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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서 Nov 09. 2019

5. 다른 사람 말고 나를 위해 써라

by 안수현


나는 독서모임을 한 지 1년이 되었을 때 독서모임 회원들에게 “우리들의 독서모임 이야기”를 한번 써보자고 제안했다. 그때 회원들에게 요구한 건 하나였다.  ‘나를 위해 써라’


이렇게 말한 이유는 하나다. <나를 깨우는 독서모임>의 마지막 작업으로 자기 삶에 대해 성찰하고 음미하여 과거의 나와 화해하여 더 자유롭게 이 삶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러려면 독자가 아니라 나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 독자의 니즈가 아니라 나를 위해 글을 써야 한다. 그러면 책으로 출간되지 못할 수도 있다. 혹은 무사히 책으로 출간되어도 잘 팔리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들인 시간과 노력이 쓸데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회원들에게 개의치 말고 ‘오로지 나를 위해서 써라’라고 주문했다. 


어느 회원분이 “글쓰기 방법을 따로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했을 때 나는 “배울 필요 없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쓰는 글은 누구를 설득하거나 정보를 주는 글쓰기가 아니라 그냥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글 쓰는 방법을 알고 있다. 초·중·고·대학교까지 나름 글을 쓰면서 살아왔다. 싯다르타가 “나한테 배울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나를 들여다보고 나한테 배우라고 했다. 그것이 바로 나를 깨우는 독서모임의 방향이기도 하다. 글을 쓰면서 나를 들여다보고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자기만의 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를 위한 글을 쓰는 이유이다. 

하지만 내가 확신하는 것은 진정으로 나를 위하는 글이 될 때 다른 사람에게 울림을 주는 글이 된다는 거다. 어차피 우리는 기성작가가 아니다. 처음 책을 쓰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한 글을 진정성 있게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위한 글쓰기"는 쓰면서 자기를 성찰하고 자기 삶을 음미하게 한다. 글쓰기는 가슴속에 뭉쳐 있는 하나의 감정, 생각, 경험의 덩어리를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이다. "나를 위한 글쓰기"는 감추고 회피했던, 뭐라고 표현하지 못했던 그런 덩어리를 잘 펴서 하나씩 뜯어보고 버릴 것은 버리고 청소해야 할 것은 깨끗이 청소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빠르면 안 된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덩어리가 잘 풀릴 때도 있지만 꽉 막혀서 풀리지 않을 때도 있다. 한 가지 원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들이 중첩되고 복합적이라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면 그 덩어리를 글로 풀어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어린 시절의 나와 대화하거나 과거에 있었던 일을 돌아보면서 그때 부모님이, 언니가, 오빠가, 동생이, 친인척이, 친구가, 선생님이 왜 그랬는지 알게 되거나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하고 공감하게 된다. 


수다스럽게 말은 해도 수다스럽게 글로 풀어내기는 쉽지 않다. 내 인생 스토리를 책으로 쓰면 소설 10권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지만 정작 글을 쓰라고 하면 몇 장 쓰지도 못 한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적합한 단어를 조합해서 어법에 맞는 문장으로 표현하고, 삼천포로 빠지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 느낌을 어법에 맞고 맥락에 어울리는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 때, 그것도 넋두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쓸 수 있을 때 나의 생각과 감정과 느낌도 정리된다. 즉 "나를 위한 글쓰기"는 과거의 나와 화해하고 나를 정화하는 작업이다.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작품은 어느 정도 재능이 필요하지만 에세이와 같은 글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쓸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다 같이 나눠 쓰면 양적으로 부담도 크지 않다. “우리들의 독서모임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면 한 사람의 경험보다 여러 사람의 경험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독서모임 회원들에게 함께 책을 써보자고 제안했다. 

책 쓰기를 제안했을 때, 독서모임 회원 전원이 함께 하겠다고 동의했다. 전원이 참여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정말 놀랐다. 참여한 회원들 모두 다 끝까지 완주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는 항상 중간에 포기할 사람이 있을 가능성도 열어둔다. 실제로 2명이 중간에 포기했다.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권유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글쓰기는 혼자만의 고독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고심해서 초고를 쓰고, 다시 퇴고하는 수십 번의 작업을 거쳐야 한다. 글쓰기는 지루한 시간이고 부담스러운 작업이라 개인의 의지와 묵묵하게 끝까지 해내는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쓰는 책은 “우리들의 독서모임 이야기”로 옴니버스 형식이다. 회원들 각자 자신이 쓸 내용의 목차도 스스로 정하고 혼자 써야 했다. 혼자 썼지만 “우리들의 독서모임 이야기”를 쓰는 것이라 2주마다 한 번씩 글쓰기 모임을 가졌다. 내가 <지하철 독서의 힘>을 썼을 때 가장 아쉬웠던 점이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의견을 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큰 것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문맥이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 내용이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원고를 보고 또 보았다. 계속 고치고는 싶은데 내가 쓴 글이라 뭐가 부자연스러운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이해가 안 가거나 뭔가 자연스럽지 못하면 그게 이상한 거다. 바로 그 이상한 부분을 알려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부분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아쉬웠던 부분을 다른 사람들도 느낄 거라 생각했다. 우리는 모임 3일 전 한 꼭지씩 쓴 글을 밴드에 업로드하고 주말에 모여서 서로 쓴 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합평 수준은 아니었다. 그냥 읽다가 탁탁 걸리는 부분, 이해가 안 가는 부분, 부자연스러운 부분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때 나는 조심스러웠다. 내가 다른 사람 글을 뭐라고 지적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을 한 권 출간했지만 그 한 권으로 남의 글을 이렇다 저렇다고 평가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가 쓰는 글은 나만 보는 일기가 아니라 엄연히 다른 사람이 읽는 책이다. 내가 읽어도 술술 읽혀야 한다. 내가 읽어서 부자연스럽다면, 맥락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읽어도 그렇다는 말이기도 했다. 누구나 읽을 수는 있지만 누구나 쓸 수 없는 글이 바로 술술 읽히는 책이다. 읽히는 글을 쓰기 위해 불편했지만 이야기해야 했다. 글쓰기 회원 모두 그 불편한 지점을 겪고 건너야 했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민정 회원님이 나에게 자신이 쓴 글에 대해 지적받았던 에피소드를 “위기”라는 꼭지 제목에 담았다. 그녀는 자신이 쓴 글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나에게 지적받아서 서운하고 속상해서 울었다고 했다. 그녀는 솔직하게 가슴앓이했던 원인이 낮은 자존감 때문이었다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녀 말처럼 깨달음에는 시간이 중요하지 않았다. 2주 만에 다시 만난 그녀에게서 뭔지 모르지만 그 사이 어린아이가 훌쩍 커버린 듯한 인상을 받았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을 텐데 담대하게 그 지점을 건너뛴 그녀의 성장이 흐뭇하고 자랑스러웠다. 독서모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 눈에 보이게 성장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쓰는 글은 점점 갈수록 더 좋아졌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모임이 거듭될수록 그녀의 글은 진솔해지고 있었다. 


