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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즈음의 고백

[Lyrics] 5: 이영훈 - 일종의 고백

by 민석

나의 해방일지에 이어서 이제 님의 커버로 다시 한 번 빠졌던 일종의 고백.


잔잔한 사랑 이야기를 하는 노래 중에 내 기준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애절함보다 섬세한 담담함을 담은 채, 진솔하게 다가오는 곡이라서 더 그런지 모른다.


이영훈 정규 2집 <내가 부른 그림 2> (2015)


사랑은 언제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또 마음은 말처럼
늘 쉽지 않았던 시절

나는 가끔씩 이를테면
계절 같은 것에 취해
나를 속이며
순간의 진심 같은 말로
사랑한다고 널 사랑한다고
나는 너를

또 어떤 날에는
누구라도 상관 없으니
나를 좀 안아줬으면
다 사라져 버릴 말이라도
사랑한다고 날 사랑한다고
서로 다른 마음은
어디로든 다시 흘러 갈 테니

마음은 말처럼
늘 쉽지 않았던 시절

이영훈 <일종의 고백>



ⓒ 비포 선라이즈 (1996)


살다보면 계절과 같이 분위기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무언가에 취해 자신을 속이는 시절이 온다. 봄에 시작하는 사랑은 설레고 가을에 시작하는 사랑은 처연하다며 의미를 부여하고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려 애쓴다.


이러한 특별함은 비단 계절뿐만 아니라 낯선 도시의 여행, 비 내리는 저녁, 새벽의 고요, 음악을 향유하는 감각처럼 수많은 배경들 곳곳에 숨어 있다. 이 사람이 나에게 특별하겠구나,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겠구나 하고 인식하는 지점은 대개 불명확하고 불확실하지만, 어느 순간 시작되어 있다.


우리가 특별함을 느끼는 지점은 대개 우연의 연속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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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인연에는 반드시 때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시절(時節): 어떤 일이 일어나기에 알맞은 ‘때’나 ‘시기’

인연(因緣): 원인(因)과 조건(緣)이 서로 맞아떨어져 하나의 결과가 생겨나는 것


사람과의 관계, 기회, 사건 등 모든 만남과 경험이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준비된 시기와 인연이 합쳐져야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해석이다. 지나간 인연에 연연하지 않고, 다가올 인연과 기회에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게 하는 철학적 자세로서, '때가 되어야 인연이 맺어지고, 때가 지나면 저절로 흩어진다'는 자연의 이치와도 깊게 연결된 덕목이자 삶의 지혜다.


아무리 애써도 만날 수 없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별 노력을 하지 않아도 만날 수밖에 없는 인연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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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 레터 (1995)


허나 나는 운명을 만드는 것도 인연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인연을 만들고 싶을 만큼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크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연의 장치를 만들어가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것마저도 인연이기에 가능한 것일테지만, 포기해버리면 인연이 되지 않을 뿐이다.


인연이라는 이름의 연결고리는 우연의 깊이만큼 깊고 강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진짜 만날 인연은 순간의 진심으로 머물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연결고리가 생겨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기면 된다.


그렇다면 순간의 진심인지, 오래갈 진심인지 확인하기 위해 가장 유효한 방법은 역시 거리두기다. 불나방 같은 한 순간의 무드에 취해서 그것을 자신의 진심으로 과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보고 깊이 보아야 그것이 진짜 나의 마음인지 알 수 있다. 거리두기의 힘을 아는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깊은 마음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특별함을 느끼는 지점에서 잠시 벗어나 내 마음과 상황을 찬찬히 곱씹어봐야 한다. 애초에 쉽게 이루어진 인연은 금방 식을테고, 오랜 기간 철저하게 직조된 인연은 그만큼 긴 세월 단단하게 쌓여서 쉬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속도와 호흡을 조절하는 것이 나쁠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그 사이에 인연이 되지 못 한다면 아쉽겠지만 그 뿐, 인연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인연으로 불현듯 내 삶 속에 들어올 수도 있다.


그러니 흔들리지 않고 상대를 위한 마음을 간직하자. 좋은 마음을 계속해서 되뇌이고 있다면, 다시 만났을 때 그만큼 큰 마음을 줄 수 있을테니 얼마나 낭만적인 일인가.



ⓒ 나의 해방일지 (2022)


사람은 항상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장한다.


이십대의 남녀를 보면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더 성숙하고 사회적 자아를 단단히 쌓아놓은 경우가 많다. 군생활 2년을 포함하여, 사람에게 받은 상처나 사람을 이해하려는 마음들로 쌓아올린 세월이 보통 여성들에게 먼저 쌓여서 그런 듯 하다.


연인을 만들 때 일반적으로 직전 연인의 결함을 채워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감정적인 사람을 만난 직후에는 차분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감정적 교감이 어려운 사람을 만나다 보면 감정에 충실할 수 있는 사람을 찾게 된다. 회피형 인간에게 지친 사람은 상황을 벗어나지 않고 올바른 애착을 가진 사람을 찾게 되고, 철저히 개인적인 연애를 마친 사람은 함께 하는 연애를 찾게 된다.


