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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fulness Jun 30. 2020

편견 없는 마음으로부터

[영화] 4: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영화] 4: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003)



  겨울 바다 앞에 선 환한 미소의 츠네오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의 조제는 애틋함을 자아낸다. 그들의 겨울 여행은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웠고, 잔인하리만큼 차가웠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영화의 제목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영화가 끝난 이후(혹은 이 글이 끝난 이후)에는 각각의 단어들이 향하고 있는 지점을 관객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츠네오의 내레이션, 그리고 겨울 여행의 사진들과 함께 영화는 시작된다. 


조제, 츠네오, 그리고 할머니의 첫 만남. ⓒ 영화 스틸컷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살아온 조제(쿠미코)와 바람기 다분한 대학생 츠네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담요 덮인 유모차에 실린 채 이른 새벽 할머니와 산책하는 것이 유일한 일상이었던 조제를 우연히 만나게 된 츠네오는 그 날 이후 조제의 집을 호기심 반 관심 반으로 꾸준히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뿐이었던 조제의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게 되고, 츠네오는 카나에를 떠나 조제의 곁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연인이 된다. 


  그 속에서 조제가 가진 삶의 반경을 처음으로 넓혀준 사람이 바로 츠네오였다.


조제의 모습을 처음으로 드러낸 채 산책을 즐기는 둘. ⓒ영화 스틸컷


  집 밖에 스스로를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조제에게 외부 세계는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였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으며 상상 속, 혹은 책 속에서만 그리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인임에도 아이 같은 행동을 보였던 조제의 묘사는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제와 츠네오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게 되는 순간에도, 좋아하는 남자친구가 생기면 꼭 보러 가고 싶었다는 동물원의 호랑이를 마주한 순간에도, 평생을 보고 싶어 했던 수족관 속의 물고기들을 못 보게 된 순간에도 모든 것이 조제에게는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는 것을 결심한 츠네오였지만,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했던 츠네오는 결국 조제와 겨울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수족관 앞에서 떼를 쓰는 조제를 보며, 츠네오는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다. 동생 다카시의 전화 속 한 마디 "형, 지쳤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츠네오는 조제에게 지쳐간다. 진심을 다 해 조제를 대하려 했던 처음의 모습은 잊혀진 채, 거동이 불편한 조제의 곁을 지키며 모든 것을 보살펴주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츠네오는 점점 마음의 여유를 잃어가고 있었다.


객실의 물고기들은 허상이더라도 조제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 영화 스틸컷 


  어쩌면 겨울 여행의 밤,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 오는, 정적만이 있는 어둠 속에서 살아왔던 나는 더 이상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며, '언젠가 츠네오가 사라지고 나면 자신은 길 잃은 바닷속에서 심해 속을 굴러다니는 조개껍데기가 될 것'이라는 조제의 대사를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겨울 여행이 지나고 몇 달 후 덤덤하고 담백한 모습으로 이별을 맞이한다. 



  영화 중 등장하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한 달 후, 일 년 후'를 통해, 쿠미코는 미래의 사랑을 그리고 있었다. 심해 속에서 한 번도 헤어 나온 적이 없었던 그녀가 외부 세상을 만나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책은 천천히, 그리고 넓은 폭으로 그녀의 세상을 넓혀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베르나르와 조제의 대화 속에서 미래의 연인과 자신의 모습을 자연스레 그려왔던 그녀였기 때문에, 언젠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순간이 찾아와 고독해지더라도 자신들에게 남은 세월을 소중히 하는 법을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두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초연하고 담백하게 이별을 맞이할 수 있었던 조제였다.



"언젠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겠지.
우리는 또다시 고독해지고
그래도 마찬가지일 거야
또다시 흘러가 버린 1년의 세월만 남아 있을 뿐"


"네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몇 살 때였을까? 열넷, 열다섯 무렵
그녀는 포플러 나무 아래 누워 두 다리를 얹고 바람에 흔들리는 수많은 잎사귀를 보았다.
바람은 높은 곳에서 날아갈 듯 가느다란 나무 꼭대기를 살짝 흔들어 인사하게 했다.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프랑수아즈 사강 '한 달 후, 일 년 후') 중에서


세상 앞에 홀로 서는 법을 배운 조제. ⓒ 영화 스틸컷



  결국 영화 속에 등장하는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은 모두 쿠미코가 그리던 대상들이었다. 사강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조제를 자신의 모습과 동일시하며 미래의 사랑을 그리던 모습, 남자 친구가 생기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인 호랑이를 보고 싶었다는 장면, 그리고 휴관 상태인 수족관 앞에서 아이 같은 모습으로 물고기를 보고 싶다며 떼를 쓰던 장면까지. 이들은 모두 자신의 세계 속에서만 존재하던 상상 속의 대상이자 장롱 속 쿠미코만의 서재 속에서 완성되었던 이상의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은 모두 갇혀 있다는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 소설 속 허구의 공간에 갇혀 있는 조제, 철창 속에 갇힌 채 한평생을 보내야 하는 호랑이, 마찬가지로 수족관에 갇혀 있는 물고기들까지, 일평생을 단칸방에 갇혀 사는 쿠미코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다. 소설을 읽는 동안 하얀 머리의 조제와 동화되는 모습, 할머니에 의해 장롱 속에서 평생을 갇혀 산다는 설정, 부엌에서 요리를 한 이후에 바닥을 향해 점프하는 쿠미코의 행동을 다이빙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통해,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은 곧 쿠미코 자신의 현실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제시해준다.