나는 독서모임만큼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동안 학교나 직장에서 아는 사람들보다 1년 3개월이지만 독서모임 회원들 간에 더 깊은 유대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독서모임에서 나누는 대화는 일반적인 수다나 가십거리가 아니라 내면의 깊은 은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생각과 감정을 지닌 사람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나에게 초점을 맞춘다. 옆집 사람, 직장동료, 친구, 연예인, 정치인, 유명한 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를 한다. 다른 모임보다 자신의 은밀한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곳이 독서모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쓰기 모임 하면서 또 한 차례 머리가 깨지는 기분을 느꼈다. 

회원들의 날것 그대로의 원고를 보고 그들의 세월을 읽었다. 나는 독서모임 리더로서 회원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이 있어 내가 그들을 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글쓰기 모임에서  날것 그대로의 초고를 보면서 내가 봤던 회원들 모습은 단편적이고 피상적이었구나. 나는 그들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뭐라고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글쓰기에서 본 회원들의 모습은 복잡하고 다층적인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들의 초고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고 뭉클했다. 말하지 못했던, 숨기고 싶었던 그들의 날 것을 보면서 나는 그들을 더 깊이 받아들였다. 그들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나에게 사람에 대한 공부였다. 그래서 더 깊게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알았던 독서모임 회원들의 모습은 단편적이고 얕았다면 글쓰기 모임 회원들의 모습은 더 농밀하고 깊었다. 내가 독서모임에서 회원들을 관찰했던 방식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었고, 글쓰기 모임에서는 그들이 쓴 날 것 그대로의 초고를 읽는 것이었다. 말하기와 글쓰기의 간극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나를 위한 글쓰기는 나를 바로 알고 나로 바로 서는 힘이다. 자기 안에 있는 깊은 이야기를 끄집어내 자신을 재발견하고 지금보다 나은 내가 되어 삶을 즐기는 것이다. 나는 회원들의 초고를 보면서 ‘지금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구나’라고 실감했다. 그들의 초고를 보고 안도했고, 스스로 위로받았다. 

아니타 무르자니의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에서 “삶이라는 태피스트리 안에서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각자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도록 서로 돕고 있다는 점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과 같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동안 살면서 무수히 많은 인연을 만났고 스쳐 지나갔다. 개중에는 기억에 남는 인연도 있고 기억조차 없는 인연도 있다. 그중 1년 정도 함께 했던 <나를 깨우는 독서모임>과 글쓰기 모임을 통해 만났던 회원들은 앞으로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만남의 깊이이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도록 서로 돕고 있었던 깊은 사이니까.


나를 위한 글쓰기 작업을 통해 과거의 나를 깨고 새로운 나로 거듭날 것이다. 그 기분은 나만 알 수 있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안다. ‘아, 내가 이제 홀가분해졌구나. 이제는 조금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로워졌구나. 내가 점점 더 사랑스럽다.’ 이런 감정을 온몸으로 느끼는 거다. 나는 우리가 하는 글쓰기 작업이 바로 이랬으면 했다. <나를 깨우는 독서모임> 마지막 과제를 잘 수행한다면 정말 환상적일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책으로 출간되지 않아도, 책이 잘 팔리지 않아도 ‘뭐 어때, 최소한 내가 더 좋아졌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나는 지금 하고 싶은 독서모임을 운영하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즐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나는 먼 미래보다 오늘 하루 내가 즐기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근시안적인 삶처럼 보일지라도 나는 믿는다. 이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고 5년이 되고 10년이 될 것을. 오늘을 최대한 즐기는 것,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오늘 하루 잠자리에 들면서 ‘그래. 오늘도 잘 보냈다’는 뿌듯함이 올라오는 것.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독서모임을 즐겁게 운영하는 것. 그게 작고 소박한 내 인생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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