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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샤쓰 그 신후 May 11. 2021

밀리터리 장르소설) 무토 - 인간, 병기

1부 - 챕터# 7. 이날 밤 무토는 꿈에서 한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2층짜리 불교 사원을 개조한 장교 숙소는 주둔지 내 가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무라가 직접 무토를 안내하며 창고였던 방문을 열어 보였다. 내부는 단순했다. 나무 침대에 얇은 매트리스, 녹이 슬고 찌그러진 사물함 하나, 의자 하나, 벽에 걸린 옷걸이가 전부였다. 무토는 이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연병장 방향으로 커다란 창이 뚫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창유리 같은 건 없었다. 대신 비가 들이치지 않게 검은색 천을 잘라 막아두었다.  

    "사내놈들 땀냄새 쩌는 천막보다는 훨씬 낫지?"  

    기무라가 물었다. 

    "만족합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가 그동안 이룬 전과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지. 어때 내 방에 가서 한 잔 더 할 텐가?" 

    "오늘은..." 

    기무라가 바로 알아채고 말을 잘랐다. 

    "너무 내 기분만 생각했군. 작전 때문에 제대로 된 휴식은 오랜만일 텐데..."

    "죄송합니다." 

    "아니다. 오늘 밤부터 작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너는 무조건 쉬기만 해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기무라가 가벼운 미소를 보이고는 나갔다. 방문이 닫히자 무토가 군복 상의를 벗었다. 빨아놓은 런닝 내의로 갈아 입고 창가로 가 섰다. 창에 박힌 검은 천을 말아 올리고는 어둠을 응시했다. 코코넛 발효주에 곯아떨어진 병영 안은 적막함만 떠다니고 있었다. 가끔 이름 모를 동물의 울음소리가 마치 악령의 불길한 주문처럼 들려오다가 끊기고를 반복했다. 갑자기 마른천둥 소리가 터졌다. 또 한바탕 폭우가 쏟아질 기세였다. 다시 창문 천을 고정하려는데 양쪽 귀 부근에 뻐근한 느낌이 올라왔다. 두통인 듯했다. 무토의 주량은 아주 센 편이어서 작정하고 마셔대면 지금껏 아무도 그를 대적하지 못할 정도였다. 위스키를 오랜만에, 그것도 급히 마셔서 생긴 가벼운 숙취라고 생각한 무토가 침대에 벌러덩 누었다. 두통은 조금 더 심해졌지만 잠이 드는 데에는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무토는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살육을 저지른 후면 무토는 며칠 동안은 악몽을 꾸었다. 

    악몽이라고는 하지만 무토에게 그리 무섭거나 고통스러운 꿈은 아니었다. 꿈의 내용은 무토가 죽인 적군의 얼굴들이 떠다니는 꿈이었다. 죽기 전의 마지막 눈동자, 쏟아지는 핏물, 절규 가득한 외침 같은 장면들이 연기처럼 나타났다가 다시 희미하게 사라지는 게 다였다. 꿈을 꾸는 중이나 깨고 나서도 무토의 기분은 항상 무덤덤했다. 너무 자주 꾼 탓인지, 원래 감정이 박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날 새벽만은 달랐다. 


    무토의 무기에 죽어간 미군들의 모습이 다 사라졌는데도 자욱한 연기는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무언가가 솜처럼 부풀어오르는가 싶더니 갑자기 새하얀 얼굴 하나가 희미한 윤곽을 드러냈다. 윤곽은 점점 진해지더니 눈, 코, 입이 그려졌다. 

    여자였다. 

