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똑서 Nov 09. 2019

7. 가장 원했던 것, 치유

by 조선영

 독서모임을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고 싶어서였다. 독서모임에 참여하기 전에 어떻게든 괴로운 마음을 고치고 싶어서 심리나 자존감에 관련된 책들을 골라서 읽었다. 위로를 얻은 것도 잠시, 이상하게도 내 마음과 삶이 근본적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순간 나아지는 것처럼 보여도 반복해서 같은 문제로 힘들어하고 지쳐갔다. 감정이 널뛰고 내 삶을 저주하며 침몰할 것 같았을 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밤, 책장에서 심리 관련 책을 꺼내 들다가 불현듯, 책 속에 담긴 치유의 힘을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좋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독서모임을 찾자마자 ‘나를 깨우는 독서모임’ 회원 모집 글을 보았다. 인생에서 두 번 다시없을 추진력으로 독서모임에 가입했다. 그 운명적인 만남을 잊을 수 없다.


- 엄마를 이해하기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종종 홀로 어딘가에 머물다 집에 돌아오곤 했다. 외가댁으로 추측해 보지만 이 문제에 대해 엄마와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어 확실치 않다. 대문 앞에서, 옥상에서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부르며 울었던 기억이 있다.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 큰고모네 집에 놀러 갔을 때였다. 큰고모가 말했다.

“네가 여섯 살이었을 때, 너희 엄마가 집을 자꾸 나가니까 걱정이 돼서 너한테 전화를 자주 했지. 그때마다 ‘선영아, 엄마 어디 갔어?’ 물으면 ‘시장에’라고 답하던 네 목소리를 듣고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마음이 짠해서.”

 나는 엄마를 오랜 시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억력이 좋은 편인 나는 그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지만,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기에 그때의 일을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 그냥 묻어두고 지냈다. 하지만 한 번씩 묻고 싶었다. ‘엄마,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하고. 


 그 시절 엄마가 나에게 왜 그랬는지 묻고 싶은 마음에 답을 준 것은 마이클 커닝햄의 <디아워스>다. <디아워스>에는 세 여자가 나온다. 서로 다른 시대적 배경을 살아가는 세 여자의 하루를 그린 이 소설에서 나는 로라 브라운의 하루에 매료되었다. 

 1950년대 미국 중산층 가정의 전형적인 아내의 모습을 한 로라 브라운. 그녀는 그 시대 여성에게 주어진 아내와 엄마의 삶을 선택했지만 불행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깨끗한 집에서 단아한 임산부의 모습으로 네 살 아들 리처드를 돌보고, 남편 댄을 위한 생일 케이크를 완벽하게 굽기 위해 애쓰던 로라 브라운은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에 충동적으로 일탈을 한다. 일탈이라고 해봐야 옆집에 리처드를 잠깐 맡기고 혼자 호텔에 가서 책을 읽다 오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녀는 호텔에서 자살하려고 했으나 그 선택을 하지 않기로 한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결심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집을 나가자고. 그리고 그렇게 했다. 


 처음에 <디아워스>를 읽을 때는 내 하루와 로라 브라운의 하루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단란한 가정이지만, 예민한 눈으로 엄마의 감정을 읽어내며 온종일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돌보면서, 턱없이 부족한 자기만의 시간을 갈구하면서, 이것은 내가 원했던 삶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그녀의 삶에 내 삶을 겹쳐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순간, 살아내기 위해 일탈을 했던 로라 브라운의 모습에서 엄마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아빠는 도박에 빠져 가정을 위태롭게 했다. 엄마 혼자 가정을 지켜내려 아무리 애를 써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삶이 견딜 수 없을 때마다 엄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탈을 감행했던 것 같다. 엄마의 일탈을 떠올리며 엄마가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안간힘을 썼구나. 엄마, 아내로 사는 삶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그때 엄마가 잠깐이라도 탈출하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숨도 쉬지 못했겠구나, 생각했다. 


 훗날 아들 리처드의 장례식에 노부인인 로라 브라운이 나타났을 때,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는 아프게 남겨진 나의 상처를 따듯하게 안아주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요. 누구라도 그 이상은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렇구나, 그것이 엄마의 최선이었구나.’ 깨달음으로 마음이 떨려왔다. 그동안 나는 엄마가 엄마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엄마가 되어서 어떻게 아이에게 그런 아픔을 줄 수가 있나 원망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엄마라면 참아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제는 그러한 나의 믿음들이 그 시절의 엄마에게 너무 잔인한 기대였음을 알게 되었다. 엄마라는 존재는 마치 한계가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어왔던 것만 같아 부끄럽다. 엄마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던 것은 믿고 의지해야 할 남편이 가정을 파탄 내고 있고, 키워내야 하는 어린아이가 둘이나 되고, 생활은 어렵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는, 미칠 것 같은 그 시간을 살아내기 위한 엄마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디아워스> 독서모임에서 한 회원님이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질문했다. 

