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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서 Nov 09. 2019

6. 마음 헤아리기

by 조선영

독서모임을 하며 나에게 있었던 변화 중 하나는 내가 내 감정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의식하지 못한 두려움, 애물단지 취급했던 분노, 나를 지치게 했던 조급함 같은 감정들을 지그시 바라봐주자 감정 뒤에 꽁꽁 숨겨져 있던 나의 속 이야기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독서모임에서 만난 책들, 회원님들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 덕분에 감정에 솔직해지고 편안해지는 나를 만날 수 있었다. 

- 두려움 알아주기

 나는 겁이 많은 편이다. 밤이나 새벽에 밖을 걷는 것이 무섭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을 만나면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다. 직장에서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었을 때는 잘 해낼 자신이 없어서 밤에 잠들 수 없었다. 취미 생활도 생각만 많이 하고 오랜 시간 시작을 못 했다. 언젠가 밥솥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을 때는 폭발이라도 할까 봐 전원을 끄고 즉석밥으로 며칠을 때운 적도 있다. 물론 밥솥은 아주 멀쩡했다. 

 그런 내가 엄마가 되었을 때, 정말 무서웠다. 육아는 미지의 세계이고, 아이는 너무 작고 연약한 존재 같았다. 산후조리원에서 영아산통에 대한 교육을 받았을 때는 정말이지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영아산통은 신생아가 겪는 배앓이로 별다른 치료법이 없다. 아이가 몇 시간씩 울어도 부모는 그저 아이를 꼭 안고 견뎌야 한다. 배앓이를 하지 않는 아이를 곁에 두고서 매일 불안해했다. 배앓이 방지 분유, 배앓이 방지 젖병을 주문해서 사용했다. 불안한 마음이 커지는 날이면 배앓이 방지법, 영아산통 후기 등을 찾아 밤새 읽었다.

 육아에는 연습이 없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아이가 칭얼거리기만 해도 조마조마하고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 보려고 육아서를 열심히 읽었다. 육아서에는 유익한 정보가 무척 많았고, 아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답답했다. 아이 발달을 위해 엄마가 해야 할 일들을 읽을 때면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위축되었다. 대학생 때부터 자주 읽었던 심리 관련 책들도 마음을 어지럽혔다.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이나 양육 태도로 인해 상처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내 행동과 선택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자 아이를 기르는 일이 조심스럽고 무겁게만 느껴졌다.

 마음이 늘 분주하고, 가쁘게 숨을 쉬며 꾸역꾸역 하루를 버티는 생활이 두려움 때문인 것을 모르고 지냈다. ‘두려움’이라는 단어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육아는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니까, 나는 원래 체력이 약하고 겁이 많으니까 힘든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몸도 마음도 지쳐 너덜너덜해졌을 때, 독서모임의 첫 책 아니타 무르자니의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를 만났다. 아니타는 암에 걸려 죽음에 이르렀고, 임사 상태에서 삶과 존재에 대한 통찰을 얻어 다시 살아났다. 세상에 돌아와 암이 치유되고 자신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눈을 갖게 된 그녀는 자신의 삶에 두려움이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은 왜 내가 암에 걸린 것 같으냐는 것이다. 그 대답은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바로 ‘두려움’이라는. 무엇이 두려웠던가? 그저 모든 것이 다 두려웠다. 실패할까 봐, 누가 날 싫어할까 봐, 사람들을 실망시킬까 봐, 착한 사람이 못 될까 봐. 또 병도 두려웠다. 그중에서도 특히 암이 두려웠고, 암 치료법도 두려웠다. 사는 것도 무서웠고, 죽는 것도 무서웠다.”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반가웠다. ‘아, 내가 두려웠구나.’ 하며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두려움이 보였다. 나는 엄마로서 실패할까 봐, 아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줄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책을 다시 읽었을 때 공감하며 밑줄 친 문장들 대부분이 두려움에 대한 것임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지.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의 독서모임을 갖기 전 리더님이 공유해준 ‘당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조용히 자신을 들여다보세요.’라는 질문은 두려움이 내 삶의 어디까지 닿아있는지 깨닫게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어떤 일이 내 삶에 일어나는 것, 죽음 같은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미움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늘 인간관계가 어려웠다.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 사소한 일들도 시작하지 못했다, 혹시 실수로 인해 폐가 될까 직장생활도 고단했다.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일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몸과 마음이 소진되곤 했다. 두려움의 실체를 파악하면서 그토록 일상을 힘들게 느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았다. 아니타처럼 그저 모든 것이 다 두려웠던 것 같은데, 실제 내 삶은 어땠는지. 돌이켜보니 엄청난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났다 하더라도 지금의 나를 보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구나 싶다.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일들도 결국 해낼 때가 많았다. 막상 시작해보니 별거 아닌 일들도 꽤 되었다. 아이가 아파 힘들었던 때도 있었지만 그 시간도 지나갔다. 피곤했지만 죽을 만큼의 고통은 아니었다. 이런 사실을 자주 확인했다. 마음은 점점 편안해지고, 불안한 마음에 허둥지둥하던 행동들도 꽤 차분해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의 아니타가 다시 삶으로 돌아와 살아가는 방식은 내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자신의 진실대로 사는 것, 본디 제 모습인 사랑이 되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말한다. 두려움 없는 삶을 위해 그녀는 미지의 것을 받아들이고, 불확실성을 신뢰한다고 했다. 순간에 사는 법을 익히고, 실수로 보이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결과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 일상 속에 아니타의 생각들이 스며드는 것이 좋다. 우리 집 거실 벽에 붙여진 포스트잇에 두려움을 다독여줄 속삭임들이 잔뜩 쓰여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삶 속에서 두려움을 마주할 때가 있다. 남편이 해외에서 1년 동안 근무를 하게 되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나와 17개월 아이는 이곳에 남기로 했다. 어린이집도 다니지 않는 아이를 혼자서 돌봐야 한다. 역시, 두렵다. 그래도 이제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우선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 지금 내가 두렵구나. 무서워할 만도 하네.’ 하고. 그런 다음 나에게 속삭인다. 나는 두려움보다 큰 존재라고. 불확실한 앞으로의 1년을 믿어보자고.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해낼 수 있다고. 지나고 보면 ‘감당 못 할 정도는 아니었어.’라고 말할 수 있을 거라고. 결과는 신경 쓰지 말고 지금 순간에 머물며 즐겁게 살아가자고.


