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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서 Nov 09. 2019

15. 나는 지금 변화중

by 김민정

독서모임은 나의 삶과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보내고 있는 시간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그 깨달음은 곧 하루하루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야겠다는 의지로 나타났다.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난 여전히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면서도, 그 일상에 파묻혀서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어쨌든 난 책을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전에는 왜 책을 읽고 변화하지 못했을까? 뭐가 문제였을까? 궁금해졌다. 우선 나의 책 읽기를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  어린 시절의 즐거운 책 읽기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까  7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 사촌언니가 다 읽었다는 명작동화 전집을 받으러 엄마와 함께 외삼촌댁에 갔었다. 왕초보운전자이며 길치인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분명히 환한 낮에 출발했는데 집에 오니 깜깜한 밤이었다. 얼른 집에 가서 빨리 책을 읽고 싶은데, 같은 길을 뱅뱅 돌면서 길을 못 찾는 엄마를 보고 어린 마음에도 참 답답했었다. 그 와중에도 차 안에서 중간중간 뒷좌석에 꽉 차 있는 책들을 돌아보면서 한편으론 얼마나 뿌듯했었던지, 아직도 내 기억엔 차 뒷좌석에 자주색 표지의 책이 쌓여있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책들과 함께라면 매일매일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있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읽으면서 하이디와 친구가 되었고, ‘작은아씨들’을 읽을 때는 내가 막내 에이미로 변하기도 했다. ‘잭과 콩나무’를 읽고 나서는, 꿈에서 잭과 함께 콩나무를 타고 올라가 내가 너무 가지고 싶었던 미미인형을 가지고 내려온 적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했던 책은 ‘플란더스 개’였다. ‘네로가 우리 집에 우유를 배달해줬으면 나랑 먹을 것도 나눠먹고 죽지 않았을 텐데’ 생각하며 많이도 울었다.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수십 번을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났다. 아마 그때가 내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의 출발점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책 읽기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있었다.


- 학생이 된 후의 책 읽기와의 결별

책 말고도 해야 할 공부가 많았기에, 자연스럽게 책과 멀어졌다. 문제집을 풀어야 했고, 시험 준비를 해야 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문학책들을 시험 대비용으로 읽었고, 시험문제로 나오는 작가의 의도를 찾느라 책의 의미는 찾지도 못했다.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 책 읽기는 즐거운 일이라기보다는 부담스럽고 재미없는 일이 돼버렸다. 나는 지금도 ‘초등학생 필독서’, ‘청소년 필독서’가 아이들에게 부담감만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필독서들은 나이별로 읽으면 좋은 훌륭한 책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아닌 누군가가 선택하여 읽으라고 권해주는 책을 아이들이 읽을 때  독서의 재미를 온전히 느낄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든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본인이 표지만 보고도, 책 몇 장만 넘겨보고도 그냥 마음이 가는 책을 택해서 자유롭게 읽는 것이 독서습관을 길러주는 데는 더 좋은 방법이 아닌가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내 아이가 만화책만 가지고 와서 읽을 때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아직까지는 개입하지 않고 잘 견디고 있다.(그렇게 책을 읽지 않았던 나도 고등학교 시절 ‘슬램덩크’ 만화책은 서점에 예약을 걸어놓고 나올 때마다 구매해서 읽지 않았던가)

학창시설에 책 읽기와 담을 쌓고 난 후, 대학생이 되어서도 제대로 책 한 권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독서모임의 한 회원님이 대학생 때 도서관에서 쉬지 않고 활자 중독자처럼 책을 읽었다는 경험을 이야기할 때 부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교를 다닐 때가 책을 읽기에 제일 좋은 시절이 아니었나 싶은데, 그때의 나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라는(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감에만 빠져있었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는 한심한 대학생이었다. 내 미래와 삶에 대한 고민과 책임감 없이, 아름다운 시절을 흘려보낸 점이 지금에 와서 제일 후회가 된다.


