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하게 해 주세요! "
"아니, 보여주고 싶은 게 뭐예요?"
"전문가니까 알아서 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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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끼리 공감할 수 있는 컨셉
나는 어떤 행위를 하기 전에 컨셉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무엇을 배우고 경험할 때도 그것에 임하는 컨셉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컨셉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목표를 설정해주기 때문이다. 목표가 명확하지 않다면 망망대해에서 난파선처럼 분명 표류하게 될게 뻔하기 때문이다. 디자인을 하다 보면 컨셉을 논하기 전 디자이너의 크리에티브를 발휘해 알아서 해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는 공동의 목표로 함께 나아가기 힘들다. 컨셉은 디자이너가 독점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아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모두가 고민하고 공감해야 한다. 물론 디자이너가 주도적으로 제안할 수 있지만, 디자인의 크리에티브는 디자이너 독점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디자인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기획자든 마케터든 클라이언트든 디자인을 요청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명확하게 프로젝트 배경을 공유해주어야 한다. 어떤 이유로 이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이 프로젝트에서 기대하는 효과 그리고 기획자나 마케터가 생각하는 이 프로젝트의 방향을 명확하게 설명해야 한다. 그렇게 상세 배경이 공유되었을 때 프로젝트 관련자들은 공동의 목표를 논할 수 있는 컨셉을 논쟁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알아서, 또는 크리에이티브하게 제안을 달라는 말은 좀 솔직하게 표현하면 '난 지금 아무 생각이 없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와라. 단, 네가 알아서 해와도 그것이 내 맘에 들지는 나도 모른다.'와 같다. 프로젝트에 대해 구체적 또는 명확한 배경이 없는 사람과 일하는 것은 굉장한 곤욕이다. 그 이유는 우리끼리의 공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감이 없는 프로젝트는 난파선처럼 표류하게 된다.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분명히 그것을 하는 이유와 목적이 존재한다. 이유와 목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본인이 그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거나 프로젝트를 진행하도록 승인한 결정권자의 잘못이 가장 크다.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는 분명 이유와 목적이 있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이다. 프로젝트는 이유와 목적이 명확할 때 보여주고 싶은 것도 명확해진다. 그렇지 않은 경우 '알아서 해주세요.'와 같은 말들이 나오게 된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겁이 난다. '전문가니까 알아서 잘해주세요.'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알아서 해주면 그대로 하는 경우도 없다. 보여주고 싶은 것이 명확하지 않은 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은 망망대해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표류선의 모습을 매우 닮았다. 이유와 목적이 명확하면 보여주고 싶은 것에 대해 토론하며 컨셉을 논하는 과정이 가능하다. 누군가 화두를 던지면 그것이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맞는지 아닌지에 대한 토론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 토론은 공동의 목표를 더 견고하게 각인시키고 발전시키는 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컨셉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꼭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보여주고 싶은 것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의 특징은 두 가지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 또 하나는 머릿속에는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공유할 정도로 정리가 안 된 사람.
앞에서 말했듯이 컨셉은 디자이너의 독점적인 부분이 아니다. 물론 디자이너가 역량을 발휘해 책임지고 끌어야 하는 부분도 존재한다. 컨셉이라는 것은 디자이너의 독점과 독단으로 밀어붙였을 때 항상 문제가 생긴다. 컨셉, 즉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서로의 공유와 공감이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공동의 목표가 더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컨셉 과정을 무시하고 디자이너가 알아서 해오기를 바란다면 그것의 결과는 둘 중 하나다. 맘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하지만 대부분은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공감과 공유 과정의 부재로 디자인 결과물을 봤을 때 공감하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컨셉의 과정은 단순히 디자인 아트웍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컨셉의 과정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구성원 간의 소통이며, 공유다. 그 과정을 같이 거처야만 최종 결과물에 대한 공감과 만족도 같이 느끼게 된다.
현대카드의 조직문화에 '논리적이고 합의된 실패에 대한 면책'이란 문화가 있다. 이 문화가 아직도 지속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실패를 발판 삼아 더 적극적으로 일하라는 의미라 생각한다.(단, 논리적인 실패에 한해.) 하지만 난 여기서 '합의된'이란 단어에 주목한다. '합의된'이란 말은 공감과 공유로도 해석할 수 있다. 컨셉의 과정을 거쳐 그것이 왜 우리끼리 공유와 공감이 되어야 하는지는 앞에 말한 현대카드의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컨셉이 공유와 공감으로 합의된 후 실패는 우리를 더 성숙하고 성찰하게 한다. 하지만 공유와 공감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것을 작업한 한 사람의 실책과 과실로 간주된다. 그 과정에 실패를 발판 삼아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기 어렵다. '전문가니까 알아서 해주세요.'와 같은 말은 프로젝트에 대한 굉장히 방관적인 태도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구성원 중에 방관자가 있는데, 프로젝트의 결과가 좋을 리 없다. 컨셉의 과정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우리끼리 공유과 공감을 위한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도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