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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서 Nov 09. 2019

16. 위기

by 김민정

난 우리 모임의 중간 참여자다. 나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모임이 시작되었던 1년 전부터 함께 했었고, 난 6개월이 지난 후 합류했다. 독서모임 시간의 절반에 내가 없었다. 그건 내게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내가 이 모임을 시작한 이유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 맺음’은 들어있지 않았다. 나에게 중요한 일은 나 자신과의 관계 회복이며,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깨달음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속에서 ‘소외감’이라는 감정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 감정이  폭발해버렸다.


그날은 ‘글쓰기 모임’ 첫날이었다. 작가님께서 ‘글쓰기’를 해보자 제안하였고, 나름의 규칙을 정했다. 꼭지를 정해서 2주에 한번씩 모인다. 모임 3일 전에 쓴 내용을 온라인에서 공유하다. 서로의 글을 읽어본 후, 모임에서 조언이나 첨삭을 해준다. 난 초등학교 다닐 때 이후로 글쓰기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10년 넘게 직장에서 다양한 보고서와 문서들을 작성해왔으며, 평가 또한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글을 평균 이상의 수준으로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안 써서 그렇지 쓰면 잘 쓸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자신감에 차있었다. 고심 끝에 목차를 정하고 첫 번째 꼭지를 썼다. 독서모임을 시작한 이유와,  지금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를 썼다. 생각나는 대로 별 고민 없이 써 내려갔다. 그렇게 짧은 글을 쓰고, 읽어보니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친한 친구에게 첫 글을 보여주었다. 그 친구는 쉽게 잘 써서 술술 읽힌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칭찬을 받은 후 더 의기양양해진 나는 처음 치고는 훌륭하다 자평하며 첫 글쓰기 모임에 나갔다.


그다음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는 참패였다. 글쓰기를 승과 패로 나눈다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나의 글은 기본적인 구조부터 시작해서 내용까지 모든 부분에 있어 지적을 받았다. 작가님은  내 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최대한 내 감정을 배려해주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속에 나쁜 기분의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기에, 배려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속상했고, 기분이 나빴다. 서운했다. ‘결국 난 여기까지 였던 걸까?’ 그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며, 이런 수준에서 함께 글쓰기를 해 나간다는 것이 나의 욕심인 건 아닌지, 내가 다른 회원들의 소중한 시간을 망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든 걱정과 근심이 복잡하게 나를 옳아 메고 있었다. 겉으론 태연한 척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아마 그렇게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엉망이 된 상태로 모임을 마치고, 차 운전석에 타자마자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오랜만에 펑펑 울었다. 그렇게 한바탕 울고 나니 오히려 후련한 기분도 들었다. 뭐가 문제일까? 를 차근차근 생각해보았다. 당연히 처음 쓴 글은 계속 고쳐야 하는 게 맞다. 무슨 일이든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고, 처음부터 잘 썼다면 난 타고난 천재 작가임이 분명했다. 타고난 천재 작가도 아니면서, 초등학교 이후 처음 쓴 글에 대해 비평을 받았다고 하늘이 무너질 일도 아니었다. 칭찬보다는 비평이 오히려 훨씬 자연스러운 일임은 분명하다. 이성적으로는 모든 게 이해되는데 왜 나는 이렇게 억울한 걸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든 생각은 내가 느끼는 ‘서운함’이 ‘소외감’과 연관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모임에 합류하기 전 회원님들이 함께 나누었던 경험들을 내가 느끼지 못함에 대한 ‘소외감’ 일 수도 있겠고, 현재 나의 깨달음과 마음 열림이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함에 대한 ‘소외감’ 일 수도 있었다. 독서모임이 계속될수록 난 불안했다. 뭔지 모르게 혼자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똑같은 책을 읽고도 다른 회원님들처럼 마음이 열리지 않았고, 더군다나 마음의 소리 같은 건 들어보지도 못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행세했지만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마음의 응어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자꾸 꾹꾹 누르기만 했다. 눌러버리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물론 그 응어리가 내가 독서모임에서 얻는 즐거움과 행복보다 컸더라면, 미련 없이 이 모임을 떠났겠지만, 그러기엔 여기서 얻는 긍정적인 변화와 즐거운 에너지, 행복이 훨씬 컸기에 난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마음속의 응어리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감추고 싶었던 마음의 응어리는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고, 내가 다른 회원들보다 못났다는 자격지심과 함께 ‘불안함’과 ‘소외감’이 눈물로, 억울함으로 분출되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저런 많은 생각들로 머릿속을 꽉 채운채 며칠을 보냈다.