- 20대 후반 힘든 시간을 버티게 해 준 책 읽기  

다시 책을 잡은 것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때였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하는 공부였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모두 예쁘게 치장하고 연애하러 다닐 때, 허름하게 옷을 입고 도서관에서 하루에 10~12시간을 보내려니 숨 막힐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내가 찾아갔던 장소는 도서관의‘종합자료실’이었다. 시험을 위한 공부에 지친 나는 읽기 쉬운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당시 유명했던 한국 작가들의 책은 아마 그때 다 읽었던 듯하다. 추리소설도 많이 읽었는데 대부분은 내용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이 시절의 독서는 나의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보긴 어렵다. 책을 읽고 깊이 생각하거나, 내 삶에 적용해보거나 큰 깨달음으로 마음을 울렸던 기억은 없다. 그러나 나를 버티게 해 주었다. 힘든 취업준비를 하는 내게 유일한 탈출구가 되어주었다. 수험생활이 몇 개월을  넘기면서, 점심 먹은 후엔 반드시‘종합자료실’을 찾는 게 습관이 되었고,  그 ‘탈출구’가 없었다면 지금 내가 매일 다니고 있는 직장의 자리는 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직도 도서관의 ‘종합자료실’ 서가와, 늘 앉던 그 자리가 생각난다. 이번 주말엔 오랜만에 내가 수험 공부하던 그 도서관으로 아이들과 책 읽으러 가봐야겠다.


- 과시형(자기 위안) 책 읽기

대학 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할 때보다 10배는 더 노력해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합격한 그 순간은 세상을 다 얻은 듯이 기뻤고,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려는 열정이 넘쳤다. 그러나 15년 전의 공직사회는 지금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상사들은 조직에 충성할 수 있는 남직원을 더 선호했고, 여직원은 주요 부서로의 발령이 어려웠다. 일하는 능력이 조직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름되었으며, 그 충성심은 퇴근 후 상사와 함께 하는 술자리로 증명되기 일쑤였다. 물론 나도 노력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상사를 따라 평일 저녁엔 술자리를 따라다니며, 즐거운 척 함께 시간을 보내고, 주말에는 좋아하지도 않는 산행을 함께하고, 상사가 재미없는 이야기를 해도 맞장구를 쳐줄 수 있었다. 나는 그 노력을 거부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 반항심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이번엔 좀 어려운 책이었다. 책을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똑똑한 사람으로 보일 만한 책들로 골랐다. 이때 많이 들고 다녔던 책이 ‘손자병법’과 ‘삼국지’ 같은 중국 역사(소설) 책과 ‘야성적 충동’‘경제학 콘서트’‘나쁜 사마리아인들’과 같은 경제학(행동경제학) 책이었다. 물론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읽었다 한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책 읽기가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책들을 선택한 것도 주로 남성들이 관심 있어하는 분야를 아는 척해보려고 하는 유치한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런 책을 들춰보며, 속으로 난 어려운 책을 읽는 잘난 사람이라는 최면을 걸었다. 너희들이 술 마시는 시간으로 상사에게 인정받고, 남직원이라는 이유로 조직에서 아무리 잘 나간다고 해봤자, 책 한 장 안 읽는 너희는 무식한 인간들이라고 무시하면서 위안을 삼았다.


공직생활 초창기에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유치한 생각으로 책을 읽었지만, 내가 연차가 쌓이고, 조직의 분위기 또한 변해갔다. 따라서 그러한 반항심은 조금씩 사라져 갔으나, 과시형 책 읽기가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나의 과시형 책 읽기는 이런 식이다. 어느 날 회식자리에서 건배사를 할 기회가 주어진다. 모두 나만 보고 있는 뽐내기 좋은 상황이다. “요즘 존경하는 유시민 작가님의 <어떻게 살 것인가>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살 것인가> 선창 하면 <잘살아봅시다>라고 따라 해 주세요.”


대화를 할 때도 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 나 지금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데 진도가 안 나가.(이 책은 너무 유명한 책이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책이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주말에 애들이랑 광화문에 갔다 왔는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광화문 광장이 생기게 된 게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결정됐다고 하던데 알고 있었어?”


