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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둥둥 Mar 18. 2024

우리의 중간지점을 맞춰 가는 일

최근 썸을 타던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다. 장거리 연애를 했던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3~4개월쯤 된 시점에 불쑥 나타난 인연이었다. 나는 그와 썸을 타면서부터 전 남자 친구를 아직 다 잊지 못한 상태라는 것과 연애도 결코 가볍게 하고 싶지 않다는 솔직한 심경을 말했었는데,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할수록 그는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서로에게 호감이 있으니 천천히 알아가고 싶다고 했다.


천천히 다가와 주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거기다 동갑내기라 그런 건지, 아니면 그가 유머감각이 있어서 그런 건지 대화하는 게 즐거웠다. 티키타카가 잘 맞는다는 느낌이 컸던 것 같다. 그렇게 순조롭게 썸이 이어지고 사귀게 되었는데 그 후로 사건이 하나 생겼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인 ‘술’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나는 술을 자주 마시지 않는다. 마시더라도 친구들과 약속이 있을 때나 많이 먹는 정도다. 특히 주중에는 다음날 일에 지장이 있을까 봐 먹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그는 나와 다르게 사람들과 만나 술을 먹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 적당히 즐기는 정도인 줄 알았으나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그런 자리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이전 연애가 당연히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취미는 있어도 친구들을 만나거나 동료들과의 술자리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있는 사람을 3년 동안 만나다가 약속이 잦은 그를 접하니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다 그가 동료들과 술을 진득하니 먹고 크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관계를 더 지속하기보다 여기서 끝내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에 잠겼다.


이슈(절친한 친구와의 약속, 회식 등)들이 몰린 주라서 술자리가 많은 것 같긴 했지만 고민이 많아졌다.


'내가 술과 사람을 좋아하는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연애 때는 그렇다 쳐도, 먼 미래를 보고 진지한 관계를 생각한다면 술이 큰 문제를 만들지 않을까?'

'나랑은 안 맞는 사람인 것 같아.'


수많은 생각으로 업무가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술 좋아하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고, 술이라는 매개로 신경 쓸 거리가 생기는 건 연애를 하면서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문제들로 나를 신경쓰게 할 사람을 만나기엔 내 나이가 적지 않고 그러니 처음부터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만날 수 없다는 생각과, 그래도 내 의견은 말 해보고 정해보자는 생각이 와리가리 했다.


퇴근 후 그에게 나는 술을 많이 먹고 새벽까지 먹는 걸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변수가 있어서 술 조절을 못 했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인 것 같다며 관계를 정리하자는 비수를 꽂는 말을 했다. 그리고 길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왜 본인이 그렇게 술을 절제 못하고 마셨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잘못한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는 내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을 보였다.


"둥둥이 신경쓰고 불편해 하면 맞춰주고 싶다는 생각이 커. 둥둥 말을 듣고 노력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내가 본인에게 실망한 것을 느끼고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물놀이를 좋아하는 사람한테 바닷가에서 물놀이는 딱 1시간만 하라는 말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느낌일 텐데 내가 원하는 부분을 듣고 노력해보고 싶다는 말을 하니 정말 한 번 믿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에 디폴트는 술 문제가 없었는데 그 초기 입력값이 완전히 부서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내 인생 가치관의 디폴트와 그의 디폴트가 매우 달랐다. 살아온 날만큼 우리는 많은 부분을 맞춰 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에 걱정도 됐지만 생각보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그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노력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고 그 과정에서 신뢰감이 쌓이게 됐다.


술자리에 갈 땐 편하게 즐기고 오도록 했고, 그가 일찍 들어갈 때마다 폭풍 칭찬을 해주었다. 그는 나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본인만 일어나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고 일찍 들어갔고, 나와 여행가기로한 전 날 술자리에서는 집에 더 일찍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나와 그의 삶의 기준, 디폴트 값이 서로 달랐지만 그 간극을 맞춰 나갈 수 있게 솔직하게 서로의 생각을 털어놓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로서 존중하고 수용해야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사람은 저마다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기 어려워 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서로를 조금씩 희석시키고 길들이는 일도 연애의 재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나와 상대의 중간 지점을 맞춰 가는 그 과정에서 얻는 행복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술이 엮인 문제는 고칠 수 없다고 말한다. 할수 있는지 없는지는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가 나에게 확신을 줬으니 믿어보려 한다. 그래도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고 물 흐르듯 지내보아야지.


우리의 중간지점을 맞춰 가보자는 말, 서로를 길들이는 과정에서 더 큰 신뢰가 피어나기를. 혹여나 생각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더라도 너무 걱정 말기를.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제 글을 찾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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