조제의 삶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일평생 너무나도 좁고 깊은 곳에 갇혀 있었다. ⓒ영화 스틸컷


  다시 말해, 이들은 모두 쿠미코의 이상이자 현실이었다.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남자 주인공이자 쿠미코의 연인 츠네오인 셈이다. 




  문득 할머니와 조제가 함께 살고 있는 공간을 보며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속 아이들이 생활하던 매직캐슬이 떠올랐다. 낡고 오래된 판자촌의 형상,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맑은 미소를 가진 아이들의 모습이 마치 매직 캐슬을 누비고 다니던 무니와 매우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인생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토록 불우한 삶을 살도록 설계되었음에도 굳건한 삶의 태도로 인생을 대처하는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비장미까지 말이다.



  손녀의 모습을 동네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할머니로 인해, 외부 사람들이 방문할 때면 하루 종일 장롱 속에 숨어서 지낼 정도로 조제에게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상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토록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그들의 삶을 보며 카나에는 견학을 위해 방문했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삶의 공간을 견학의 대상으로 소비하고 있음에도 자신의 말 한마디에 담긴 폭력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그녀의 태도, 그리고 별다른 반박 없이 이를 받아들이는 츠네오에게 화를 내는 조제의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말 한마디가 가진 무게와 책임감을 다시금 깨닫는다. 


  또한 영화 속에서 츠네오와 관계를 형성하는 3명의 여성, '노리코', '카나에', '조제'를 통해 츠네오와 조제의 사랑이 갖는 의미를 명확히 제시한다. 몸의 대화를 통한 피상적 관계를 상징하는 노리코, 현실적인 남녀의 관계를 보여주는 카나에, 그리고 편견 없는 사랑의 표상을 보여주는 조제. 서로 다른 3가지 유형의 관계를 그려내는 것을 통해, 감독은 관객에게 본능이 향하는 지점, 이성이 향하는 지점, 그리고 마음이 향하는 지점을 제시한다.


  츠네오가 조제에게 보였던 편견 없는 마음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자식이 불구가 되거나 장애를 가진 채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면, 나는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 그리고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하는 생각을 말이다. 우리 모두는 여느 타인들과 같은 보편적이고 당연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그 외에 다른 경우의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만일 내가 된다면 나는 어떤 삶을 택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 말이다. 하지만 이는 현재의 내가 재단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재단해서도 안 될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을 향한 고귀하고 숭고한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그저 그들을 존경하는 정도의 막연한 생각을 가질 뿐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조차 버거운 분들께 내가 가지는 섣부른 존경심조차도 실례가 되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말이다.


   그렇기에 츠네오가 보여준 조제를 향한 사랑은 끝이 났기에 더욱 아름답다. 불구의 몸을 가진 가족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할머니의 모습과 같이 '장애를 가진 연인과의 사랑을 평생 지속하는 츠네오'라는 결말을 맞이했다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그저 그런 평범한 영화 중 하나로 스쳐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그럴 수밖에 없었던' 헤어짐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조제와 츠네오의 사랑은 장애인과 일반인의 연애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 간의 일반적인 연애로 인식되게 만든다. 츠네오가 보여준 편견 없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한 사랑은 진실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만들었다. 진실된 사랑의 필요조건은 '상대에 대한 편견 없음'이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재력, 사회적 지위, 학벌, 외모 등으로 상대를 재단하는 것은 자신이 전하는 마음의 크기를 스스로 덜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 역시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순수한 마음만 남아있다면 모든 사랑은 가능하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으나, 어느 순간 상대에게 따라붙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재고 또 재는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사랑만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과연 이를 사랑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 역시 이는 사랑이 아니라 관계 맺음 정도의 표현으로밖에 정의 내리지 못하겠다. 츠네오와 조제의 사랑을 일반인과 장애인의 비극적 사랑 따위로 치부했던 필자의 경직된 사고를 반성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유연하게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견 없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살아온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 형성된 고유한 신념, 가치관, 사고방식이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마음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들은 사회의 물을 먹으면 먹을수록, 편견 없는 마음을 갖기 더욱더 힘들어질 것이리라. 초개인화의 첨단을 향해 나아가는 현대 사회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존재가 되었고, 보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손쉽게 배척하는 존재가 되었다.  


  사람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기준 혹은 잣대를 형성하는 것은 사유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당연한 행위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자신이 가진 기준이 그릇된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을 경계하며 살아가야 한다. 자신들이 가진 기준과 잣대를 상대에게 무기와 같은 방식으로 휘둘러서는 안 된다. 가장 위험하고 이기적인 감정이 연민, 그리고 동정심이다. 상대방을 대할 때 연민이나 동정심만큼 필히 거두어야 할 감정은 없다고 생각하며, 결코 쉽게 소비되어서는 안 될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아닌 나는 결코 상대의 감정을 헤아릴 수 없으며, 상대의 입장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도록 태어났기 때문이다. 연민이나 동정심을 갖는다는 것은 상대가 처한 상황이 부정적이거나 비참하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게 될 때 발현되는 마음의 상태이며, 이는 역설적으로 상대가 자신의 아래에 있음을 시인하는 행위이자, 힘든 상황을 보내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 섣부른 기만행위와도 같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저 사람은 왜 저럴까'라는 의문과 함께 자신의 편견을 상대에게 해답으로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저 사람의 행동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인식이 선행되고 난 이후 자신의 생각이 편견에 해당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질 것을 당부한다.



  편견 없는 마음으로부터 사고(思考)는 출발해야 하고, 관계는 형성되어야 하며, 사랑은 피어나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가진 잔잔한 울림을 타인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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