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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서 Nov 09. 2019

13. ‘꿈 너머 꿈’으로 삶 채우기

by 한순범


“당신은 한겨울의 에어컨 같은 사람입니다. 한겨울에 에어컨이니 얼마나 춥게 만들겠습니까? 무엇이든 잘하려고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 거예요.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냥 저녁에 뭐 먹을까? 주말에는 뭐 하고 놀까? 이런 생각만 하세요. 그렇게 해도 풀릴 일은 다 풀립니다.”


  이 글의 첫 부분에 썼듯이 사주 보시는 분이 나에게 했던 말이다. 그 말이 맞았다. 나는 될 일도, 안될 일도 모두 철저히 계획하여 노력하며 살았다. 삶을 억지로 계획하고 만들어내려면 여간 힘들고 고달픈 것이 아니었다. 일이 잘되면 잘되는 대로 주변인들의 인정과 칭찬에 목말라했고, 일이 잘되지 않으면 자신을 탓하고 남을 탓했다. 진짜 나의 삶이 아니었다. 세상이 만들어낸 가짜 내가 살아가는 삶이었다. 그런 삶은 행복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도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삶의 흐름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그 흐름을 따라가며 나를 챙긴다. 그 안에서 내가 즐거워하는 일, 하고 싶은 일들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삶이야말로 나도 행복하고 주변 사람들도 편하게 했다. 


  그동안 간절히 행복해지고 싶어 여러 시도들을 했었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벽에 부딪혀 좌절되곤 했었다. 그렇게 방황하고 있을 때, 독서모임을 만나게 되어 그 벽의 실체를 알게 되고 뚫고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벽을 뚫고 나왔더니 정말 살맛 나는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 구체적으로, 불편함이나 두려움은 내 기억이 만들어냈으므로 속박당하지 말고 지나가게 해야 한다는 깨달음, 삶에 저항하는 대신 삶이 주는 신호를 알아채어 그 흐름대로 의지를 발휘하여야 한다는 깨달음, 지금껏 나라고 믿었던 세상이 만들어낸 나의 모습은 허상임을 깨닫고 진아를 찾아 나가자는 깨달음, 그리하여 삶이 내가 되고, 내가 삶이 되는 행복을 누리게 되리라는 깨달음, 이런 깨달음들은 독서와 독서모임을 통해 얻게 된 값진 보물과 같다. 이런 깨달음들이 나의 삶에 어떤 변화들을 가져와서 하루하루 눈 뜨는 것이 행복한지 찬찬히 들여다봤다. 


  아침에 눈을 뜨면 요가와 명상을 통해 나를 들여다본다. 구겨진 종이를 빳빳하게 펴는 것처럼 전날 혹시 소홀히 대해서 내면 안으로 더 숨었을지도 모를 나의 진아를 반듯하게 펴내려 노력한다. 그런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듯, 나 자신에게 아주 맑고 밝은 기운이 도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 시간이 안 되어서 읽지 못해도 상관없다. 바쁜 아침 시간이니까. 책을 못 읽는 이유는 그것보다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내게 왔을 테니 괜찮다. 식사시간에는 온전히 딸과 남편에게 집중한다. 관찰하고 경청하고 함께 대화하며 밥을 먹는다. 언제부턴가 스마트폰으로 일정을 체크하고 뉴스를 보며 밥을 먹는 식구들의 행동이 중단되었다. 온전히 식사시간에는 먹는 것과 식구에게만 집중한다. 아침 시간이 즐겁다.


  학교에 출근하면 아이들에게 집중한다. 아침부터 한 명, 한 명 컨디션을 관찰하고 인사를 나눈다. <데미안>에서 관찰을 제대로 하면 타인의 행동과 감정의 양상을 알아챌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을 싱클레어는 독심술로 오인하지만 정말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아이들을 관찰하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어 상황에 맞게 반응해주면 ‘선생님이 어떻게 알았지? 선생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셔.’ 하며 신뢰와 존경을 보여준다. 그 모습이 참 귀엽고 예쁘다. 그래서 많이 장난쳐주고 함께 놀아준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다.


  이제 수업을 바라보는 시선도 굉장히 넓어졌다. 큰 틀만 정해놓고 주요 흐름만 잡아 수업에 임한다. 학생들의 반응을 관찰하고 그에 따라 유연하게 활동들을 짜간다. 꼭 가르쳐야 할 핵심만 잡고 나머지는 상황에 맡기다 보니 수업 내용과 관련된 다른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떠올려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삼천포로 가는 경우도 많지만 괜찮다. 이렇게 한 수업이 나도 좋고 학생들도 좋아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 학생들이 나의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해서 들을 때가 많다. 이야기를 하다 그 순간을 알아채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기쁨이 벅차오른다.


