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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샤쓰 그 신후 May 17. 2021

밀리터리 장르소설) 무토 - 인간, 병기

1부 - 챕터# 8. 정혜의 가슴속에 불길한 예감이 똬리를 틀었다.

    "정혜 언니!" 

    앳된 목소리가 매서운 바닷바람을 갈랐다. 은이는 얼굴에 머금은 정혜의 미소를 바로 알아차렸다. 

    "언니, 그리 좋나?" 

    "좋지." 

    "그 오빠야가 얼나마 좋아 죽길래 우찌 이 먼 전쟁터까지 올라고 했으꼬?" 

    "너만 하겠니? 어린 나이에 겁도 없이..."

    은이는 겨우 열셋이었고, 초경도 치르지 않은 그야말로 어린 소녀였다. 정혜와 은이가 버마행 배에 오를 결심을 하게 된 사연은 엇비슷했다. 정혜가 정혼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면 은이는 일 년 전에 먼저 버마로 떠난 친언니를 찾기 위해서였다. 은이의 고향은 경상도 마산으로 담임선생이 친언니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주소까지 알아봐 주었다고 했다. 은이는 언니가 공장에서 많은 돈을 벌었고 학교도 다니고 있다는 담임의 말에 배에 오를 결심을 했던 거였다. 집 안이 찢어지게 가난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언니와 함께 생활한다는 조건에 부모도 별 반대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정혜는 처음 은이와 얘기를 나눴을 때에는 약간의 의심이 들었었다. 언니가 있다 한들 버마는 전쟁터였고, 담임선생이 어린 소녀를 머나먼 전쟁터에 보냈다는 걸 쉬이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은이의 믿음은 확고했다. 

    "절대 그럴 일이 없다 아입니꺼. 우리 샘이 얼마나 순하고 헌신적인데예. 진짜 아입니더. 그리고예 나이가 어려도 열심히 일하면서 배우는 게 우리 조선을 위하는 거라고 배웠어예. 저는 마 백 번, 천 번 찬성하는 말입니더."" 

    정혜는 시모노세키 항구에서 이 어린 소녀와 만난 뒤로 한 달 반이 걸린 버마까지 줄곧 함께 지냈다. 홀로 자란 정혜로서는 어여쁜 여동생 같아서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기왕 온 거 언니캉 빨리 일 해서 돈 마이 들고 집에 갔으모 좋겠다."

    은이는 저 멀리 윤곽이 보이는 항구를 보며 들뜬 어조로 말했다. 이런 은이가 담임선생의 숨겨진 실체를 알아채는 데에는 불과 서너 날밖에 걸리지 않았다. 조선총독부가 여학생들을 동원하라는 지령을 내린 위안부 징모 업자라는 사실을. 


    정혜와 은이가 선실로 돌아오니 함께 방을 썼던 열여덟 명의 조선 여성들은 짐을 다 꾸린 채 하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이 국 만 리 수송선에 올라야 했던 사연은 대개가 거의 유사했다. 일자리와 숙식 제공이었다. 당시 조선은 여전히 농업에 매달리고 있었고, 농가 중 4분의 3 가량이 빈농 수준이었다. 고작 하루 한 끼를 멀건 보리가루 죽으로 때우는 농가가 수두룩했다. 때문에 군복 같은 보급품 제조 공장이나 일본군 식당에서 서너 달만 일해도 일 년치 수입을 받을 수 있다는 제안에 새파란 처녀들은 그저 기쁘게 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만 한 여자의 경우는 예외였다. 

    "배에서 내리면 우덜은 다 죽은 목숨이여. 왜놈들이 다 총을 쏴 죽일 거란 말이여!"

    무당이 저주를 퍼붓는 듯한 그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이름이 연자라는 이 여자는 항해 내내 울음을 터트리거나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어대다가도 지금처럼 반 미친 소리를 퍼부었다. 연자는 군산역에서 기차를 타려다가 일본 헌병이 강제로 납치해서 때리고 기절시켜서 다른 기차에 태웠다고 했다. 그게 그녀가 경험했던 두려움의 실체였다. 이 방의 여성들은 처음에는 연자의 사연에 반신반의하다가 이내 익숙한 듯 반 미친 소리로 치부해 버렸다. 오직 연자만이 참혹하게 닥쳐올 현실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각 소리와 함께 하선하라는 일본어 소리가 터졌다. 여자들은 일제히 선실 밖을 향했다. 은이를 데리고 마지막으로 나서던 정혜가 뒤를 돌아봤다. 

    "안 가! 못 간단 말이여! 안 간다고! 다시 조선으로 갈 거란 말이여!"

