알기에 조금 더 즐기고 싶었다. 사람을 자주 만나다 보면 인연을 만날 가능성도 올라가지 않을까. 여전히 이슬비가 내리는 강남의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기분 좋은 만족감을 느꼈다.



-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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