“아들 리처드가 엄마 때문에 평생 불행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로라 브라운은 집을 나와 행복했을까요?”

리더님은 답했다.

“제 생각에 로라 브라운이 집을 나가지 않았다면, 결국 자살했을 것 같아요. 행복하기 위해 떠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떠난 것은 아닐까요?”

 리처드의 마음을 누구보다 깊게 공감할 수 있는 나는 생각했다. 로라 브라운의 선택으로 리처드가 영향을 받은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하지만 그로 인해 진정한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물을 수 있을 것이고, 행복을 위한 길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찾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디 아워스>를 읽기 전의 내가 네 살배기 리처드의 시선에서 엄마를 보았다면 이제는 한 여성으로서 로라 브라운을 보듯 엄마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엄마가 안쓰럽다. 그 시절의 엄마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과거로 날아가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였던 엄마, 자신의 한계를 시험당하던 그 작은 여성을 만난다면 꼭 안아주며 말하고 싶다. 엄마는 최선을 다했다고. 누구라도 그 이상은 할 수 없었을 거라고.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다짐한다. 나는 행복한 엄마가 되자고. 내가 행복해야 우리 아이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


- 남편을 용서하기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영화로만 알고 있었다. 영화를 재밌게 본 터라 원작이 있다는 소식이 무척 반가웠다. 주인공 리즈는 자신의 삶이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고 진정한 자신과 삶을 찾기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1년 동안의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그녀는 몇 달 동안 미친 여자처럼 행동하며 절망에 허덕인다. 어느 날 밤 그녀는 욕실 바닥에서 울며 기도를 한다. 신에게 제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달라고 간청하며 흐느낀다. 그러다가 어느새 울음을 뚝 그친 그녀는 고요함 속에서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순간 놀랐다. 내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서모임을 시작하기 한참 전, 출산 후 2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술을 마시느라 새벽까지 귀가하지 않는 남편을 한참 동안 기다리다가, 나도 똑같이 리즈처럼 욕조에 들어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었다. 자는 아이가 깰까 봐 숨죽여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틀어막고, 두 손을 꽉 낀 채로.

“저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죽을 것 같아요.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그러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한 기운이 커다란 손 모양이 되어 내 어깨를 감싸며 토닥이는 것이 느껴졌고, 내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가야, 괜찮아. 그동안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다 아는데, 남은 날들까지 네가 힘들게는 하지 않아. 이대로 너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남편과 나는 언제나 단 하나의 문제로 큰 위기를 겪었다. 술 문제. 남편은 술을 마시면 언제나 폭음을 했다. 늘 만취한 몸으로 새벽 늦게 쓰러질 듯 집으로 돌아오고, 차 속에서 잠들어 아침에 귀가하는 날도 있었다. 물건을 잃어버리고, 가게나 길에서 토하기도 했으며, 다음날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거나 회사에 결근하는 등 술을 마시면 생활에 지장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필름이 끊긴다고 하는 블랙아웃도 있었고 음주 운전으로 고생한 경험도 있다.

 평소 남편이 술을 좋아한다고는 생각했지만 특별한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이를 낳으면 변하지 않을까 했던 막연한 희망으로 술 문제를 덮어두었다. 하지만 출산 후 남편의 폭음 습관은 순식간에 우리 가정을 흔들기 시작했다. 정신과 전문의는 남편을 알코올 중독이라고 진단했고, 반드시 치료를 시작해야 하며 과정이 길고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부부 상담이 도움이 될 것이라며 권했다. 하지만 남편은 치료를 시작하지 않았고, 그런 남편을 지켜보면서 눈앞이 캄캄했다. 태어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아이를 돌보며 앞으로의 삶이 막막했다. 


 리즈가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다독이는 것을 보면서, 종교도 없는 내가 기도하며 겪었던 그 날의 일을 떠올렸다. 이상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기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나의 기도. 나와는 모든 것이 달라 보이는 지구 반대편의 미국 여자와 내가 절망 속에서 자신을 건져내기 위해 같은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동질감을 느끼고 위안을 받았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대해 독서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내면의 목소리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기 시작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곤혹스러운 마음으로 눈물을 닦는데 이런 이야기가 들렸다. 

