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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샤쓰 그 신후 May 11. 2021

밀리터리 장르소설) 무토 - 인간, 병기

1부 - 챕터# 6. 기무라 수색대에 승리의 진군가가 울려 퍼졌다.

버마 카친주 쿠에몬 산악지대. 

일본 제15군 31사단 소속 203 수색대대. 




    하필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대대 주둔지까지 불과 600m를 남겨둔 지점부터였다. 마츠이 소대가 소속된 수색대대는 험악하기로 유명한 쿠몬범 산악지대의 하단부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때문에 좁고 구불거리는 진입로는 비만 오면 미끄러운 진창길로 변했다. 운전병이 약간만 비딱해도 경사면 수목 덤불로 떨어질 위험천만한 상황이 돼버리곤 했다. 

    무토와 소대원들이 남은 힘을 짜냈다. 트럭을 200m만 더 밀고 올라가면 그나마 평지가 이어져 소대원들이 다시 수송 칸에 오를 수 있었다. 무토는 거대한 수레를 끄는 물소처럼 트럭 앞 대가리와 연결한 밧줄을 끌었다. 소대원들은 트럭 뒤와 옆부분에 둘러 붙어 무토를 도왔다. 무토가 괴성을 토하며 온 근육의 힘을 집중하자 트럭은 겨우 평지로 올라섰다. 잠시 쉴 틈도 없이 무토가 밧줄 매듭을 풀었다. 운전병 옆자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마츠이를 지나 다시 내림 막길을 향했다. 트럭 한 대가 더 남아있었던 것이다. 무토가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의를 벗어 위생병 신조에게 던져주고는 남은 트럭에 밧줄을 묶었다. 그리고 이를 꽉 물고는 또 한 번 울퉁불퉁한 근육을 팽창시키기 시작했다. 


    정글 나무들을 베어내어 만든 연병장에는 이미 무전 연락을 받은 주둔 병력이 다 몰려나와 있었다. 1개 대대급이라고는 하지만 전체 병력은 200명 내외라서 통상적인 1개 대대 병력의 반 정도에 불과했다. 대신  최정예만을 선발해서 사단 직할대 같은 일종의 독립 대대로 운용하고 있었다. 아마도 무토라는 존재로 인해 그렇게 많은 병력이 필요가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주둔지 위치를 굳이 험준한 산맥 깊숙한 곳에 둔 이유 역시 무토를 연합군이 절대 찾아내지 못하게 한다는 의도일 터였다. 


    거친 엔진 소리와 함께 트럭이 들어서자 와! 하는 함성이 먼저 터졌다. 이번에는 미군의 어떤 보급품을 털어왔을지 궁금했던 병사들이 우르르 트럭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작전장교의 세찬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대대 사열 대형으로 헤쳐 모엿!"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대형을 갖추며 도열했다. 소리가 터진 방향에서는 지휘 장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맨 가운데서 앞장선 장교가 대대장 기무라 대좌였다. 40대 초반 나이에 검게 그을린 그의 얼굴에는 강인함과 호인의 느낌이 다 드러났고, 평균보다 약간 큰 키와 다부진 체격에는 야전 지휘관으로서 관록이 충분히 배어 있었다. 대학을 다니다 장교로 임관한 여타의 지휘관과는 풍기는 분위기부터 남달랐다. 그는 지휘소 책상 앞에 앉아 작전이나 설계하는 임무보다는 총탄이 빗발치는 전투 현장을 더 선호했다. 특히 수색대대에 대한 자부심과 명예가 유독 강했다. 소위 시절부터 줄곧 수색대대에서만 12년을 근무했고, 대좌로 진급해서 상급부대인 연대장 발령이 났을 때도 그는 수색대대에 남기를 고집했다. 군 지휘부 내에서는 그 이유가 무토 때문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무토가 있다는 건 도박판에서 늘 이기는 패를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지휘관이 무토를 마다할 것인가. 연대장으로 다른 연대로 떠나느니 무토와 함께 승리의 전과를 계속 따내기만 하면 거의 모든 무공훈장을 다 따낼 수 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기무라는 야전에 계속 남았고 무토와 함께 하기를 원했다. 전쟁이 끝나거나 그 자신이 죽을 때까지.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우기의 정글 하늘은 이미 비를 멈추었다. 

    트럭에서 내린 마츠이 중위와 소대원들이 작전 결과보고를 하기 위해 이미 도열해 있었다. 기무라 대좌가 앞에 서자 마츠이가 경례를 붙이고는 보고를 시작했다. 

