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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의 이름은 다정함

[Lyrics] 4: 신인류 - 날씨의 요정

by 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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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첫 날 밤에는 천둥과 번개가 거의 5초에 한 번 씩 내리쳤다. 찾아보니 홍콩은 전 세계에서 가장 뇌우가 심한 곳이라고 한다.


예상은 했지만 결국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기어이 쨍한 푸름을 내비치는 하늘을 보며, 한참을 멍하니 감상에 젖었다.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은 역시 없구나, 끝까지 가봐야 아는구나, 한 치 앞을 모르는구나, 하고 말이다.


날씨는 그만큼 인생과 닮아있다.



Screenshot 2025-08-15 at 15.19.41.JPG 신인류 ep.2 <희망서>


신인류의 '날씨의 요정'은 가사가 주는 진솔함이 좋아서 참 많이 들었던 노래다.


처음 노래를 들으면 숲과 초록빛의 심상이 떠오르고, 따뜻한 느낌을 받는다. '리틀 포레스트'나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심상들과 비슷하다.


이어 심상이 펼쳐준 초록길을 따라가다보면 숲 속 어딘가에서 몽상을 하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것이 Ichiko Aoba의 노래들과 같은 '짙은 안개'의 속성이 아니라, 숲이 나를 위해 안개를 걷어주는 느낌에 가깝다.


날씨의 요정은,

변덕스러운 우리네 마음을 날씨로 표현한 노래이자,


요란한 세상 속에서도

우리 둘만큼은 평범한 마음의 이야기를 하자는 사랑의 시다.


지나칠 수 없는 날이 있어요
너무 졸린 만큼 보고 싶은 밤을 세줘요
내 마음이 낯을 가려 맨살이 뜨거워졌던
그날 기억 모두 가져갈래요

내 표정은 너에게 잃었어
나는 나를 멈출 수 없고 너는 나를 멈출 수 있어
만남 없는 사랑도 어쩜 우린 다 했을지 몰라

우리 지금처럼 날씨 이야기를 해요
햇살 같은 그대가 가끔 와주면 좋겠어요
우리 지금처럼 날씨 이야기를 해요
비가 내려도 낯설지 않을 거예요

내가 기다린 만큼 손을 잡아요
비가 내린 만큼 보고 싶은 밤을 세줘요
내 마음이 녹아내려 맨살이 뜨거워졌던
그대 기억 모두 얘길 해줘요

내 표정은 너에게 물었어
나는 나를 멈출 수 없고 너는 나를 멈출 수 있어
만남 없는 이별도 어쩜 우린 다 했을지 몰라

우리 지금처럼 날씨 이야기를 해요
햇살 같은 그대가 계속 와주면 좋겠어요
우리 지금처럼 날씨 이야기를 해요
비가 오네요 다정한 여기 무지개로

있잖아 이토록 새로운 날들이
복잡한 날씨가 있대도 너랑 있으면
행복해 지금도 이렇게 좋은데
어딜 가게 놔두겠어 내 맘이 더 불어지면
내게 자주 찾아와줘요 이 빛으로

신인류 <날씨의 요정>


가사에 나오는 날씨마음으로 치환해서 읽어보면 명확해진다.




Screenshot 2025-08-15 at 15.30.41.JPG ⓒ 언어의 정원(2013)

날씨와 마음은 참 많이 닮아있다.


예측할 수 없고, 쉽게 변하고, 통제할 수 없으며, 상대적이다.


아침에 환하게 웃던 사람이 저녁에 아무 말 없이 돌아선다. 맑음에서 먹구름으로 변해버린 그 이의 마음, 연이어 축축한 비를 머금으며 일그러지는 나의 마음 - 우리는 그것을 자의로 통제할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도 나에게 커다란 잿빛 흐림을 선사한 마음이 타인에게는 맑음으로 다가간다.


구름 한 점 없는 마음들만 이어졌으면 좋겠지만, 참으로 유약한 우리네 마음에는 별의별 이유들로 먹구름이 드리운다. 하지만 흐린 날이 있어야 맑은 날의 고마움을 깨닫는 것처럼, 마음에 내리는 비도 때로는 무뎌진 감정을 적셔 새로이 피어나게 한다. 비를 한껏 머금고 있는 우리 마음의 먹구름은, 비를 뿌려야지만 맑은 하늘을 보여줄 수 있다.


날씨처럼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우리는 어째서 그토록 한결같은 마음을 바라고 또 바라는 걸까.


한결같은 마음을 주는 사람은 희소하기 때문에 그렇게도 누군가의 한결같은 마음을 원하는게 아닐까.


이는 인간의 생존 본능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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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샷 2025-08-15 152950.png ⓒ 날씨의 아이(2019)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가치는 꾸준함이라는 생각이다.


습관을 들이는 것이든, 사람과의 관계에서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마음이든, 꾸준하게 같은 방향으로 에너지를 전달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생존 본능에서 참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이는 인간의 뇌가 본능적으로 '새로움(novelty)'을 보상처럼 느끼도록 설계돼 있기 때문인데, 크게 진화적 이유와 심리적 이유로 분리된다.


① 진화적 이유


먼 옛날 생존 환경에서 새로운 열매, 새로운 물, 새로운 경로를 찾는 건 생존 확률을 높이는 행위였다. 그래서 뇌는 ‘새로운 자극 → 보상’ 구조를 만들어, 도파민을 분비하게 됐다고 한다. 즉, 새로움은 위험이 될 수도 있지만, 더 나은 자원을 발견할 기회였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매력을 느낀다.