그러다가 우연히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감 가지란 소리 많이 듣잖아요. 자신감은 되게 취약한 감정이에요. 자신감은 자기가 가진 특정한 능력에 대한 신뢰예요. 내가 공부를 잘하거나. 남들보다 예쁘게 생겼거나, 부자거나. 남들보다 비교우위에 있는 자산 또는 능력 때문에 상대방에 대해 우월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 자신감의 뒷면은 열등감이에요. 그 두 개가 아무 상관없는 거 같은데 딱 붙어있어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공부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버드 앞에 가면 작아지는 그런 감정이에요. 자기가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근거. 그 근거 자체가 무너지면 제로인 거처럼 굴어요. 자신감이란 이렇게 취약한 감정입니다. 그럼 자존감이란 뭐냐. 비교우위를 통하지 않고 내가 나를 승인하는 것이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나 하자, 한계를 정확하게 안 다음에 그걸 다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를 신뢰하는 것이에요. 자존감이 튼튼한 부류들은 잘난 사람이 지나가면 ‘좋겠다’ 딱 여기까지가 끝이에요. 그것이 자기 비하나 한탄으로 이어지지 않아요. 그냥 저 사람은 저 사람. 나는 나. 나는 저 사람보다 키가 작고 공부를 못하고 부족한데, 그래서 뭐? 나는 내가 좋은걸. 자기 하자를 인정해야 해요.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자기 객관화를 하는 거죠.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자기 스타일이 만들어져요. 자기만의 결이 생기고 굳어지면서 자기 스타일이 나오는 거죠.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어느 순간 멋진 사람이 되어있어요. 세상에 멋진 사람이 많은 거 같죠? 별로 없어요. 다 비실비실해. 근데 나는 멋진 사람 되면 좋잖아.


내가 그날 느꼈던 ‘소외감’은 결국 낮은 자존감이 원인이 되어 발생된 문제였다. 학교 다닐 때부터 직장 생활하는 지금까지, 아니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인생의 전부에서 늘 다른 사람들과 경쟁해왔고, 경쟁에서 이길 때 기뻤고, 지면 슬펐다.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삶에 익숙해진 나는 독서와 글쓰기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서 깨달음의 깊이가 남보다 낮다고 느껴짐에 괴로웠고, 글쓰기에서 조차 형편없는 평가를 받게 되니 결국 그 감정이 터져버린 것이었다. 똑같은 책을 읽고 그만큼밖에 느끼지 못하는 나도 나인 거고, 그 정도의 글쓰기 밖에 못하는 나도 나인 것이다. 그래서 뭐 어때?! 하며, 그냥 받아들이면 될 것을, 왜 끝없이 나를 비하하고 괴롭게 만들었을까? 그러면서도 나만의 정당성을 만들어가기 위해, 난 처음부터 함께 모임을 시작하지 못해서 이 정도 밖에 안된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근데 내가 처음부터 이 모임을 같이 시작했다면 달랐을까? 아니다. 결국 같았을 것이다. 문제는 내 안에 있었던 거니까.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고 나니, 혼란스러웠던 감정이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그 후 내가 독서모임에 함께 하지 못한 시간에 회원들이 읽었던 책을 늦게나마 읽기 시작했다. 내 스타일의 책이 아니라며, 거부했던 책을 구입하는 결심을 했고, 자기 비하는 그만하기로 결심했다. 이 책들을 거부했던 이유 중 하나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실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나의 관념과 대치되는 책이었기 때문이라고 믿었지만, 그건 또 하나의 ‘두려움’ 때문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내가 책을 읽어버리는 순간부터는 더 이상 핑계를 댈 수 없다. 그동안 나는 독서모임을 참여하기 전에 읽었던 주제도서들을 읽지 않아서, 이 정도 수준밖에 안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내가 다른 회원들보다 못나다고 느끼는 게 싫어서 그 책들을 거부했었다. 내가 만들어 놓은 나의 부족함의 정당성이 깨질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두려움’으로 내 마음이 다쳤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 ‘두려움’을 놓아버렸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두려움’을 놓아버리고 난 후의 ‘글쓰기 모임’에서 똑같은 비평이 이어졌지만, 신기하게도 그 지적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열심히 내 글을 읽어주고 조언을 해주는 회원님들의 모습에서 따뜻함과 감사함을 느꼈다. 19살의 나에겐 엄마가 공부친구이자 선생님이었고, 42세의 나에겐 함께 글쓰기를 하는 독서모임 회원님들이 글쓰기 친구이자 선생님이다. 처음 글쓰기에 도전하는 왕초보 작가가 선생님을 3명이나 곁에 두고 있으니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그렇게 나에게 온 위기가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삶에 더 이상의 ’ 소외감’이나 ‘두려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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