“시를 좋아하는지 않는데, 유일하게 좋아하는 시가 하나 있어. 이해인 수녀님의 ‘행복의 얼굴’이라는 시야. 힘들 때 읽으면 기운 나게 해 줘.”


이런 식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내가 평소에도 늘 책을 가까이하는 똑똑한 사람이라는 걸 나타내려는 욕심으로 하는 말이기에 의미가 없다. 책을 읽고 너무 좋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해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진정한 부자는 돈 많은 티를 안 낸다고 하는데, 제대로 책을 읽지도 않는 나는 책을 읽는 티를 내며 잘난 척만 하고 있었다.


-  독서모임과 함께 시작된 ‘나를 깨우는 책 읽기’

나의 책 읽기는 생각과 습관의 변화, 실천에 이르지 못했던 부끄러운 책 읽기였다. 단지 내가 활자를 읽는 행위 그 자체에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믿음, 그 두 가지가 나를 독서모임으로 이끌었다. 그럼 나를 깨우는 책 읽기는 무엇이 다를까?


첫째, 질문이 있는 독서이다. 질문은 나 자신에 대한 것과 책의 내용에 대한 것 두 가지로 나뉜다. 대체로 그렇다. 우리 독서모임의 테마가 ‘나를 깨우는 독서모임’이기 때문에 리더인 작가님께서 테마에 맞는 도서를 분기별로 선택하고 함께 읽는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책을 읽고 가장 와 닿는 문장이 무엇인지?’의 질문은 거의 빠지지 않는데, 이 질문은 생각할 때마다 다른 답이 나온다. 책을 한번 읽고, 또 두 번 훑어보고, 세 번째 읽을 때 와 닿는 문구는 다르다. 그리고 어떤 책을 읽던 내 삶과 맞닿을 수 있는 문장이 항상 마음에 들어온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독서모임 때였다.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 줄 수 없다면 나 혼자 즐기는 수밖에 없지”내가 책에서 가장 공감한 부분이었다. 글을 쓰고 있는 요즈음은 여러모로 힘든 점이 많다. 내 표현력의 부족과 스토리의 고갈, 글 쓰는 시간 확보의 어려움 등. 그중에서도 가장 쓸데없지만 떨쳐내지 못하는 고민은 ‘책이 출판된다면 과연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까?’이다. 내 글은 읽을수록 부끄럽고, 글쓰기 하는 4명 중 내 글이 제일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나는 자주 이런 고민에 빠진다. 그런 고민에 빠져있기에 이 문구가 와 닿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글쓰기를 즐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이어질 수 있다.  ‘즐겁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쾌감이나 만족을 주어 기분이 좋은 상태’라고 한다. 글쓰기 초보인 내가 글을 쓰는 과정에서 즐거운 기분을 느끼기는 어렵다. 자리에 앉아서 30분 이상을 고민하다가 한 줄을 쓰고, 한 시간이 다되어가도록 멍하니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을 때면 속으로 한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피곤함에 반쯤 감긴 눈을 애써 뜨면서  글을 쓰다 보면 고생을 사서 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하지만 자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면서 한 단락, 두 단락 쓰다 보면 어느새 한 페이지를 채운 글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봐도 맘에 드는 문장 한 줄을 써내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만은 진정 즐겁다고 말할 수가 있다. 가끔 오는 즐거운 순간을 좀 더 자주 맞이하기 위해, 더 즐겁게 살기 위해 오늘도 졸린 눈을 비비며 글을 쓴다.


독서모임에서 우리가 나누는 책을 읽은 후의 질문들은 내 안에서 또 다른 질문으로, 이후 내가 모르는 분야를 알고 싶은 호기심으로 퍼져나간다. <디아워스>를 읽고 나서는 “과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 내게 주어진 시간이 10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마음속에 솟아올랐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막상  삶이 10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건 결국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이다. 내가 그토록 많이 가지고 싶었던 돈도, 직장에서의 높은 지위도 다 부질없게 느껴진다. 사랑하는 남편, 아이들, 부모님과 함께 좋은 경치를 보며,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마무리할 것이다. 또 다른 책 <굿 라이프> 독서모임 후에는, “행복은 과연 무얼까?”,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행복에 대한 강의와 책들을 찾아보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심리학에 대한 책들도 함께 읽어나가는 중이다. 무언가에 대한 질문과 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학창 시절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이렇듯 질문하는 적극적인 독서는 같은 책을 읽어도 좀 더 깊은 사유와 깨달음을 주고,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력의 동기부여가 되어준다.