② 심리적 이유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면 뇌는 점점 ‘예측 가능한 것’으로 분류하고, 거기에 대한 자극 반응이 줄어든다(쾌락의 적응). 그래서 아무리 좋은 습관이나 관계라도 시간이 지나면 감정적인 보상이 줄어드는 이유가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즉, 꾸준함은 즉각적인 도파민 보상이 약하고, 결과가 먼 미래에 나타난다. 그래서 꾸준함을 유지하려면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법’과 ‘작은 변주를 주어 지루함을 관리하는 법’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꾸준함은 본능과 싸우는 행위라서 어렵고, 새로움은 본능과 손잡는 행위라서 쉬운 것이다.


새로운 것을 탐닉하고, 변화를 원하도록 설계된 인간. 회복에 실패하거나 흐름이 끊기게 되어 이전의 것들을 이어가지 못 하는 상황에 접어들게 되면, 꾸준함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지는 길을 택하는 것이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니다.



Screenshot 2025-08-15 at 15.31.04.JPG ⓒ 언어의 정원

그러나 날씨와 마음이 다른 지점도 분명 있다.


날씨는 참으로 꾸준하게도 순환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맑음과 공존하는 조각 구름들, 연이어 드리우는 먹구름과 비, 세상을 덮어버리는 하얀 눈. 그리고 다시 드높고 푸르른 하늘. 기다리면 새로운 날씨가 오고, 또 다시 덮고, 그렇게 날씨는 순환한다.


우리 마음은 참으로 변덕스럽고 요망하다. 한 번 돌아서면 회복되지가 않는다. 각자의 방향으로 발산할 뿐이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라는 구절처럼 우리의 인생들을 각자의 방향으로 이끌어갈테니 불만은 없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 이야기를 자주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그 안에 있는 맑음을 따스히 여길 줄 알고, 그 안에 있는 먹구름들을 돌보는 사람이 되어주어야 한다. 혹여나 비가 오더라도 다정한 무지개를 드리워주는 마음이 되고 싶다.


서로의 햇살과 비를 이어주는 무지개의 이름을 나는 다정함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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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샷 2025-08-15 152815.png ⓒ 날씨의 아이(2019)


날씨와 마음이 다른 지점, 또 하나는 바로 확률이다.


일기예보는 무슨 수를 써도 100% 적중할 수 없다. 혹여나 예보가 빗나가면 하루를 망치고 계획에 없던 일들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기상청은 항상 확률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면 그 뿐, 마음을 마주한 사람이 확률에 따라 마음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아무리 계산하고 대비하더라도, 누군가의 사소한 말 한마디, 표정 하나 때문에 어긋나고 틀어지는게 사람의 마음이다.


우리의 인생에 필요한 것은 완벽한 예측이 아니라, 어떤 날씨든 받아들이는 자세다. 맑은 날, 흐린 날, 구름낀 날, 그리고 이따금씩 여우비도 좋고, 싸락눈도 좋다.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려 들거나 재단하기보다, 어떤 마음이든 다정함이라는 무지개로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안의 햇살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비춰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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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고 무해한 사람이 떠오르는 시대가 온다.


고자극과 도파민의 시대 속에서 우리 모두 집단적 방백에 느끼는 피로도가 점점 커져가는 탓이 아닐까.


타인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우리는 자신의 중심을 단단히 잡고 있는 사람에게 큰 울림을 갖게 된다. 본래 사람은 희소성을 가진 존재에 끌리도록 설계되어 있으니 말이다.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빛을 발하는 시대가 올테니, 나는 내 방식대로 무해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 정확하게는 유해한 세상 속에서 나의 가치를 혼탁하게 만들지 말자는 표현이 맞다.


올해 4월부터 다시 글을 쓰고, 음악을 큐레이션하고, 원래의 나를 찾으려고 습관을 들이고 있다.


사실 은행이라는 곳은 그야말로 낭만의 대척점에 서있는 조직이다. 돈, 효율, 수단, 이해타산으로 점철되어 있는 곳에서 문득 나를 잃어가고 있다는 두려움이 들더라. 근묵자흑이라고, 나도 모르게 서서히 물들어가는 현재와 미래가 명확히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어버리고, 표면에 집중하는 인간이 되어가고, 사소한 것에 분개하고, 인간관계에서 마저도 효율을 따지고. 참으로 낭만 없는 인간 A가 되어 파들파들 시들어가는 게 보였다.


낭만을 찾으려는 시도는 그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날씨의 요정도 나에게 특별했다.


사랑하자, 사랑을 하세요, 사랑해주세요 하며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구애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사랑이라며 덤덤한 문체로 자신의 옆을 지켜줄 것을 당부하는 순수함이 좋다. 그런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삶의 태도야말로 낭만이 아닐까, 하며 말이다.


둘만을 위한 날씨의 요정이 되어, 그저 그렇게 마음 이야기를 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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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자. 그렇다고 예정에 없는 날들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


이쁜 마음은 오롯이 가져가고, 힘든 마음들은 받아치기보다 너그럽게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하늘을 올려다 보는 여유를 잃지 말자. 그 하늘은 곧 우리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 위에 조용하게 무지개를 놓아주는 사람이 되자. 비와 햇살이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위한 다정함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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