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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 Feb 09. 2024

알면서도 나는 왜?

<사랑이 쩨쬬의 몸을 빌리는 중> 18화


 2023. 8. 13. 일 ~ 14. 월


 목요일에 세부로 가족여행을 가는데 오랫동안 못 본다며 쩨쬬가 제주도로 내려왔다. 아침에 쌓인 빨래를 후딱 돌리고 가볍게 5km를 달리고 공항으로! 여덟 시 반쯤 공항에서 만나 골막식당에 가서 고기국수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쩨쬬의 스타벅스 최애 메뉴 얼그레이 바닐라 티라떼 시럽 2 펌프와 왜 제주도에서만 파는지 알 수 없는 까망라떼를 시켜 들고 하도로 향했다. 태풍이 지나간 뒤로 바다가 제법 깨끗해졌다. 태풍과 파도가 바다를 뒤집어 바다생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고 한다. 쩨쬬가 오리발이 없어서 멀리 가는 건 무서워하여 가까운 데서 놀았다. 촉수가 파란 해파리가 보였다. 검색해 보니 열대해파리라고 나온다. 올해 처음 보는 물고기도 있고 수온이 오르는 게 눈에 보인다. 월요일에 공항에 데려다주며 보리밥을 한 그릇 뚝딱 해치웠다. 쩨쬬는 분명 배가 안고프다고 했는데 나보다 빨리 먹었다. 평소 한 공기 다 먹지도 않는 사람이...... 그래서 별명을 하나 새로 지어줬다 '열린 결말'

 공항에 데려다주고 손을 흔들고 비상깜빡이를 켜며 인사를 했다. 그렇게 쩨쬬는 날아갔다. 공항에 데려다주는 길에 쩨쬬 폰으로 XXX이란 남자이름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는데 쩨쬬는 전화를 돌렸다. 휙~ 지나가는 건 기억에 제대로 남는구나, 사람은 다 비슷해, 다 달라, 다 똑같아, 믿을 수 있어, 믿을 수 없어

 언젠가 같이 누워있는데 쩨쬬가 말했다. 너는 믿음이 가는 사람이라고


 2023. 8. 20. 일 덥지만 하늘은 깨끗하다.


 쩨쬬는 세부에 있다. 부모님 결혼 40주년으로 리마인드 웨딩 겸 가족여행이다. 목요일 저녁 비행기를 타고 가서 금요일 가족사진 촬영 토요일은 새벽에 출발해서 고래상어보고 계곡투어하고 체력이 남아나질 않겠다. 부모님도 대단하시다. 가족을 위해 애쓰는 쩨쬬 이번 여행의 목표는 가족에게 화내지 않는 거라고 하는데 해내길 바란다. 할 수 있다! 연락 올 때의 쩨쬬의 표정 말투가 평화로워 보인다. 부디 그동안 스트레스받은 거 다 풀고 오기를!


 2023. 8. 26. 토. 맑은 바다


 일 끝내고 후다닥 세화로 가서 갈치정식을 시켰다.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한 그릇 뚝딱 해치웠다. 핵 오염수 탓일까? 손님이 나를 포함해 여성 한 분이 끝이었다. 갈치 뼈를 바르며 이 생선이 내 생에 마지막 생선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너무 큰 것을 잃는 것 같다. 밥 먹고 하도를 지나가는데 오늘따라 바다가 왜 이리 아름답고 깨끗해 보이는지 차를 돌려 모래사장으로 향했다. 총알총알대는 바다...... 왜 이렇게 깨끗하지? 제주도와 우도의 중간즈음 검은 게 꾸멀꾸멀댄다. 새떼인가? 와! 돌고래다! 오랜만에 보는 돌고래 떼 세 무리를 보았다. 여태껏 가장 많은 돌고래 떼였다.


 2023. 8. 29. 화 스콜


 에, '어제'를 쓰려고 했는데 '에'를 썼다. '어제'의 '어'를 쓸 때 이미 뇌에서 '어제'의 '제'의 'ㅔ'를 쓰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언제부턴가 이런 실수가 잦다.


 밥을 먹는데 유모차를 끌고 들어 오는 부부를 봤다. 불현듯 악인에 대해 생각을 하며 악인이 주인공인 글감을 떠올렸는데 그 악인은 저 부부에게 최악의 악담 혹은 신경 쓰이는 말을 내뱉는 것이다. "이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니야" 이렇게 말 한마디 툭 던지고 가버리면 남자는 불쑥불쑥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한한 상상을 펼치며 스스로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하는 나 자신이 불쾌하군


 직장이나 단체에서 조직구성원 모두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이벤트가 생길 경우 구시렁거리고 짜증 내며 반응하는 이를 구경하는 게 흥미롭다. 개개인의 성격을 알 수 있어서 그는 어떤 사람인지 구별하기 좋은 시점이다. 이런 것도 있다. 저 멀리 아름다운 여성이 지나가면 남자는 본능적으로 눈이 돌아간다. 고개도 몸도 돌아간다. 이때 나는 반응을 보이는 남자를 본다. 자극에 반응하는 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내가 짜증 날 일이면 그 누구에게도 짜증 날 일이다. 100에 99명은 반응을 하고 있으니 나 하나쯤은 반응하지 말지어다.


 2023. 8. 30. 수. 비


  쩨쬬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폭풍우도 무릅쓰고 달려왔었는데 세부를 다녀온 뒤로 재는 느낌이다.