둘째, 변화가 있는 독서이다.

책을 읽는 것과 삶의 변화는 언뜻 아무 상관관계도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올바른 독서는 나를 변화시키고, 내 삶을 변화시킨다. 책 속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참 많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정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점이다. 열정과 신념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간다. 나는 무언가를 위해 열정을 다해 본 적이 있는가? 또 열정을 다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그런 길을 찾기 위해 나는 독서를 한다. 나를 제대로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책을 읽지 않고, 경험하지 않고, 나를 정의할 수 없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내가 좋아하는 것, 즐거워하는 일을 하는 사람, 그것이 곧 나다. 이렇게 나에 대해 집중하자 그간 신경 썼던 주변의 시선보다 나 자신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사소한 일을 결정할 때도 내 기분을 먼저 생각하고,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하기 싫은지 고민해본다. 사소한 일의 결정에 제일 먼저 도전한 것은, 매일 먹는 점심식사에서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시키는 일이다. 상사 3명과 함께 중국집에 간다. 나를 제외한 3명 모두 짜장면을 시킨다. 그리고 나를 바라본다. 난 아침을 안 먹고 출근하니까 잡채밥을 먹고 싶지만 “여기 짜장면 4개요.”라고 주문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말한다. “여기 짜장면 3개랑 잡채밥 1개요.”그렇게 말하면서 나 혼자 속으로 웃는다. 내가 잡채밥을 먹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은 잡채밥보다는 좀 더 중요한 결정이 필요했던 순간의 이야기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부서 전체로 수신되는 공문을 처리하고, 4개 부서의 직원들이 제출하는 자료들을 모아 각종 보고서를 생산해내는 일이다. 큰 보고회가 있을 경우 4개 부서, 83명이 하는 일들을 어떤 식으로 구성해서 보고할지 고민하다 보면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경우도 많다. 또 챙겨야 할 잔일이 많고, 해도 별로 티가 안나는 일들이 대부분이지만 일로 인정받기도 어렵다. 하지만, 사소한 일이라도 잊을 경우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늘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런 성격의 업무가 나의 일하는 성향과는 맞지가 않았다. 난 스스로 기획하고 처리하는 단독 업무가 더 성향에 맞는다. 그래서 몇 달 전부터 업무를 바꿔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를 믿어준 상사에게 죄송한 마음에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주변의 기대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난 늘 주변의 시선이나 평가가 우선이 었던 사람이기에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과연 내가 지금의 일을 즐기고 있는가?”스스로 질문해보았다. 그리고 결정했다. 즐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에 상사를 실망시키더라도 나를 위한 결정을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직 업무를 변경하지 못했지만, 예전의 나였으면 결코 할 수 없었던 말을 한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기회는 또 올 것이라 믿으며.


더불어 생활습관이 바뀌었다. 큰 꿈과 거창한 목표를 세우지는 못해도, 어제보다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소망으로 하루를 산다.


오늘의 일과를 간단히 적어보면,


6:50분 : 기상, 출근 준비, 아이들 아침식사와 둘째 아이 입을 옷 준비

7:50분 : 출근 (다운로드하여놓은 ebs easy english 듣기)

8:20분 : 사무실 도착, 아침 책 읽기 시작 (카네기 행복론)

9:00분 : 근무 시작

18:20분 : 퇴근 (세바시 강의 듣기)

19:00분: 집에 도착, 저녁 준비, 돈가스 에어프라이어에 돌리고 전기밥통에 쌀 씻어 넣고 밥하기(밥이 되는 30분간 ‘랩 걸’ 책 읽기)