-분노 달래주기 

언젠가 친한 언니가 물었다. 

“너는 왜 화를 안 내?”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내가 화내면, 그 사람이 나한테 미안해지잖아.”

 나는 화가 싫었다. 갈등 상황을 피했다. 누가 화내는 것이 두렵고, 내가 화를 내는 것도 싫었다. 그런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 불편했다. 화가 나면 목구멍이 꽉 막힌 것 같고, 머리끝까지 뜨거워지면서 심장이 두근거린다. 몸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원망으로 꽉 찬 머릿속도 괴로웠다. 나는 화가 나도 절대로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애초에 화가 존재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렇지는 않아서 화가 생생하게 느껴질 때마다 쩔쩔매곤 했다.


 아이를 낳고 남편에게 폭발하듯 분노를 쏟아낸 적이 있다. 출산 후 남편의 술자리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힘드니까 도와달라고 얘기했다. 다음에는 울면서 술자리를 좀 줄여달라고 애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술자리가 반복되자 나는 분노하기 시작했다. 술 취한 남편이 잠을 자다가 실수로 아이를 깨웠을 때, 새벽에 우는 아이를 아기띠로 안아 들다가 돌연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공갈 젖꼭지를 남편 얼굴 위에 집어던졌다. 

 “내가 애 키우면서 미친년 널 뛰듯 살고 있는데, 네가 사람이니? 같이 술 마시자고 하는 인간들은 제정신들이야?”

 거친 목소리에 놀란 아이는 더 앙앙 울었다. 한바탕 화를 쏟아내고 나자, 뒤늦게 아이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만취한 남편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데, 쓸데없이 아이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생각하자 처음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의 큰 분노가 치솟았다. 오열하면서 욕설을 마구 쏟아부었다. 다음날 남편은 문자로 진심을 담아 미안하다고 했다. 평소 같았으면 괜찮다고 답하고 끝날 일이었다. 나 역시 잘못했다며 사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화가 가라앉지를 않았다. 또 문자에다가 욕설을 잔뜩 써서 보냈다.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은 말했다. 

 “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망쳐놓은 것 같아서, 정말 너무나 미안하고 괴로워.”

 어쩌다 내가 이 지경까지 왔을까.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화를 내고 나면 나도 너무 아픈데, 처치 곤란한 화를 어째야 할지 모른 채 다시는 화내지 않으리라 어리석은 결심만 반복했다.


독서모임을 하면서 ‘내 생각’들이 분노하는 마음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들이 있었다. 회원님 중에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했다. 

