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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R Dec 18. 2020

3. 아주 정확하고 온전한 사랑

내가 자라면서 배운 것

어린 시절의 기억 중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아빠가 퇴근하던 장면이다. 저녁 무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현관 앞으로 달려갔다. 양복을 입은 아빠의 손에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잔뜩 들려있다. 책 때문에 아빠는 구두 뒤축을 밟으며 엉거주춤 신발을 벗는다. 심심했던 나는 신이 나서 책을 받아 든다.

뒤따라 나온 엄마는 잔소리를 한다. 당신이 너무 책을 많이 빌려오니까 애가 바깥에서 노는 것에 관심이 없다고. 그러니까 조금만 빌려오라고. 아빠는 그럴게 그럴게 하면서 집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빠를 바라본다. 정말 그럴 거야? 젊은 얼굴을 한 아빠는 코를 찡긋하며 웃는다. 나는 아이였지만 그 표정이 뭘 뜻하는지 정도는 안다. 말만 그렇게 하고 퇴근길에 계속 책을 빌려다 주겠단 뜻이다. 나는 다시 행복해진다.


주말에는 아빠가 퇴근길에 들르는 그 도서관에 같이 갔다. 도서관은 종로구 사직동에 있었다. 주말 낮의 열람실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나는 아무 책이나 마음대로 꺼내 볼 수 있는 도서관이 너무나 좋았다. 나무 의자와 나무 책상의 반질반질한 감촉. 누군가의 손길에 모서리가 닳아 부드러워진 책들과 그 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


그때 읽은 이야기들 중 딱 하나 기억나는 것은 <나니아 연대기>다. 그 이야기는 어린 나를 완전히 홀려 놓았다. 어느 날 옷장 문을 여니 두꺼운 옷더미 뒤로 신비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흰 눈으로 가득한, 낯설지만 아름다운 세계가. 사자와 반인반수가 말을 걸고 엄청나게 달콤한 맛이 난다는 터키 젤리와 소름 끼치도록 예쁜 여왕이 있는 곳. 터키 젤리는 대체 무슨 맛이지? 나도 처음 보는 세계로 가 신기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옷장이라면 우리 집에도 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은 후로 가끔 혼자 있을 땐 안방 옷장을 살며시 열어보곤 했다.


그렇게 온갖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아빠가 나를 데리러 왔다. 우리는 매점에 가 음료수를 마셨다. 자판기의 네모난 버튼을 누르면 중간 사이즈 종이컵에 얼음과 사이다가 나왔다. 평소 우리 집에서는 탄산음료가 금지되어 있었고, 도서관에서 사이다를 마시는 건 아빠와 나 사이의 작은 비밀이었다.

나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주말에만 마실 수 있는 금단의 음료를 마셨다. 높은 곳에 있는 창문으로 점심 무렵의 햇빛이 들어왔고 입 안에서는 달콤한 맛과 함께 기포가 부서지는 것이 느껴졌다. 사이다를 다 마시면 아빠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엔 갑자기 밤에 혼자 자는 것이 너무나 무서워졌다. 내 방엔 큰 창문이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 창 밖은 지나치게 어두운 것 같았고 이상한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쓰고 울 것 같은 기분으로 밤을 보냈다.

며칠쯤 지났을까 아빠가 라디오를 사 가지고 왔다. 처음으로 가져 본 내 라디오였다. 주파수를 맞추는 법을 알려준 후 자기 전에 라디오를 들어보라고 했다. 날이 저문 후 라디오를 켜 보았다. 그 날 이후부터 더 이상 혼자 잠드는 것이 무섭지 않았다.

 

물론 나의 어린 시절이 이런 아름다운 추억들로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다. 불확실한 일들이 많았고 자주 서글펐고 자꾸 악몽을 꿨다. 그 원인은 아빠로 인한 것들이었지만 동시에 아빠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의지로 나에게 준 것들은 모두 좋은 것들 뿐이었다. 그의 사랑은 매우 정확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흠이 없는 온전한 형태로 왔기 때문에 슬프고 앞날이 불확실한 순간에도 항상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보내는 토요일과 탄산의 맛에서, 밤의 라디오에서 나오던 노래와 나를 위해 빌려오는 책 속에서, 그리고 둘 만 아는 표정 속에서 나는 그 온전한 사랑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기억해가며 자랐다.


그 기억은 내가 소중한 사람에게 사랑을 전달하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나는 사랑에 있어 아주 솔직한 어른이 되었다. 그런 방식 때문에 때로는 관계에서 지거나 손해를 보기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재거나 따질 생각이 없다. 돌려받지 못할까 겁을 내거나 상처 받을까봐 숨거나 밀어내는 식으로 굴고 싶지도 않다. 그런 식으로 전달되는 사랑은 아무래도 조금 긴가민가해서 헷갈릴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주고 싶은 것은 헷갈리는 감정이 아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아주 정확하고 온전한 사랑이다.

내가 자라면서 배운 사랑의 모습이란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시간이 부족해진 이후로 사랑의 형태는 더욱 명확해졌다. 아빠는 헤어질 때마다 손을 흔드는 대신 꼭 껴안아 주었다. 누가 있든 없든 다 큰 딸을 우리 누구, 예쁜 누구, 귀여운 누구로 불렀다. 같은 병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 내가 들어가면 “예쁜 딸 왔어?”라고 인사할 정도였으니까. 나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아빠의 침대 맡으로 걸어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물론 아빠의 사랑이 오직 나에게만 향했던 것은 아니다.

엄마가 이 이야기를 볼 일은 절대 없을 거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우리 엄마는 요리를 못한다. 식탁에는 한 입 먹고 나면 이건 무슨 맛일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요리가 자주 올라왔다. 나는 맛없는 무언가를 입에 넣고 나면 아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빠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또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맛없다고 말하지 말자. 엄마가 어떠냐고 물으면 아빠는 항상 맛있네. 잘 먹을게 하고 밥그릇을 싹싹 비웠다.


지난 주말엔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밥 못 먹어서 어떻게 하니라고 하길래 몰래 웃었다. 엄마는 아직도 본인이 요리를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정확하고 온전한 사랑 또한 시간이 지나도 닳지 않고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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