19:50분 : 저녁식사, 아이들과 오늘 있었던 일들 이야기하기

21:00분 : 글쓰기 시작 (설거지거리 쌓아두고, 커피 한잔 타서 서재로 들어옴)


지금은 글쓰기 시작한 지 1시간 30분이 지났다. 아마 30분 안에 오늘의 일과가 마무리될 것이다. 나는 오늘과 비슷한 일정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만약 이러한 나의 생활이 미래의  성공을 위한 희생이라면,  이미 지쳤을 것이다. 시간을 쪼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즐겁기 때문에 해나갈 수 있다. 몇 달 전의 무기력한 나의 모습을 돌아보면 이런 변화는 신기할 뿐이다. 하는 일이 더 많아졌어도, 덜 피곤하다. 즐거운 일들이 많아지니 에너지가 저절로 충전된다. 이렇게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 때면, 내가 직장인이 아니고, 결혼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많은 시간 동안 자유롭게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도 든다. 하지만 부족한 시간은 그 시간을 더 소중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소중하기에 더 집중할 수 있고, 더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다. 그렇게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보냄으로써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는 길”로 한걸음 더 다가간다.  


현재 나의 최대의 관심사는 독서와 글쓰기이다. 유튜브에 “독서”를 입력해보면,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독서로 성장하는 인생 설루션”,“독서로 꿈을 이루다”등 수천 개의 영상을 검색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영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독서와 관련한 콘텐츠를 생산하면서 직업을 바꾼 사람들도 많다. 물론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독서력이 높은 수준에 올라있는 사람들도 많거니와, 특히 ‘글쓰기’를 매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 또한 상당수다. 틈날 때마다 스마트폰으로 쇼핑앱을 드나들던 내가 이제는 블로그나 브런치를 방문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는다.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이 써놓은 글을 읽다가, 내가 어제저녁에 써놓은 글귀들을 떠올려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동안 내가 관심 없었던 세상에 멋지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예전의 나였다면 다른 사람들이 쓴 글과 나의 글을 비교하면서, 애당초 나는 글렀다며 포기했을 터였다. 지금의 나는 부끄럽고, 힘들고, 가슴 한편에 포기하고 싶은 소리를 이겨내고 꿋꿋하게 버티는 중이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흙을 쌓아 산을 이루면, 바람과 비는 거기에서 저절로 생겨난다. 우리는 그저 흙을 쌓아 산을 이루기만 하면 된다. 많이 쌓으면 큰 산을 이루고, 적게 쌓으면 작은 산을 이룬다. 흙을 쌓아 산을 이루는 일은 하지 않고 비와 바람을 얻기만 기대하면 안 된다.”


지금의 나는 흙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루하루 흙을 쌓아 가다 보면 바람이 불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 믿고 싶다.


셋째, 함께하는 독서이다. 여기서의 함께는 독서모임 회원들과 나의 가족이다.

우리 독서모임은 한 달에 한번 한 권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독서모임을 시작한 후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한 권 이상 책을 읽는다. 그렇게 내가 혼자 읽는 책과, 독서모임의 주제 책을 읽는 것은 마음가짐부터가 다르다. 독서모임 주제 책은 일단 내가 모임에서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더 집중하고, 생각하면서 읽게 된다. 책을 읽는 것이 첫 단계, 생각의 표현이 독서의 중간단계이며, 책을 내 삶에 적용하는 것이 독서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독서모임을 하는 것은 중간단계에 해당한다. 책을 읽고 내 생각을 말로 한번 더 표현함으로써 더 깊은 독서를 할 수 있게 되고, 표현하면서 그 순간 더 깨달음을 얻게 되는 순간들도 많다. 함께 읽는다는 것이 더 깊은 독서를 하게 해주는 점은,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회원들과 생각을 나누면서, 나와는 다른 책을 해석하는 새로운 시각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함께 읽기는 혼자 읽기보다 깊고 넓다.