 “규칙이 많은 사람이 화가 많다고 하잖아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이 시원해지면서 긴 숨이 터져 나왔다. 나에게는 반드시, 꼭, 무조건이 들어간 사고방식이 많았다. 나는 절대로 화를 내지 않고,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어떤 일이든 능숙하게 해내야 한다고 믿었다. 엄마로서 아무리 지치고 피곤해도 최선을 다해 이유식을 만들고, 아이의 발달단계에 맞춰 놀아주고,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아이에게 무조건 집중하면서 반응해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역할에 대해서도 중요한 일이 없으면 꼭 일찍 귀가해야 하고, 육아를 함께 하면서 아이는 절대로 울리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것을 척척 알아서 해주기를 원했다. 

 ‘많이 피곤한데 오늘 꼭 집을 깨끗하게 치워야 하나?’ 하고 내게 물으면 ‘그건 아니야.’라는 답이 따라왔다. ‘밤이 늦었는데 설거지를 지금 당장 해야 할까?’ 하면 ‘내일 아침에 해도 되는 일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규칙들을 살펴보고 하나씩 버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남편이 늦어도, 아이가 울어도, 이유식을 못 만들었어도, 집이 난장판이 되어도 괜찮아졌다. 마음이 느긋해지면서 자연스럽게 화나는 일이 줄어들었다. 


 독서모임에서 시작한 감사 나눔은 분노하고 원망하던 나를 반성하게 했다. 고이케 히로시의 <우주님이 가르쳐준 운이 풀리는 말버릇>이라는 책을 함께 읽기로 했을 때, 작가님이 감사 나눔을 제안했다. 한 달 동안 독서모임 인터넷 카페에 자신이 생각하는 감사한 일을 글로 써서 올리는 것인데, 형식, 참여 여부 모두 자유롭게 하면 되었다. 

 감사 나눔을 시작하고 회원님들의 감사 나눔 글을 읽으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뜬 기분이었다. 회원님들은 아침에 마시는 시원한 물 한잔, 사계절의 아름다움, 두려움을 흘려보내게 된 일, 맛있는 한 끼 등에 감사하다고 했다. 회원님들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감사를 읽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나를, 남편을,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지? 

 나는 남편이 미웠다. 힘든 나를 몰라준다고 생각했다. 혼자 하는 육아가 억울했다. 내 시간이 없어진 것 같아 울적했다.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감사할 이유를 찾자, 평소 당연하게 여기던 일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이 곁에 있다는 것, 세 식구가 건강한 것, 아이의 미소, 책을 읽을 수 있는 것, 따뜻한 차 한잔, 육아로 인해 오히려 시간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것 등등. 내 삶에는 화내야 할 이유보다 감사할 이유가 훨씬 많았다. 일상에서 감사할 것들을 찾는 것은 귀중한 경험이었다. 

 어느 날 남편에게 말했다. 

 “곁에서 건강하게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내가 화낼 때마다 먼저 손 내밀어주고 사과해줘서 고마워. 나와 아이를 위해 회사에서 애쓰는 것 알아. 힘든 시간도 많을 텐데 생색내지 않고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늘 내 편이 되어줘서 고마워. 독서모임에 나갈 수 있게 지지해줘서 고마워.”

그러자 남편의 눈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나도 고마워. 함께 있어서 행복해. 늘 부족한 나를 이해해줘서 미안하고 감사해.”


 심리학에는 ‘내면 아이’라는 말이 있다. 내면 아이는 성인이 된 지금에도 어린 날의 상처를 해결하지 못한 채 마음속에 머물며 나도 모르는 새 내 말과 행동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미워하고, 원망하고, 화낼 때의 나는 꼭 어린아이 같다. 내면 아이가 되어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냐며 소리친다. 이런 아이에게 세상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고, 꾹꾹 참으라고만 했다. 그랬으니, 불덩이 같은 화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것이 당연했다. 이제는 그 아이를 달래준다. 눈을 감고 조용히 물어본다.

 “내가 그토록 화가 난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생각들이 나를 속상하게 했을까?”

 떠오르는 고정관념들이 있으면 다시 낯설게 바라본다. 감사할 이유도 찾아본다. 그러면 누그러지면서 괜찮아진다. 혹 계속 고민해봐도 부당하거나, 모욕적이라고 여겨질 때면 꾹 참거나, 성급하게 비난하거나, 감정에 휩싸여 소리치지 않고 담담하게 마음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이제는 화가 불편하지 않다. 화가 나는 곳에 있는 낡은 생각을 알아채고 새롭게 바꾸면 되니까, 화를 보듬고 안아주고 같은 편이 되어주면 되니까.