    여자는 소리 없이 웃었다. 정면을 빤히 보는 눈에는 그 어떤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즐거운가? 뭔가 재밌다는 건가? 무토는 감정의 실체를 잘 몰랐지만 여자가 무언가에 기쁨을 느낀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잠시 뒤 요란한 풍악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도 듣지 못한 악기 소리였다. 병기는 군대에서 신호용으로 사용하는 나팔 소리밖에는 기억하지 못했다. 웅성거리는 소음과 함께 여자 주변에 사람들의 형체가 흐물거리며 흘러 다녔다. 하지만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진 않았다. 꿈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분명한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니면 전혀 기억에 없는 여자의 얼굴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여자는 누굴까? 왜 꿈에 나타났을까? 나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 

    

    수면 상태인데도 이상한 예감이 불쑥 솟았다. 눈을 뜨려고 해 봤지만 뜨이지가 않았다. 가위에 짓눌린 것처럼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기억하기에 한 번도 겪지 못한 경험이었다. 

    무토는 눈 뜨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여자를 응시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자의 얼굴이 갑자기 사라졌다. 무토는 그제야 천천히 눈을 떴다. 

    갑자기 희한한 의문 하나가 쑤욱 밀려들며 무토의 몸을 감싸는 듯했다. 

    

    나는 누구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런 의문이 든 건 생전 처음이었다. 적어도 무토가 기억하기로는. 

    무토는 검은 벽을 응시했다. 마치 꿈속의 여자가 거기에 있다는 듯이. 그리고...

    더 이상 잠이 들지 못했다. 



    정혜는 막 떠오르기 시작한 해의 테두리를 바라보며 거대한 배의 난관에 서 있었다. 일본 해군이 한 시간 후면 도착할 거라고 불어 댄 기상나팔 소리를 듣고 바로 달려 나온 터였다. 도착할 곳은 버마라는 나라에 있는 제일 큰 항구, 양곤이라 했다. 고향인 경기도 이천에서 부산으로, 시모노세키로,  그리고 버마 땅으로의 기나긴 여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오직 병기를 볼 수 있다는 열망 하나로 힘겹게 참고 견뎌온 두 달에 걸친 시간이었다. 


    일본군으로 징집된 병기의 소식을 처음으로 들은 건 중국에 있다는 전갈이었다. 그다음은 버마였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병기의 이름은 어느 순간부터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수시로 병기의 소식을 전하겠다고 약속했던 당시의 보급 장교는 사망자나 부상자 명단 그 어디에도 이름이 없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정혜는 절망스럽기만 했다. 버마라는 나라가 어디에 붙었는지도 몰랐고, 얼마나 먼 거리 인지도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 생사를 확인할 방법이 모조리 사라졌을 무렵 정혜는 귀가 뜨일 만한 제안을 받았다. 총독 지부에서 근로정신대 파견을 담당하는 한 일본 관료로부터였다. 관료는 간호부로 자원해서 버마에 가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버마 전선의 모든 일본군 부상병들이 후송되어 오는 야전 병원이 곳곳에 차려져 있고, 그곳을 돌며 간호부로 일한다면 정혼자의 소식을 금방 들을 수 있을 거라 했다. 정혼자가 있는 주둔지를 알면 찾아가 볼 방법도 있을 거라며 정혜를 강하게 부추겼다. 

    정혜는 고심을 나날을 이어갔다. 제아무리 병기가 보고 싶고 생사를 확인하고픈 열망이 강해도 여자 혼자 갈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거기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전쟁터였다. 솔직히 겁이 나기도 했다. 하나 일이 그리 진행되려고 했던 차인지 병석에서 홀로 고생하던 부친이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이 마을 저 마을의 남자들이 호시탐탐 정혜를 노리는 눈빛도 더 이상은 참기 어려워지던 상황이었다. 

    정혜는 매일을 절망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져보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정혜는 부산으로 가는 보급 열차에 몸을 맡겼다. 자신에게 남은 건 오직 병기만이 세상의 전부라는 신념을 지닌 채. 


    항구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혜는 확신했다. 


    병기는 살아 있어. 저 땅 어딘가에서 반드시 만나게 될 거야...


    정혜는 점점 또렷해지는 노란 햇살 속에 병기의 얼굴을 떠올렸다.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이 곧 현실의 빛처럼 빛나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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