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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 빚는 영양사 Nov 15. 2022

엄마는 콩박사

채식, 콩의 무한한 가능성

호랑이 강낭콩 좀 보내줄까?


호랑이? 강낭콩? 왠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합쳐진 것 같지만 이 단어를 듣자마자 입 안에선 침이 고입니다. 어릴 적 느껴봤던 구수한 콩의 맛. 밤이나 감자, 혹은 고구마 같이 포실포실해서 콩만 쏙쏙 골라먹었던 기억. 유달리 콩밥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콩밥을 꽤 좋아합니다.


콩장은 먹는데 콩밥은 안 먹어.


친정 어머니가 콩을 보내주신단 말에 남편은 저렇게 대답합니다. 사실 저희 남편은 콩밥을 싫어해요. 콩장도 달콤 짭쪼름한 양념에 말랑말랑해야 잘 먹어요. 어린아이처럼. 그래서 결혼하고 나서는 콩밥을 잘 안 해먹었는데 호랑이 강낭콩이란 말을 듣자마자 엄마에게 냉큼 보내달라고 했죠.




콩밥을 좋아하는 여자


어릴 땐 친정어머니께서 콩밥을 자주 해주셨어요. 생각해보니 하얀 쌀밥보다는 연두연두한 완두콩밥, 붉은색이 깊게 배어있는 팥밥, 어떤 날은 검은색, 붉은색, 흰색 강낭콩 을 골고루 섞어 밥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콩밥을 싫어하던 또래에 비하면 콩밥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던 편입니다.


그중에서 단연 기억에 많이 남는 건 호랑이 강낭콩밥이에요. 엄마가 시장에서 콩깍지에 든 생콩을 사오시면 제가 항상 콩을 깠거든요. 호랑이 강낭콩은 콩깍지부터 얼룩덜룩 호랑이 가죽처럼 무늬가 있어요. 하얀콩에 붉은 무늬, 붉은 콩에 검은 무늬, 색깔과 무늬도 천차만별이라 어쩔 땐 보석 같이 예쁜 콩들이 나오면 손에 들고 가지고 놀다가 엄마가 밥짓기 전 제가 흰쌀 위에 콕콕 얹져 놓기도 했죠.  



요즘엔 마트나 슈퍼에서는 생콩을 찾아보기 힘들어 그나마 맛있는 콩 찾으려면 꼭 전통시장을 들러야 합니다. 그래야 콩깍지에 든 신선한 콩을 살 수 있어요.


이렇게 바로 깐 콩은 물에 불리지 않아도 촉촉하니 맛이 좋은데 밤? 어쩔 땐 고구마처럼 고소하면서 포실포실한 맛이 다른 콩보다 훨씬 진합니다. 누군가는 기름이 좔좔 흐르는 하얀 흰쌀밥이 제일 맛있다곤 하지만 저는 쌀밥보다 고소하면서 씹을 거리가 있는 콩밥을 더 사랑한답니다.



엄마는 콩박사


"밤콩은? 서리태는? 쥐눈이 콩도 좀 보내줄까? 혹시 동부콩이라고 알아?" 엄마랑 대화를 하고 있으면 콩 종류가 좔좔좔, 콩 종류가 이렇게 많았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저희 어머니는 콩박사세요. 엄마의 친정, 즉 저의 외갓댁은 과수원을 크게 운영하셨는데 그때 한켠으로 콩 농사도 직접 지으셨데요.


그래서 엄마가 알고 있는 콩은 못해도 10~20여 가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국내 콩 생산량도 줄어들고, 엄마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콩들도 있어서 가끔 제가 한 번씩 물어보면 저렇게 얘기해주시는 게 반가워요. 엄마가 알려주시는 콩 이름은 희한하고 재밌기도 해서 어쩌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거의 대부분 우리나라 토종콩인 경우가 많습니다.


제주도의 토종콩인 푸른독새기콩(청콩), 한양에 과거보러 가던 선비가 맛을 보고 그대로 눌러 앉았다 해서 선비잡이콩, 맛이 너무 좋아서 일제강점기 수탈의 대상이 된 파주 장단콩 등 그 역사와 스토리도 이름만큼이나 가지각색입니다.  


농촌진흥청 토종자원 소개에 따르면 밥밑용으로 소개된 토종콩(지역수집종)은 150품종, 나물이나 장류로 활용된 콩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재배되는 품종이 줄어 소비자가 실질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콩은 많아야 10여 종류에요.


엄마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는 콩이 늘어 갈 수록 우리땅에서 사라져 가는 토종콩도 많아지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콩의 원산지는 어디일까? 


요즘은 비둘기콩, 병아리콩, 렌틸콩 등 해외에서 수입되는 콩이 많기도한데 세계적으로 연구된 바에 따르면 콩의 원산지는 우리나라(한반도와 만주 남부)입니다. 북에 있는 두만강(豆滿江)이 바로 콩을 가득 실어나르던 강이라하여 이름붙여진 거죠.


약 5000년 전 고조선 시대 때부터 콩을 즐겨먹었던 우리민족은 두부, 콩국수, 콩떡, 콩탕(강원도 지역음식) 외에도 청국장, 된장 등 발효 음식이 다양하게 발달했습니다. 산지가 많아 목축이 어려운 탓에 콩 단백질을 현명하게 이용했던 것이죠.