- 조급함 내려놓기 

 나는 독박 육아 중이다. 시댁과 친정은 멀다. 남편은 야근과 회식이 잦아서 대부분 아이가 잠들 때 귀가한다. 아침에 눈 떠서 다시 잠들 때까지 혼자 아이를 돌본다. 나만의 시간은 아이가 잠을 자는 시간뿐, 그마저도 밀린 집안일을 하거나 아이 먹을 것을 만들거나 하면 훌쩍 지나가고 없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이 없는 것이 숨 막혔다. 미혼이나 아직 출산하지 않은 친구들의 삶이 부러웠다. 심지어 출근하는 남편도 부러웠다. 혼자서 화장실에 가고 핸드폰도 할 수 있고 밥이라도 맘 편하게 먹을 수 있으니까. 

 내 맘대로 펑펑 쓰던 시간을 다시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씻고 싶을 때 씻고, 먹고 싶을 때 맘껏 먹고, 자고 싶을 때 누워서 빈둥거리고, 드라마도 실컷 보고, 아프면 병원에도 가고 그럴 수 있는 자유가 그리웠다. 

 아이를 키우는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을 때 울적했다. 매일의 일상에 젖어서 아이와 놀아주고, 아이 밥과 간식을 걱정하고, 집을 정리하고, 빨래를 널고, 필요한 물건은 없는지 살피면서 이 일들이 대체 언제쯤이면 끝이 날까, 내가 다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하는 걸까 막연했다. 화장실에 갈 때도 울면서 쫓아오고 설거지를 할 때도 내 발에 매달려 있는 아이를 보면서 자유로워지기까지 한참 먼 것 같을 때, 조급해졌다. 이 시간을 견디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한동안 육아 선배들을 만나면 물었다.

 “언제쯤 살만해져요? 언제쯤이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요?”

그러면 선배들은 말했다.

“금방 큰다, 아이 크는 거 금방이야.”

 하지만 그 말들도 크게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다. 아마 독서모임을 시작하기 전이라, 나를 위한 말들에도 열려있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 내 심정은 이랬다. 

 ‘지금 나는 정신없이 바쁘면서도 하루가 너무 길고 시간이 안 가는 것 같은데, 아이가 자는 시간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는데, 언제 금방 큰다는 걸까? 휴.’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빨리 되찾고 싶은 마음, 당장 원하는 대로 생활이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내려놓게 된 것은 마이클 싱어의 「될 일은 된다」 덕분이다. 마이클 싱어가 40년간 어떻게 삶에 자신을 내맡겼는지, 내맡기는 삶 속에서 펼쳐지는 일들이 얼마나 놀라운지 지켜보았다. 특히 ‘나중에 나는 삶의 모든 경험에는 배울 게 있고 모든 것은 성장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었다.’라는 문장은 나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그는 삶의 흐름을 존중하고 자신의 자유의지로써 그 속에 뛰어드는 삶이, 세상만사가 자신 뜻대로 굴러가야만 한다고 믿는 것보다 훨씬 평화롭고 조화롭다고 말했다. 확실히 나는 내 삶과 시간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통제하고 싶어 했다. 둘에서 셋이 되었으니 삶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것이 싫다며 저항했다. 아이 낳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무수히 생각했다. 

 「될 일은 된다」를 읽고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생활방식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면서 모자란 시간에 대해 툴툴거리는 대신 그 속에서 내가 찾을 수 있는 기쁨과 삶이 주려는 메시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나를 들여다보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의 소중함을 잊은 채 항상 그랬듯 온종일 TV 리모컨만 돌리면서 내 시간을 하수구에 버리듯 살았을 것이다. 먹고, 자고, 출근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구경 다니고 했던 과거의 일상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시간이 내게 주는 의미를 깨달으면서 조급한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를 키우는 일이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독서모임의 육아 선배님들 이야기는 언제나 반짝이는 희망이 되어주었다. 똑같이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공감, 지금이 가장 힘들 때고 점점 좋아질 것이라는 위로, 이제 아이가 없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마음을 다독였다.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인생을 멀리 봐, 그러면 좀 좋아질 거야.”라는 조언을 해주셨다는 회원님의 일화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그래, 내가 당장 눈앞에 있는 시간에만 매달렸구나, 내 앞에 놓인 긴 시간을 내가 보지 못하고 있었구나.’ 

이 시간 또한 분명히 지나갈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깨우치지 못했다. 먼 인생길에서 돌아봤을 때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간으로 지금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지나갈 이 시간, 소소하지만 행복한 순간들로 채워나가자고 결심했다.


 하루라도 빨리 힘든 육아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는 떠올린다. 삶이 나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 아이의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사실, 훗날 이 시간을 더없이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게 되리라는 믿음을. 그렇게 숨을 고르며 늘 내 곁에 꼭 붙어있는 사랑스러운 엄마 껌딱지와의 하루를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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