“아이가 신생아 시기일 때 정말 힘들잖아요. 선영님이 가장 힘들 때 남편분이 곁에서 힘이 되어주지 않은 일이 상처로 남았나 봐요.”

 이미 시간이 꽤 흐르기도 했고 바쁜 일상에 치어 그때의 일을 잊고 살았다. 하지만 회원님의 말을 듣고 곰곰이 들여다보니, 나는 남편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라면 힘들어하는 남편과 아이를 두고 절대로 하지 못할 선택을 하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에게 남편은 비정하고, 자기만 알고, 무책임한, 나와 아이보다 술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겨져 있었다. 그 마음을 확인하면서, 의심의 눈초리로 남편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남편을 미워하고 싶지 않아. 마음의 지옥으로 떨어져서는 안 돼.’


 남편을 용서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처 난 마음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뾰족한 수가 없이 지내던 어느 날 아주 해괴한 방식으로 그 상처는 치유되었다. 리즈가 명상하며 내면의 평화를 찾는 것이 인상 깊었던 나는 어렵게 느껴져 포기했던 명상을 다시 시작했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명상을 해오던 어느 날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등장하는 주술사 끄뜻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나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영화 속에 나오던 이가 다 빠진 새까만 얼굴의 할아버지는 책이나 영화에서 읊었던 명대사들을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심각한 얼굴 하면 좋은 에너지가 도망가. 명상하기 위해서는 미소만 지으면 돼. 얼굴에 미소, 마음에도 미소. 그러면 좋은 에너지가 와서 나쁜 에너지를 깨끗이 씻어 낼 거야. 심지어 간도 미소를 지어야 해.”

“머리로 세상을 보지 말고 마음으로 봐야 해. 그러면 신을 알게 될 거야.”


 며칠 동안 명상을 하면서 끄뜻 할아버지를 만나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할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해보자는 마음이 들어 물었다. 

“끄듯 할아버지, 남편을 용서하기 위해 제가 알아야 할 것들을 알려주세요.”

그러자 끄뜻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용서는 사랑이야. 남편을 사랑해줘.”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 사랑. 남편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해주는 것. 그거면 되는구나. 남편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를 대해주자고 생각했다. 눈을 감고 남편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남편은 겉보기에 사교적이고 호탕해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이 여리고 갈등을 몹시 두려워한다. 상사에게 수없이 깨지며 인격적 모욕을 들으면서도 내색하지 못하고 술자리에서 마음을 달래는 사람, 엄청난 업무량으로 늘 피곤하면서도 육아를 함께 하려 애쓰던 사람, 언제나 나에게 고맙다고 고생만 시킨다며 미안해하던 사람. 직장에서 치이고, 가정에서 차가운 시선을 받아도 묵묵히 견뎌낸 사람. 눈을 감고 떠올린 나의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미안했다.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남편을 몰아세웠다. 남편의 본모습을 보려 하지 않고 내 기준에서 이상적인 남편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했다. 남편은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나보다도 두려움이 많고, 지쳐있고,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한 명의 사람일 뿐이었다. 완벽한 아내, 남편, 부모가 존재할 수 없듯이, 남편에게도 완벽함을 바라면 안 되는 거였다. 

 나만의 기준으로 남편을 판단해왔음을 반성했다. 내가 남편을 용서한다는 말도 맞지 않는 이야기 같다. 세상이 말하는 자상한 남편, 꿈에 그려왔던 상상 속 남편을 떠나보내며 내 옆에 실제로 살아 있는 이 남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한다. 조금 부족해 보이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보다 큰 따뜻함과 나를 위한 사랑과 매력을 지닌 그를 사랑하려고 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와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단 한 명의 남자는 다름 아닌 내 곁에 있는 이 남자라는 사실을. 친정 아빠도, 시아버님도, 세상 어떤 남자도 남편보다 우리를 사랑할 수 없음을.


 독서모임을 하기 전의 나라면 내가 한 경험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혹은 헛소리를 한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서모임을 하면서 나는 상처를 치유하는데 꼭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정신의학적 치료 과정을 겪거나 심리 상담을 통하지 않아도 책과 독서모임에서의 대화와 혹은 설명하기 어려운 어떠한 일들을 겪으며 상처가 치유되기도 한다는 것, 상처를 딛고 자유로워지는 길은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코올 중독자에서 나와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남자로 남편을 새롭게 바라보자, 신기하게도 남편의 폭음 습관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남편의 폭음은 이제 시간이 꽤 지난 과거의 일이 되었다. 곁에 있는 남편에게 말한다. 