    "두 명 전사, 부상자가 셋입니다. 전체 42명 중 37명 무사 귀환입니다. 적군은 지휘 장교 포함 미군 61명 전원 몰살입니다."

    "부상자는 야전병원으로 바로 후송하고 전사자는 장례를 치른 후 잘 묻어줘라. 고생이 많았다. 마츠이 중위." 

    기무라가 마츠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어 고개를 돌려 무토를 바라봤다.  

    "무토!" 

    무토가 차렷 자세를 위하자 기무라가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무토가 달려오자 기무라는 한 팔을 들어 어깨동무를 하며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전 병력을 향해 외쳤다. 

    "무토 조장이 이번에도 우리 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말을 신호로 작전장교가 보관함에서 깨끗한 욱일기를 꺼내 무토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모든 눈이 오직 무토를 향해 집중했다. 

    마츠이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무토의 승리가 아니라 마츠이 소대의 승리여야 했다. 게다가 무토의 실수로 자신은 부하까지 잃었다. 기무라 대좌가 제아무리 '군의 사기가 곧 승리이고, 승리가 무적을 만든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있다 해도 부하의 죽음에 대해서 당연히 애도부터 표해야 했다. 그럼에도 기무라는 이번에도 무토의 승리만을 외쳐대고 있었다. 한두 번이 아니라 매번 작전 때마다 반복되는 꼬락서니였다. 마츠이의 가슴속에는 마치 밥그릇을 뺏기고 버려진 개새끼 꼴 같다는 울분이 머리 끝까지 솟아났다. 

    기무라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오늘 밤은 승리의 축하주를 즐겨도 좋다! 그리고!" 

    기무라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앞으로 삼 일 후, 천황폐하께서 우리에게도 도라지 꽃(도라지 하나. 조선 여성 위안부를 뜻하는 일본 군대 속어. 위안부가 아니라 '강제 성노예 피해자'로 불려야 한다.)을 보내 주셨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병영 전체에 하늘을 찌르는 함성과 구호가 메아리쳤다. 

    "천황폐하 만세! 황군 만세! 천황폐하 만세! 황군 만세!"

    "이 모두가 다 무토 덕분이다. 무토는 우리 황군의 자랑스러운 영웅이다!" 

    기무라 외침이 끝나자 이번에는 병력 전체가 무토를 외치며 환호했다. 

    "무토! 무토! 무토!" 

    이어 '황군의 전과 빛난다'라는 군가가 울려 퍼졌다. 


    우리는 '무적 황군'이다. 

    무적 황군! 무적 황군! 무적 황군! 


    무토의 몸을 감싼 욱일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마츠이의  돌처럼 무거워진 입은 끝끝내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 대신 무토를 바라보는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 



    사병들이 취사 천막에서 코코넛 즙을 발효시켜 만든 버마 전통주 통을 부지런히 옮겼다. 이미 술에 취한 누군가는 일본 가요를 소리쳐 불렀고, 누군가는 훈도시 차림으로 전통 가무를 즐겼으며, 누군가는 대마초를 말아 피며 시시덕거렸다. 정글의 밤은 요란했고 비록 순간이나마 해방의 기쁨이 아우성쳤다. 

    기무라를 비롯한 장교들은 대나무를 엮어 만든 장교 식당에서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전파가 불안정한 일본제 라디오에선 일본 대중가요가 흐르다가 끊기고를 반복했다. 기무라가 잔이 빌 때마다 매번 장교들의 술잔을 일일이 채워주었다. 오늘 밤 회식은 마츠이가 미군에게서 털어온 럼주 세 병이 있었기에 좀 더 편하게 즐길 수 있었다. 장교들로서는 쿰쿰한 냄새를 풍기고 숙취로 머리 아픈 코코넛 발효주를 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꺼이 만족했다. 술잔을 털어 넣는 마츠이의 못마땅하다는 시선이 자꾸 무토를 향했다. 하사관급에서 장교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이는 무토가 유일했다. 그것도 기무라의 바로 옆자리에서. 

    무토는 마츠이의 시선을 피했고, 마츠이는 주기적으로 계속 무토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기무라가 장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단 본부에서 진급자 추천서를 보내왔다. 이번에는 무토 군조가 조장으로 진급할 거다." 

    놀란 무토의 눈이 마츠이로 향했다가 이내 시선을 거뒀다. 