  퇴근할 때가 되면 아무래도 에너지가 많이 줄어든 것을 느낀다. 너무 많은 움직임이 있었고, 많은 말을 했고, 많은 생각을 했고, 많은 일을 했다. 이제부터는 다시 자신에게 집중할 때이다. 퇴근 후에는 거의 매일 요가, 골프, 배구 중 하나의 운동을 적절히 선택해서 한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러 가기도 하고 카페에 조용히 책을 읽으러 가기도 한다. 이것도 상황에 맞게 적절히 선택해서 한다. 가끔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거나, 친구와 만나거나, 딸과 함께 해야 할 일이 생기거나, 늦은 출장이나 연수, 회식으로 인해서 못하게 되어도 상관없다. ‘꼭 해야 한다.’라는 규칙을 버리면 오히려 더 많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져 더 재미있어진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의지를 최대한 강고하게 할 것, 또한 동시에 그 의지의 본거지인 신체를 최대한 건강하게, 최대한 튼튼하게, 최대한 지장 없는 상태로 정비하고 유지할 것-그것은 곧 당신의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리티를 종합적으로 균형 있게 끌어올리는 일로 이어진다.’고 했다. 퇴근 후 나만의 시간에 나는 정신적 의지와 신체적 건강을 동시에 유지하는 방법을 아주 잘 실천하고 있다. 그래서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처럼 안과 밖의 균형을 적절히 이루어내고 있다. 그러니 삶의 퀄리티가 높아질 수밖에.


  각자의 일을 마치고 밤에 식구들이 다시 모이면 ‘가족의 시간’을 갖는다. 서로 어떻게 보냈는지 대화하고 감사할 일을 찾아보고 함께 명상하는 시간이다. 이것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하지 않는다. 억지로 하기보다는 여건이 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하면 된다. 더구나 <예민함 내려놓기> 책을 통한 남편과의 진정한 소통의 경험으로 인해 우리는 가족 독서모임도 진행하게 되었다. 벌써 <모모>, <데미안>, <연금술사>, <위대한 게츠비> 등 여러 권의 책을 함께 읽고 나누었다. 딸아이는 독서록에 ‘가족 독서모임은 서로의 생각을 들을 수 있고 가족끼리 각자의 다른 역할을 하느라 대화할 시간이 부족한데 대화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활동이다.’라고 정의했다. 사실, 우리는 가족 중 누군가가 이야기할 때 나머지 사람들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며 건성으로 들어도 서로가 이해해줄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 모진 말과 날카로운 말로 조언을 가장한 충고와 명령을 할 때에도 서로 가족이니까 그 말 뒤의 진짜 의도를 읽어줄 것이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다들 상처 받고 아파하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딸은 딸대로 서운함을 쌓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딸아이의 말처럼 대화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가족 독서모임 활동으로 우리 가족은 서로에게 ‘존중’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서로에게 지시, 훈계, 비난이 섞이지 않은 아름다운 말들을 나눌 수 있기를, 그 아름다운 말에 온전히 귀 기울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제, 잠자리에 들기 전 나는 와인 한 잔과 가벼운 치즈를 준비해서 책을 보거나 글을 쓰거나 영화를 본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더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정말 즐겁고 행복하다. 다음 날 잠에서 깨어 눈 뜨는 것이 기대될 정도니까.


  주말엔 독서모임을 준비하며 책을 읽고 글을 쓰기도 하고, 가족과 함께 짧은 여행을 가기도 한다. 친구들과 만나기도 하고, 남편과 골프를 치기도 한다. 그리고 그냥 늘어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만끽하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다. 예전에 무엇을 할지 몰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폐인처럼 보냈던 시간이 너무너무 아깝다. 이젠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 무엇을 선택할지가 고민인 주말이 되어버렸으니까.


  이렇게 즐거운 일로 하루하루의 삶을 채워 가다 보니 그야말로 스치는 상쾌한 바람에도 ‘아, 행복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가 되었다. 행복은 항상 내 주변에 존재하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쉽게 찾아지고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는, 그런 당연히 내게 주어진 선물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 선물을 자주(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내어 나의 것으로 삼는다. 


  하지만 나는 이런 행복감이 여러 번 반복되어 익숙해지면 쉽게 변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구나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에 인내심이 매우 부족한 나에겐 더욱 쉽게 깨져버릴 행복이다.