영양학적으로도 콩은 쌀에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해주고 '밭에서 나는 쇠고기'라 할 정도로 질 좋은 단백질이 많습니다.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 섬유질도 풍부해서 비만, 당뇨, 고혈압 예방 효과가 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슈퍼푸드에 선정됐죠.


그리고 어디 콩만 먹나요? '오리알태', '수박태'와 같은 콩나물용 콩이 따로 있어서 콩에 싹을 틔워 양념에 무쳐 먹거나 시원한 콩나물국밥으로도 즐깁니다. 녹두에서 싹을 틔운 숙주를 먹는 민족은 여럿 있어도 콩나물을 먹는 민족은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특히 콩나물은 싹이 자라면서 비타민C와 각종 무기질, 숙취에 좋은 아스파라긴산도 풍부해져 수분 섭취와 영양소 보충에 딱입니다.

 



토종콩으로 건강한 비건


제가 토종콩에 주목하게 된 건 채식을 시작하면서 부텁니다. '식물성' 재료로 단백질을 보충하기란 한계가 있는데 이건 영양학적으로나 식재료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죠. 그리고 꼭 채식, 단백질원 하면 두부로 귀결되는 많은 레시피들. 콩물, 두유, 비지, 청국장 등 기존 가공식품을 이용한다 해도 맛과 형태, 영양소 면에서 알고 있던 것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두부도 원료를 잘 살펴보면 수입콩이나 GMO콩으로 만든 제품이 있어서 안전하다고 해도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기도합니다. 대체할 식재료를 찾는다면 잡곡이나 견과류 정돈데 이것들은 콩에 비해 단백질 함량이 적던가 지방 함량이 높아서 각각 장단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토종콩을 활용하면 요리에 응용할 수 있는 식물성 단백질원이 훨씬 더 풍성해지죠.


기본적으로 서양은 육류와 빵 중심으로 식단으로 '채소' 섭취가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한식은 얘기가 다릅니다. 산채, 버섯, 나물 등 각종 다양한 채소가 70~80%로 구성되어 서양인들 입장에선 한식이 건강에 좋은 '플렉시블' 채식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단백질원으로 우리 토종콩을 다양하게 활용한다면 훨씬 더 건강한 비건 음식이 되죠. 콩마다 조금씩 다른 무기질과 비타민, 특히 각종 천연 색소들을 골고루 섭취한다면 영양학적으로도 완벽한 건강식이 됩니다.그야말로 찐 건강 밥상, 채식으로 구성된 한식밥상이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비건 음식이 되는 거죠.



채식으로 콩의 종주권 회복하기


그런데 우리나라는 콩의 원산지임에도 불구하고 5000종이 넘는 재래콩의 주인 행세를 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종자'라는 것이 '자원'으로 인식되기 전, 학명이나 기록을 공식적으로 등록할 기회마저 빼앗긴 것이죠. 선조의 선조 때부터 '호랑이콩'이라 불리며 키우던 우리의 토종콩이 바다 건너 해외에선 종자를 먼저 등록해버리는 국가가 임자가 되버린겁니다.


1920년대 미국은 세계 식량 종자 확보를 위해 세계 각지의 야생 작물 채취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한반도에서 3개월 동안 전 세계 야생콩(대두) 종자의 절반이 넘는 무려 3,379종의 야생콩을 채취했습니다. 또한 1901년부터 1976년 사이에 우리나라에서 5496종의 재래종 콩을 수집해 갔으며 이 가운데 3200여 종의 콩을 일리노이 대학이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와 별도로 미국 농무부는 1947년까지 1만 개의 콩에 대한 유전자형을 우리나라에서 수집해 갔는데,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수집한 콩 종자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수집한 콩이 74%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홍익희, 세상을 바꾼 음식이야기, 2016.  p157~159


인터넷에서 호랑이 강낭콩을 찾아보면 원산지가 남아메리카나 콜롬비아로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농촌진흥청이나 토종콩을 연구하시는 분들의 자료를 보면 호랑이 강낭콩은 호랑이콩, 호랑이무늬콩이라면서 우리의 재래종이라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100여 년전 미국이 우리의 종자를 가져다가 개량한 뒤 혹은 기존의 강낭콩과 유전자를 조작해 씨앗을 판매한 건지도 모릅니다. 미국은 우리에게서 가져간 콩의 종자, 유전자로 세계 최대의 콩 수출국이 됐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미국에서 콩을 수입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콩의 원산지인만큼 야생콩, 재배콩 할 거 없이 많은 콩들이 이 땅에 살았는데 그 자원은 미국에 있고, 실제로 재배되거나 소비자들이 만나 볼 수 있는 토종콩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콩은 종자를 수입할 때마다 로열티를 지불해야 합니다.


하지만 국가적으로나 민간 단체에서도 새로운 토종콩을 찾거나 콩의 종주권을 찾기 위한 많은 움직임들이 일고 있습니다. 그리고 토종콩을 활용한 많은 레시피들이 알려지다 보면 언젠가 세계인들이 우리콩을 알아 줄 날이 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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