    연자가 부릅뜬 눈으로 정혜를 쳐다봤다. 정혜로선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은이가 옷자락을 끌었고 정혜는 그 힘에 끌려 조용히 선실을 나섰다. 

    배와 항구를 연결하는 하선용 철교 세 곳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정혜의 눈에는 족히 수백 병, 아니 천 명도 넘어 보였다. 시모노세키 항에서 정박 중일 때에는 이 정도의 여성이 탑승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나 많은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이번 한 번이 아닐 텐데...? 

    정혜의 머릿속에는 순간적으로 의문이 일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뒤에서 떠밀려 오는 인파에 그만 은이의 손을 놓치고 만 것이다. 서로 소리쳐보았지만 결국 은이의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정혜의 가슴에 진하게 휘몰아쳤다. 

    항구도 북새통이었다. 수십 대의 수송 트럭이 대기하고 있고, 하역한 보급물품을 옮기는 수십 명의 일꾼이 수시로 오가고 있었다. 일꾼 대부분은 버마 남자로 보였으나 간혹 저고리와 잠방이 차림의 조선 남자도 눈에 띄었다. 장교와 하사관, 사병들이 뒤섞인 일본군은 하선하는 여성들을 기계적으로 구분해서 수송 트럭에 태웠다. 대충 이름만 확인하고는 30명, 50명 이런 식으로 트럭 수송 칸에 꾸역꾸역 밀어 넣기만 할 뿐이었다. 

    정혜는 25명의 여성 무리 속에 끼였고 곧바로 해당 트럭으로 인도되었다. 저고리 차림에 새치가 하얗게 뒤덮인 40대 남자가 다가왔다. 수송을 맡은 조선인 군속이고, 안 씨라고 부르라고 했다. 정혜는 반가운 마음이 앞서 트럭에 오르기 전에 안 씨를 붙잡고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긍게, 미찌나 꺼정은 보급 기차를 타고 가설랑 트럭으로 갈아타고 더 갈겨. 겁나게 먼 디여. 근디, 말한다고 알기나 할겨?"

    "병원이 그렇게 멀어요?" 

    "뱅원? 아파도 참어. 여긴 도리가 없으부러..." 

    "그게 아니라 병원에서 일하기로 되어 있어요. 부상당한 군인들 후송해서 치료하는 병원이라고..."

    정혜는 자신도 모르게 말끝이 흐려졌다. 안 씨의 표정이 답답하고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이미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긍께... 맴을 단단히 묵어야 쓸껴. 워찌 됐건 살아야 산 거니께루..." 

    "병원이 없다는 거예요?"

    정혜가 다급히 재차 물었다. 그 순간 삑! 호각 소리가 나더니 하사관 한 명이 정혜를 향해 고함치며 눈을 부라렸다. 안 씨가 겁이 번진 표정으로 정혜를 어서 타라고 급히 밀어 올렸다. 정혜가 수송 칸 끝자락에     겨우 걸터앉았을 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트럭을 타고 때마침 지나치던 은이가 정혜를 발견하고 부른 것이다. 

    "우리 쌤 말이 맞았다 아이가! 울 언니 라시오란 데 있는 거 확인했다. 내도 그리 간다! 언니는 오데로 가나?"" 

    정혜의 머릿속은 온통 병원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은이의 담임 말이 맞았다면 정혜에게 병원을 소개한 일본 관료의 말도 맞을 것이다. 

    "그게... 그냥 멀대. 은이야, 돌아갈 때까지 항상 조심하고 잘 참아야 돼!"

    "언니도 병기 오빠야 꼭 만나라! 어데 병원에서 일하는지 꼭 알리 주고. 편지 쓸끼다!" 

    "그래! 돈 많이 벌어. 아프지 말고!"

    "언니도 꼭 행복해라! 진짜 고마웠데이, 담에 꼭 보자이!" 

    은이가  탄 트럭이 멀어졌다. 은이의 말과 웃음에 다소 안도감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속 시원한 기분까지는 들지 않았다. 

    근데 안 씨라는 저 사람의 반응은 뭘까? 병원이 있으면 있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때, 가까운 곳에서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트럭이 급히 멈췄다. 잠시 뒤 군인 두 명이 축 늘어진 여자 한 명을 들고 와서는 던지듯 실었다. 피떡이 되도록 얻어터진 연자였다. 그 얼굴을 보자 그녀의 저주 섞인 울음이 바로 되솟아났다. 여기에 안 씨의 시답잖은 반응과 은이의 새된 목소리가 겹쳐졌다. 그러자 곧바로 정혜의 가슴속에 불길한 예감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예감은 불과 이틀 만에 현실로 다가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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