    "아닙니다. 마츠이 소대장님이 세운 전술의 승리입니다. 전멸 전술은 황군 장교 중에  최고일 겁니다. 마땅히 마츠이 중위님이 대위로 진급하셔야 합니다." 

    마츠이는 괜찮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나 술잔을 든 손아귀에는 힘이 꽉 들어갔다. 

    "아, 물론 다음 추천은 마츠이가 될 것이다. 불만이 있나, 마츠이?" 

    기무라의 눈이 마츠이를 향하자 마츠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당연히 무토 군조가 받아야죠. 혼자 다 해치운 거와 다름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기무라가 무토의 어깨를 치며 다정하게 말했다. 

    "무토 군조는 오늘 밤부터 장교 숙소를 써라. 복도 끝에 안 쓰는 창고를 치워놨다." 

    "아닙니다. 저는 천막 생활이 더 편합니다." 

    "사병들이 싫어해." 

    "아, 그렇습니까... 단지 소대원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고 조용히 지내려고만 했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어차피 혼자 지내다시피 하는 거 기왕이면 서로 편한 게 좋잖나. 당번병이 네 짐도 다 옮겨 놨을 거다. 그리고 도라지 꽃이 오면 상등 군조 계급장이나 달고 말이야,  위안소 앞에 사병들과 같이 줄을 설 수는 없는 거 아니냐?" 

    "여자 가랑이가 기억나기나 하냐? 눈 벌겋게 뜨고 구멍 잘 찾아야 될 거다." 

    마츠이가 불쑥 끼어들고는 이죽거렸다. 장교 두어 명이 따라 웃으려다 기무라의 표정을 눈치채고는 바로 멈췄다. 한순간 기무라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입에 담지 말아야 할 게 있다는 걸 잊었나?" 

    "죄송합니다." 

    마츠이가 즉각 고개를 조아렸다. 

    기무라가 얼굴 표정을 풀고 당번병을 손짓으로 불렀다. 그러자 당번병이 검은 띠가 붙여진 조니워커 병을 가져다 내려놓았다. 장교들의 눈이 일제히 반짝였다. 기무라가 병을 들어 잠깐 보더니 입을 열었다. 

    "좋은 소식이 있다. 아니, 좋다기보다 이 술을 편하게 즐기라는 의미에서 알려줄 게 있다." 

    반짝이던 눈들이 이번에는 기대감에 바싹 타올랐다. 

    "당분간은 그 어떤 작전도 임무도 없다. 훈련도 각 병과별로 최소화한다." 

    장교들 사이에서 와우! 하는 환호가 옅게 일었다. 

    "그 술은 우리 대대가 가장 영광스러운 날을 맞이했을 때 축배 주로 쓰신다고 하셨는데..."

    마츠이였다. 

    기무라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우리 대대뿐 아니다. 버마의 대일본 방면군 전체가 대승을 거두러 갈 거라는 의미다." 

    "작전도 임무도 당분간은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버마 땅 안에서가 아니다. 한 달 후가 될지 석 달 후가 될 지도 아직 모르지만, 육군 대본영에서 비밀 작전을 수립 중이다."

    기무라가 조니워커 뚜껑을 따서 장교들의 잔을 채웠다. 뒷말을 기다리는 장교들의 표정에는 어느새 환호가 사라지고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작전은 바로... 진격이다. 버마에 주둔 중인 대일본 방면군 전 병력은 인도로 향할 것이다." 

    "지금처럼 방어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쳐들어가서 연합군을 깨부순다는 겁니까?" 

    "그렇다. 미국, 영국을 박살내고 인도를 대일본제국의 땅으로 만들 것이다." 

    마츠이가 가장 먼저 환호성을 내질렀다.  

    기무라가 잔을 들고 일어서자 전부 뒤따라 벌떡 일어섰다. 

    "우리 수색대가 대인도 진격작전에서 선봉에 설 것이다! 무토!" 

    "옙!"

    무토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황군의 대승을 부탁한다." 

    "영광입니다! 황군의 명예로 죽겠습니다!"

    "아니. 너는 죽어서는 안 되는 몸이다. 알겠나?"

    "옛! 끝까지 살아서 황군의 승리를 지키겠습니다!"

    기무라가 반자이를 외쳤다. 일제히 따라 외치며 술잔을 부딪히고는 들이켰다. 


    이때까지 아무도 예감하지 못했다. 무토가 기무라 대대의 선봉에 서는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무토와 기무라 사이에 갑작스레 끼어든 운명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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