내가 즐거워하는 일, 그러니까 지금까지 위에서 말한 일상의 그러한 일들로 현재 행복한 것은 맞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을 앞으로 한 달만 더 한다 해도 나는 지루해질 것이다. 다시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지속적인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뭔가 새롭고 신선한 것들이 계속 공급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산티아고는 늙은 왕에게 행복의 비밀에 대해 듣게 된다.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을 잊지 않는 데 있다고 말이다. 행복의 비밀 두 가지 중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알아챘고 받아들였고 내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기름 두 방울’이 필요한 것이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살되, 잊지도 말고 흘리지도 말고 고이 지켜야 할 숟가락 속의 기름 두 방울! 그 기름 두 방울은 진짜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되고 싶은 어떤 바람이나 희망 같은 것일 것이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아마 나를 깨우는 독서모임 두 번째 만남이었을 것이다. 한 회원님이 “꿈이 있으시냐?” 물었었다. 그때의 나는 여전히 보이는 것만 믿고, 아는 것만 말할 줄 아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으니, “꿈이 없다. 꿈 자체를 꾸고 싶지 않다.”라고 했었다. 그동안 꿈이라는(사실은 내가 찾아낸 꿈도 아닌데) 것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외롭게 불행하게 살아왔는데, 이제는 내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무 바라는 것 없이 평온한 상태가 꿈이란 것에 의해 다시 깨지고 싶지 않다는 짧은 생각이었다.


  지금 와서 보니, ‘기름 두 방울’은 간단히 말해 꿈이었다. 나를 해치지 않는 꿈, 삶이 신호를 보내고 나의 진아가 찾아낸 그런 꿈 말이다. 여기까지 사고가 깊어지니, 신기하게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의 삶에서 행복을 찾고 싶다는 꿈 말이다. 심지어 이 꿈은 지금 나는 행복하다 망설임 없이 이야기할 수 있으니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 행복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금방 지루해질 것이다.’ 하면서 말이다. 꿈을 이루고 나니 행복이 깨질까 두려워진 것이다.


  갑자기 머리에 번쩍, 굉장한 깨달음이 왔다. <연금술사>에서 크리스털 상점 주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메카 순례의 꿈을 이룰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꿈을 회피하는 상점 주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난 내 꿈을 실현하고 나면 살아갈 이유가 없어질까 두려워. 내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커다란 절망이 두려워서 그냥 꿈으로 간직하고 있기로 한 거지.” 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도 무의미한 삶이지만, 꿈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꿈을 이루고 난 뒤의 허탈감과 절망감이 두려워 발목 잡히는 건 정말 최악이다. 자, 나는 이제 첫 번째 꿈을 이루었다. 상점 주인의 두려움처럼 꿈을 이룬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제 무얼 해야 할까? 무얼 하긴? 첫 번째 꿈을 이루었으니 두 번째 꿈을 꾸면 되는 것이다. 나는 상점 주인에게 말해주고 싶다. 첫 번째 꿈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꿈이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고. 정말 나에게 꿈 너머 꿈이 찾아왔다고. 이런 식이라면 항상 꿈꾸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삶을 대하는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 꿈꾸며 사는 삶으로 새로운 행복 맞이하기

 

  나도 사실, 내 삶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방법을 알아냈을 때는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하고 이렇게 살아야지’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들 줄 알았다. 그런데 또 다른 꿈을 꾸라고 삶이 자꾸 나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바로 ‘오래된 지혜의 비밀을 알고 싶다.’라는 새로운 꿈이다. 이런 자각을 하자마자 바로 떠오른 단어는 ‘안테바신’이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인도의 아쉬람에 간 리즈가 자신을 대표하는 단어로 선택했던 말이다. 산스크리트어 안테바신(Antevasin)은 ‘경계에 사는 자’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복작거리며 사는 속세와 영적 구도자들이 사는 미지의 숲, 그 중간의 경계선에서 학자처럼 오랜 생각과 새로운 이해 사이에서 늘 배우며 사는 학자이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번뜩 뇌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속세를 떠나 초월의 길로 가는 성자가 되고 싶지도 않고 속세에 묻혀 미지의 세계에 무지한 채로 어리석게 살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면 이게 바로 나의 꿈이다. 안테바신(Antevasin)처럼 사는 것. 