“독서모임이 사람 여럿 살렸어. 그렇지?” 


- 상처를 사랑하기 

 나는 유머러스하고 다정하지만, 경제적 능력이 마이너스인 아빠, 생활력 강하고 자식을 위해 헌신했지만, 불같이 화를 내고 매질을 많이 했던 엄마 사이에서 자랐다. 내가 9살이었을 때 엄마와 아빠는 이혼했다. 그 결정으로 어린 나와 내 동생은 엄마 밑에서 자라게 되었고, 방학 기간에만 아빠를 만나곤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선택한 이혼이고, 양육비를 제대로 보내지 않은 아빠와 홀로 힘겹게 가장의 역할을 해야만 했던 엄마의 자녀였기에 나는 오랜 시간을 외가, 친가 할 것 없이 자주 친척 집을 전전하며 도움을 받아야 했다. 아무리 내가 잘하려고 노력해도 내 존재 자체가 민폐인 상황에 놓였을 때는 괴로웠다. 그 누구도 원치 않는 존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천덕꾸러기가 된 느낌이었다. 

 이혼 가정의 자녀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른들은 나에게 부모의 이혼을 쉬쉬하라고 했고, 이혼한 부모 사이에서 자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마주했던 사람들의 폭력적인 시선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누구보다 착실해야 했고, 모범생이 되려고 노력했다. 이혼 가정의 자녀이기 때문에 성적이 나쁘다거나, 행실에 문제가 있다는 등의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혹 내가 부모님 속을 썩인다면 고아원으로 버려지게 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문제는 심리적인 독립이었다. 성인이 되었어도 부모님의 생각, 말씀, 행동과 내 삶을 분리하지 못했다. 나를 위해 희생하며 살았던 엄마에게 감사하면서도, 격분하여 나를 때리던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만나면 누구보다 애틋하게 나를 바라보면서 양육을 위한 본인의 소임을 다하지 않고 무책임한 행동을 반복하는 아빠를 용서할 수 없었다.


 심리 관련 서적들을 파고들었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아는 선에서만 찾을 수 있는 책들이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부모님을 향한 분노만 터져 나올 뿐, 치유를 위한 길로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방식에서 어김없이 상처들이 묻어 나올 때마다 간절하게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나의 마음이 통한 것인지 나는 ‘나를 깨우는 독서모임’의 1기 회원이 되었다. 독서모임에서 만난 책들은 새로웠다. 마음을 열리게 하고 상처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선물해주었다. 조 비테일과 이하레아카라 휴 렌 박사의 <호오포노포노의 비밀>은 치유를 위한 힘이 나의 내면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휴 렌 박사는 지금의 삶이 온전히 본인의 책임임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과거의 얼룩진 기억이 끊임없이 재생되어 괴로운 것이기에 이를 정화하기 위해 신성에 호소해야 한다고도 했다. 처음에는 삶이 온전히 나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내 의지와는 별개로 태어나 힘든 환경 속에서 성장해야만 했는데 어떻게 모두 내 책임이란 말인가? 하지만 휴 렌 박사는 말했다.

“누군가와 분쟁이 생겼다면 그건 그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기억이 활동하는 거죠. 우리가 상대하는 건 그 기억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기억과 싸우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이 아니죠.

 저는 남편이나 아내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습니다. 한 번은 어떤 여자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뉴욕으로 떠날까 해요. 그곳에서 더 좋은 기회를 잡고 싶어요.’ 그때 신성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녀가 어딜 가든 기억은 그녀를 따라갈 거야!’”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하지만 그 기억을 현재로 끌어내 계속 붙들고 놓아주지 않고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은 정말 온전한 나의 책임이었다. 특정한 기억만 반복적으로 재생하는 내 상태를 살펴봐야 했다. 어린 나를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크리스마스날 깜짝 선물로 인형을 선물해주었던 엄마, 어린 내가 입원했을 때 곁에서 엉엉 울던 엄마의 모습, 밀린 방학 숙제를 열심히 같이 해주던 아빠, 집 앞 초등학교에서 아빠와 매일 뛰놀았던 일들, 어느 여름날 저녁 식사 후 네 식구가 함께 달을 보며 ‘달, 달 무슨 달’ 노래를 불렀던 기억. 내 어린 시절은 불행하고 우울했던 일들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상처 바로 곁에 행복했던 순간들도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독서모임을 시작하고 시간이 꽤 흐른 뒤에도 눈물이 멈추지 않던 밤이 있었다. 눈물 콧물로 정신을 차릴 수 없던 나는 명상을 시작했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자 끄뜻 할아버지가 보였다. 그를 보며 말했다. 