나는 남편과 초등학교 1학년, 6학년인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좌충우돌 힘든 순간들이 참 많았다. 세상에 내 맘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일 중에 최고는 아마도 ‘육아’ 일 것이다.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왠지 일하면서 잘 챙겨주지 못한 내 책임인   같았고, 아침에  나와 떨어지기 싫어 울면서 어린이집을 등원시키고 돌아 나오는 나의 발걸음엔 100톤 무게의 모래주머니가 두발에 달려 있는 듯했다. 퇴근 후 허겁지겁 아이를 찾으러 간 어린이집에 매일 같이 맨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아이를 찾을 때마다 미안함에 터져 나올 듯한 눈물을 참으며, 아이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려 애썼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방학 때마다 지방에 시댁으로 아이를 맡기고, 아이가 전염병이라도 걸리면 남편과 번갈아 휴가를 내고, 친정엄마, 아빠에게 아이를 맡기고,, 그러면서 직장에 피해가 될까, 누군가 ‘애엄마는 저래서 안돼’라는 말을 듣기 싫어 얼마나 아등바등했던가. 그렇게 지내면서도 난 남부럽지 않게 아이들을 잘 키워내고 싶었다. 잘 키워낸다는 것은 결국 공부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로 키워내는 것이 아이들의 성공을 보장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매달리고 있었다. 성공이 곧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서모임을 하면서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의 나처럼 아이들이 현재를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바라봐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는 걸 알았다. 요즈음 집에 있는 시간엔 식사를 준비하거나, 책을 보고, 글을 쓴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남편과, 아이들이 보는 내 모습의 대부분은 위의 3가지 활동을 하는 모습이었다. 어느 날 큰 딸이 물었다. “엄마~ 책이 재밌어?” “응, 재밌어.” “그래. 계속 읽어.” 그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서 뭘 하는지 봤더니 책을 읽고 있었다. 책 읽는 걸 좋아했던 큰아이는 고학년이 되면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스마트폰에 빠져서 예전에 비해 훨씬 책을 덜 읽는다. 그런 아이의 눈에 왜 엄마가 저렇게 “갑자기 책을 열심히 읽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겼던 듯하다. 엄마가 책을 읽는 건 재밌어서 그랬다니까 자기도 나름의 재미를 느껴보고자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부담스러웠다. 내가 하는 생각과 내뱉는 말, 행동들을 아이가 똑같이 따라 한다면, “정말 좋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모든 면에서 나보다는 나은 자식이 되었으면 하는 게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근데 지금은 아이가 나를 따라 했으면 하는 것이 하나 생겼다. 바로 책 읽는 습관이다.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우리 가족 블로그 만들어서 거기다가 서평 올릴까?”라는 제안을 했다. 나도 책을 읽고 서평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해야 하는 짐을 또 하나 떠맡는 게 자신이 없어 미루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남편이 먼저 말을 꺼낸 것이었다.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큰 딸은 “너무 좋아. 난 예전부터 꼭 서평을 쓰고 싶었던 책도 있었어.”라며 찬성했다. 큰 딸의 적극적인 지지로 우리는 가족 독서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다. 딸이 쓴 서평을 보면, 내 아이가 언제 이렇게 자라서 이런 글을 쓰는지 대견하다. 아빠, 엄마보다 훌륭한 글을 써낸다. 그리고, 엄마가 쓴 서평에 의견도 낸다. 다음 서평은 무슨 책으로 쓸 건지 이야기하는 것도 새로운 재미이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된 꼬맹이까지 합세하고 싶어 해서, 독서기록장에 쓴 글을 남편이 사진으로 찍어 올려주기로 약속을 했다. 우리 가족 독서 블로그 관리자가 된 남편은 블로그 관리에 책임감이 생겼다. 그 책임감 때문에 요즘은 책을 열심히 읽으려고 노력 중이기도 하다.


처음엔 그냥 삶이 공허해서 뭔가를 하고 싶어서 시작했던 독서모임이었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작이었다. 그런데 엄마의 생활습관이 바뀌니, 그 영향이 온 가족에게 퍼졌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독서하는 가족으로, 예전보다 더 함께 웃을 일이 많은 가족으로 변해가고 있다. 독서가 주는 힘이 참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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