그래서, 서른 즈음 - 일반적으로 사회가 이야기하는 결혼의 적령기 - 에 도달하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명확해지는 동시에 쉽게 몰입하려고 한다. 이 사람은 성격과 가치관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에 더 만날 수 없어, 저 사람은 다 좋은데 외모가 아쉬워, 그 사람은 집도 있고 차도 있는데 너무 효자야. 그렇지만 일단 사랑을 말해보겠어. 그런데 왜 이렇게 공허하지? 나를 누구라도 사랑한다고 해줬으면 좋겠어. 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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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해방일지 (2022)


나는 일종의 고백이 서른 즈음의 고백이라고 이해했다.


계절같은 특별한 배경에 취해 나를 속이며 상대를 위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남은 것은 내 안의 공허함 뿐이므로 소멸되어 날아갈 말뿐인 말로라도 나에게 사랑을 말해달라는, 그런 쓸쓸한 고백.


상대를 위한 고백이 아닌, 나의 마음이 이토록 텅 비어버렸다는 평범하고 처연한 서른 즈음의 고백.


이들은 모두 마음보다 말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는 이해할 것 같다. 나의 해방일지 ost로 일종의 고백이 간택당했던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거다.



ⓒ 비포 선라이즈 (1996)


마지막 스물을 보내는 나의 유이한 취미생활은 음악과 글이다. (운동은 생존을 위한 것이니 빼두겠다)


이창섭 님은 서른을 낭만이 무르익어가는 시기라고 표현했다. 깊게 공감한다. 익을수록 고개 숙이는 벼처럼, 내가 스무살들을 보내면서 단순히 깨닫기만 했던 낭만의 흔적들을 나의 것으로 표출하는 시기로 나는 나의 서른을 만들어 가고 싶다.


자연스럽게 두 가지 목표가 생겼다. 내 곡을 써서 아카이빙하는 것, 그리고 내 책을 내는 것.


그리고, 언젠가 곡을 쓴다면 일종의 고백 같은 곡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감정에 가장 진솔하고, 기교 혹은 겉멋이 없는 가장 나다운 그런 가사와 멜로디가 담긴 곡. (나는 역시 화려한 연주 실력이나 좌중을 사로잡을 매력(?)을 뽐내는 불닭같은 사람은 될 수 없을테니, 그것은 나의 사랑하는 동생 준성이에게 일임해두겠다.)


언젠가 평생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생각들을 내 안에서 끄집어내어, 기록하고 또 기록해두겠다. 그리고 나의 사랑스러울 아들과 딸들에게 덤덤하게 그땐 그랬어, 하며 보여주고 싶다.


사랑의 힘으로 꼭 아이들을 지켜줘야지. 내가 부모님께 받은 것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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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레터 (1995)


그래, 사랑은 언제나 마음대로 되지 않고, 마음은 말처럼 쉽지 않다.


말이 먼저 나와도, 마음이 텅 비어있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것을 할래야 할 수가 없다. 말은 쉬워도 마음은 채우기 어렵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마음보다 말이 앞선 상황에서는 자책을 하게 될테지만, 말보다 마음이 앞서는 상황에서 보통 우리는 여유를 잃어버린다. 조바심과 불안 때문에 잘 될 일도 그르치거나 하는 그런 일들 말이다. 스무살을 지나오던 내가 그랬다. 나는 꽤 옛날부터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그것 때문에 표현의 문제로 꽤 많이 싸웠고, 아집으로 꽉 차있던 스물 언젠가의 나는 끝끝내 고집을 버리지 않곤 했다.


그 시절을 지나온 결과, 표현은 반드시 많이 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절대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 무게를 알아야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만큼 꺼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상대와 호흡을 맞출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어려운 지점이다. 마음의 크기를 맞추고 재단하다보면 어느새 한 쪽의 마음이 시들어가거나 그렇게 생각해서 스스로의 마음을 줄여버리기 때문이다.


마음을 주고 싶은 상황에서도 말이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말뿐인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더라도 마음이 공허한 상황도 참 많다. 전자는 우리의 어리숙함이 용납되는 청춘의 계절이라면, 후자는 서른 즈음의 무르익은 난춘의 계절이다. 마음을 채우는 것이 가능하려면, 한 사람만을 볼 수 있는 순수함을 회복해야 한다. 다만 그것이 서른들에게는 너무 어려워졌다. 낭만이 사라져간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 더 우연의 연속에 기대보려 한다. 인연이라면 만날 테니, 좋은 마음만 가지고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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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포 선라이즈 (1996)



사랑은 말이 스러진 자리에도 남는 마음이다.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하고, 나의 마음만큼만 말로 꺼낼 수 있는 진솔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서로의 마음이 닿는 곳에서 비로소 인연은 완성되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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