“할아버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너무 슬퍼요. 가슴속에 눈물이 꽉 찼어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할아버지는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 시절에 그 사람들이 모두 슬펐을 뿐이야. 슬퍼하는 사람들 속에 어린 네가 있었던 것뿐이야. 괜찮아. 이제 괜찮아.”

엄마의 얼굴과 아빠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스쳐 지나갔다. 친척 어른들의 얼굴도 지나갔다. 슬픈 어른들의 얼굴. 어린 내 동생의 얼굴. 그리고 앳된 모습의 내 얼굴. 지나가는 얼굴들을 보면서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사람들이 나를 미워했던 것이 아니구나. 우리 모두 힘들고 슬펐을 뿐.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구나. 


 나는 꽤 오랜 시간을 자기 연민에 빠져 살았다. 어린 시절 내가 상처 받았다고 해서 부모님과 친척분들을 무조건 나쁘다고 매도하는 일이 옳은 일인가 생각해본다. 그분들을 오랜 시간 모욕하고 있었다. 그분들께 죄송하고, 용서를 구한다.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의도치 않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주었을 상처에 대해서도 고민해본다. 인식하지 못했지만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많은 인연에 감사도 해본다. 용서를 구하고 감사를 전하는 호오포노포노의 네 가지 말,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에 담긴 치유의 힘을 가슴으로 깊게 실감한다. 


 오랜 시간 어린 날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부모님 곁을 떠나 독립을 했어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끈질기게 나를 붙들고 흔들었다. 잊고 살다가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슬펐고,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믿음은 너무 굳건해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평생을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힐 것 같았던 그 일들, 절대 꺼내놓지 않고 숨겨만 두었던 그 기억을 마주하고 껴안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들여다보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마주하지 않았으면 그 상처는 어딜 가나 나를 따라다녔을 테니까.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의 아니타는 임사체험 도중 ‘경험’이란 것에 대해 온몸으로 깨닫게 된 사실을 태피스트리 이야기로 설명해두었다. 

 “내 경험이란 저 커다랗고 복잡다단한 색과 모양으로 된 무한한 태피스트리에 수놓아진 한 가닥 실과도 같았다. 갖가지 다른 색깔의 실들은 내가 맺고 있던 관계들, 나와 연이 닿은 온갖 삶들이었다. (…) 그들이 나와 긍정적인 관계에 있든 부정적인 관계에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 (…) 각각의 모든 만남이 얽혀서 그때까지의 내 인생이라는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각각의 만남이 얽혀서 내 인생을 그리는 것이라면, 지금 내 인생의 그림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생각해봤다. 부모님과의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으로 성장했고, 정서적인 돌봄의 중요성을 아는 엄마가 되었다. 누군가 가정에서 상처 받은 일을 나에게 털어놓는다면 가슴으로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마음도 지녔다. 독서모임을 시작하고 새로운 삶에 눈뜨며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 모두 어린 날의 상처 덕분이다. 부모님과의 인연 역시 내 인생 그림에서 빠질 수 없는 소중한 만남이었다. 잊고만 싶었던 상처였는데, 그 상처가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세상에 서 있을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호오포노포노의 비밀>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잊으려 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일러준다.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고통스러운 과거를 사랑하라는 걸까 의심했다. 불가능한 일이라며 투덜댔다. 그런데 오랜 상처를, 힘들었던 기억을 외면하지 않고 따스하게 감싸주니 새로운 세상이 환히 열렸다. 어쩌면 내 속에 있는 아픔들이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여행길의 안내자가 되어주는 걸지도 모른다. 아픔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껴안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훌쩍 커 있는 나를 만나게 된다. 훗날 고개를 돌려 뒤를 보면 나를 아프게 했던 상처들이 나를 향해 애썼다고 방긋 미소 지으며 나의 새로운 삶을 응원하고 있을 것만 같다. 그 뭉클한 순간을 자주 맞이하고 싶다. 


이전 07화 6. 마음 헤아리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