 2023. 9. 1. 금. 흐림 7시 소나기


 쩨쬬가 현재 운영하는 일을 정리해야 할 수도 있어서 여러 대안을 모색 중이다. 살짝 이번에 제주도에 내려오라고 내가 벌면 된다며 운을 뗐더니 반 묵살당했다. 현실성 떨어지는 말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상대가 경제적 능력이 있어서 안 통하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어느 정도 프러포즈에 가까운 뉘앙스라고 생각한다. 나는 조금씩 실망하고 서운하고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중이다. 나는 더 이상 쩨쬬와의 관계에 있어서 미래지향적인 발언을 할 수 없으며 그냥 연애하는 거다. 연애의 목적이 다르다. 내가 마음을 접기 전에 쩨쬬가 다가오지 않으면 서서히 멀어지다 더 이상 인력이 작용하지 않아 튕겨나가 버리겠지? 상대가 좋은 사람이길 바라는 건 상대가 그리 좋은 건 아니라는 뜻이 될 수 있다. 나는 많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부족하다면 더 노력할 생각으로 충만하다. 하지만 관계에 있어서 다가와 주지 않으니 정풍에 자전거를 타고 바람에 맞서는 기분이다. 지금까지 장거리 연애는 쩨쬬의 노력으로 잘 버텨왔다고 생각한다. 내년에도 그럴 수 있을까? 함께보다 혼자가 편해지면 어떡하지? 혼자가 편하다고 느끼게 된다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외로울까? 아...... 또 비가 내린다. 쩨쬬와 이야기를 하고 나면 나는 항상 말을 참고 아끼게 된다. 누군가에겐 희망적으로 들릴 말이 쩨쬬에겐 그저 보채는 것으로 누군가에겐 지극히 현실적으로 들릴 말이 쩨쬬에겐 현실적이지 않은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쩨쬬를 더 모르게 되는 것만 같다. 애당초 그럴 생각이 없었을지도


 2023. 9. 11. 월 쩨쬬랑 자전거 여행 할 때 그날의 날씨


 쩨쬬가 어머니와 제주도 여행을 왔다. 쩨쬬 어머님은 자전거로 제주도를 도시고 나는 반차를 쓰고 중문 도리빨에서 쩨쬬를 만나 물놀이를 하기로 했다. 쩨쬬가 먼저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는데 아직 안 왔다. 전화를 하니 5분 정도 걸린단다. 기다렸다. 30분이 더 지나도 전화도 없고 해서 내가 전화를 거니 뻘짓을 했다면서 앞에 바다가 보인다며 횡설수설하며 금방 온다고 한다. 무슨 일 있냐 물으니 아무 일 없단다. 아무 일도 없는데 왜 늦는 건지 길을 잘 못 든 건지 얘기를 해주면 도움을 주던가 할 텐데 아무 말이 없으니 나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고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따 한마디 할까 생각이 들었다가 생각이 싹 가시는 게 내가 화를 내어 나에게 좋은 게 뭔가? 그 화는 나에게로 돌아올 게 뻔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따져서 뭐 하며 그런다고 더 좋아질 게 없다는 걸 알기에 나는 칼을 뽑지 못한다. 우리의 끝은 어떻게 될까? 한 시간이 지나 쩨쬬의 모닝 렌트카가 들어온다.


 "안아죠"


 "무슨 일 있었나?"


 “슈슈~ 내 걱정하고 있었구나“


 “……(아니, 나 짜증 나고 화났어!)“


 동업자에게 전화가 왔었단다. 하는 일에 문제가 생겼단다. 그래서 차를 세우고 통화를 했었다고 한다. 화를 냈다면 결국엔 내가 미안해했을 것이다. 쩨쬬는 절대 당황하는 사람이 아니다. 지난번 집을 나가서 전화를 받았을 때도 당황해하며 나를 찾았고 내 품에 안겨 울었다. 오늘도 동업자가 일하는 시간인데 1시간 넘게 통화를 할 수가 없다. 쩨쬬의 목소리가 당황스러운 게 느껴졌다. 거짓말인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왜 아무 말 못 했을까?


 2023. 9. 18. 월 더 깨끗한 하늘


 휴식시간에 두산봉을 달려보자! 쩨쬬가 언니네에 갔다. 두산봉을 달리며 날씨가 너무 좋아 영상통화로 보여주려고 했는데 한 번 불발, 카톡이 오길래 바로 걸었는데 또 불발, 그리고 연락이 없다. 요즘 쩨쬬가 예전만큼 표현도 적고 연락의 빈도나 제주도에 왕래하는 일도 줄었다. 다른데 관심이 생긴 건지...... 어제는 외롭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더니 내 곁에 쩨쬬가 없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그러면서 그냥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고 놀고 걸어 다니고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쩨쬬만큼 잘 통하는 친구도 없었다.


 2023. 9. 19. 화 날씨 굿!


 쩨쬬가 보고 싶다. 껴안고 자고 싶다.


 예전의 나는 쩨쬬의 토시 하나하나에 반응할 정도로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 이 일기장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느끼는 건 서로에 대한 관심과 집중이 한 숟갈씩 덜어진 느낌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 좋은 모습이 보이고 성격을 알고 나니 건드리고 싶지 않고 가만히 어떻게 하나 두고 보게 된다. 당장 다음 주면 추석연휴를 포함해 2주간 휴가이다. 올 초부터 나는 우리 둘이 함께하는 해외여행을 기대하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로 첫 여행이기도 하고 말이다. 쩨쬬는 지금까지 말을 꺼내지 않고 있다. 그렇게 계획적인 사람이 말이다. 만약 흐지부지 된다면 앞으로 나의 시간을 쩨쬬에게 맡길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묻지도 못하겠다. 쩨쬬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이벤트가 다가옴을 느낀다.


 쩨쬬가 몸무게가 줄고 있다. 걱정과 스트레스로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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