  그 꿈을 이루라고 삶이 나를 이끄는 것처럼 그때 마침 이 독서모임의 리더인 작가님이 어려운 책을 함께 공부하자는 제안을 하셨다. 독서모임 외에 스터디 모임을 하자는 것인데 회원들 중에 여건이 되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서 첫 스터디는 작가님과 나, 둘이서 시작하게 되었다. 첫 책은 <티벳 사자의 서>란 아주 오래된 책인데, 이루 말할 수 없는 깨달음과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책이었다. 사실, 파드마 삼바바(님의) <티벳 사자의 서>는 이미 몇 달 전부터 구입해서 여러 번 읽기를 시도하였으나 포기한 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읽혔다. 이해가 되었다. 죽음의 기술에 관한 책이지만 그렇게만 읽히지는 않았다. 나의 내면에 불변하는 진아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근거가 되었고, 왜 그것과 만나야 하는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깨달았다. 지금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함께 공부하고 있는데 이 책 또한 정말 최고의 책이다. 내가 지금 공부하는 존재의 근원과 내가 누구인지, 우주가 무엇인지, 이런 내용은 자칫 사람들에게 비과학적인 미신 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칼 세이건은 수많은 증거를 들면서 과학적으로 이를 설명한다. 정말 든든했다. 그렇다고 너무 과학적인 내용으로만 무장한 딱딱한 책도 아니다. 문학 서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삶에 대해 영감을 주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넘쳐난다. 살면서 이렇게 즐겁게 공부하고 깊이 이해하며 삶과 연결 지어 받아들인 적이 있었는지, 벌써부터 다음 책이 정말 기대된다. 


  며칠 전, 안테바신처럼 사는 것 외에 또 다른 꿈을 꾸게 된, 뇌리를 치는 강한 인상을 받은 일이 있었다. 주말 동안 받은 독서 연수 강의 중에 아메리카 원주민의 교사 사진을 보여준 장면에서였다. 작디작은 아이들이 어른 아메리카 원주민의 머리, 어깨, 팔, 다리, 무릎 등 앉을 수 있는 모든 곳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 교사는 삶이 곧 배움이라는 철학을 갖고 삶의 이치, 지혜, 진리를 배울 수 있도록 이야기를 들려주고 직접 경험해볼 수 있는 환경을 끊임없이 제공해주었다고 한다. 이런 영적인 깨달음과 지혜를 강조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를 ‘Story teller’라고 부른다고 했다. 아이들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삶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교사로서의 Story teller의 역할이 교사인 나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자기 내면에 깊이 들어가 진아의 목소리를 깨달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도 Story teller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가의 기본은 이야기를 하는 것(tell a story)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의식의 하부에 스스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속 어두운 밑바닥으로 하강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야기라는 것은 인간의 영혼 밑바닥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과 사람을 근간에서부터 서로 이어줍니다. 나는 소설을 쓰면서 일상적으로 그 장소에 내려갑니다.’라고 했다. 진정한 Story teller가 되려면 자신이 먼저 삶의 진리를 깨달아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교사처럼,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나도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Story teller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더 나아가, 한 가지 꿈을 더 꾸자면(참, 욕심도 많다.) 다른 사람들을 나처럼 좋아지게 도움을 주는 ‘힐러(healer)’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스로를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간다며 자책하는 선생님들과 함께 내가 알게 된 것들을 나누며 치유와 정화의 시간을 갖고 싶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며 자신을 비관하고 삶을 포기하며 자해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아이들에게 내면의 힘을 길러주고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함께 찾아주고 싶다. 어떻게 해야 도움이 되는 힐러가 되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꿈꾸고 싶다.


  <연금술사>에서 산티아고가 보물을 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에서 ‘한 가지 일이 다른 일에 연결되는 신비로운 사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바로 그 사슬이 산티아고로 하여금 양치기가 되게 하고, 똑같은 꿈을 계속 꾸게 하고, 아프리카에 가까운 도시로 가게 하고, 광장에서 늙은 왕을 만나게 하고, 가진 것을 모두 털리게 하고, 크리스털 상인을 만나게 하면서 자신의 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행복을 찾기 위해 떠난 여정에서 독서모임을 만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읽은 책들과 회원님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로 삶을 다시 꾸리게 되었다. 그렇게 연결되어가는 많은 삶의 신호를 받아들이며 행복을 찾게 되었고, 지속적인 행복을 찾기 위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그 꿈이라는 것이 이전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신비로운 사슬로 연결된 나의 꿈 하나하나를 차례차례 밟아가는 느낌이다. 그 끝에는 아마도 <연금술사>에서 말하는 ‘자아의 신화’가 기다리고 있겠지? 삶을 정말 잘 살아보고 싶다는 의욕이 솟아오른다. ‘자신의 꿈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자아의 신화는 더욱더 살아가는 진정한 이유로 다가오는 거야.’라고 깨우친 산티아고처럼.


일요일 아침, 나는 지금 파주 출판단지 ‘지혜의 숲’이라는 도서관에 앉아있다. 그 어떤 향기보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책 냄새, 책 속으로 침잠하기 좋은 정도의 적당한 소음, 이곳에서 몰입되어 글을 쓴다. 이제 이 글쓰기를 마치려 한다. 고개를 들어 창밖 풍경을 내다본다. 아름답고 고요한 풍경 위에 나의 꿈, 꿈 너머 꿈을 떠올린다. 


생각만으로도 설레어서 얼굴에 살포시 미소가 내려앉는다. 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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