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쩨쬬의 몸을 빌리는 중> 19화
마지막 글입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3. 9. 24. 일 바람이 아주 세차게 부는구나
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꿍해있다. 추석 때 집에 있을 거냐고 에둘러서 물어보았더니 지금 생각은 집에 있을 생각이란다.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올해 초부터 해외여행 가자고 하더니 잊은 것인지 배려가 없는 것인지 상대방에서 얘기라도 해주는 게 예의 아닌가? 그냥 본인이 안 가게 되면 안 가는 것인가? 나는 뭔데? 속에선 욕이 나오는데 나는 입 밖으로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한다. 나 혼자 기분상하면 끝날 일이다. 행여나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여행을 가기 싫게 한 어떤 일이 있었을까? 지난달 가족여행을 다녀와서 해외여행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자. 그래 그렇다고 생각하자. 하는 일 때문에 힘겨워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자. 그래 그렇다고 생각하자. 이 또한 사소한 일이 되어있을 것이다. 사소한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하...... 글로나마 쓰고 나니 좀 낫다.
나는 욕구가 가득한데 쩨쬬는 뜸하다.
2023. 9. 27. 수. 하늘은 뭉게뭉게 바다는 잔잔 바람을 솔솔
연애의 감정이 외롭다. 카톡 답장이 늦어지고 전화를 받지 않는 경우가 잦아졌다. 자꾸만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 빅뱅이론에서 여자주인공이 남자친구를 친구들에게 소개해주지 않아 속상해하는 에피소드가 나왔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인간의 감정은 매한가지구나 생각이 들었다. '왜 남자친구를 소개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면 십중팔구 본인에게서 부족함을 찾을 것이다. 본인의 못난 부분, 부족한 부분 등등 그러니까 부끄러워서, 친구들에게 소개하기가 부끄러워서 일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설령 여자주인공의 의도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남자친구는 그렇게 느낄 것이다. 친구 보여주는데 입장료를 내는 것도 아니잖아?
오후 1시 반, 이제 카톡도 안 읽는다. 11시에 보냈는데 인간적으로 하던 대화는 마쳐야 하는 게 아닌가?
2023. 9. 28. 목.
일 마치고 고민을 하다 육지에 가기로 결정했다. 공항에서 쩨쬬를 만났다. 어색했다. 발가벗겨진 내가, 발가벗겨진 쩨쬬가 낯설었다. 밖으로 나서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하는 쩨쬬의 눈알이 흔들렸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런데 원래 마스크를 꼈었나? 원래 꼈었을 것이다. 다만 오늘의 마스크는 바이러스로부터 보호가 아닌 자신의 신상을 보호하기 위한 가림막이라 느껴졌다.
2023. 10. 15. 일. 제주도는 시월이 제철, 지금까지 안 좋았던 날이 없다.
쩨쬬가 아프다. 목, 금, 토 일 끝나기가 무섭게 몸살이 났다. 살갗이 쑤시고 기침도 심하고 라면이랑 복숭아 그리고 기픈물 마신 거 까지 다 토해냈단다. 오늘 아침이면 나을 줄 알았는데 밤새 토했다고 하니 걱정된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다. 나이 들어 골골대니 더 마음이 아프네
2023. 10. 27. 금. 바람, 가뭄, 모래바람
쩨쬬는 기침이 3주가 지나도록 멎지 않는다. 라면 먹고 장염에 걸린 이후로 비실비실 거린다. 초코송이로 연명하고 있다.
2023. 11. 1. 수. 덥다. 26도까지 올라감
쩨쬬가 진지한 얼굴로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생각을 해봤다며...... 싸~~ 했다. 왔구나! 본인은 아이를 낳고 기를 자신도 없고 기후위기 등으로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기에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데 슈슈는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면 굳이 결혼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기에 서로의 결혼관이 다르니 슈슈를 놓아줘야겠다는...... 나를 계속 만나는 게 슈슈가 시간낭비를 하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단다. 요즘 몸도 마음도 많이 망가졌고 생각도 깊어지는 것 같단다.
생각을 얘기한 것인지 헤어지자는 결론을 낸 것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떠난 것이라면 받아들이겠다. 그게 아니라면 결혼이나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것은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고 서로 조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쩨쬬는 차분하게 이별을 고하려는데 나는 끝까지 을의 입장이 되어 붙잡고 있다.
2023. 11. 3. 금. 맑고 덥다.
내가 할 얘기가 있어요 저녁에 전화할게(저녁 7시 18분)
음...... 저녁을 먹으려고 앉았는데 입맛이 뚝 떨어지고 가슴이 답답하다. 왜일까? 정말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일까? 생각의 차이일까? 타협점을 찾아갔음에도 무엇이 문제일까? 종교일까? 아니면 어떤 집안 대 집안의 문제 같은 거? 어제 부모님의 노후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묻기도 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왜 엎질러졌는지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지 물어보지 않으면 머릿속에 평생 맴돌 거 같은데...... 내가 지니고 갈 업보라고 생각하자 정말 좋아했던 사람인만큼 구질구질하지 않게 지금이야말로 쿨하게 행동할 때이다. 내일모레 마흔이다. 스물한 살에 쩨쬬를 알게 되어 오래도록 사랑했었고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연애를 하면서 삶에 대한 거의 모든 것에 긍정적으로 변모했고 아름다웠다. 존재만으로도 나는 세상의 즐거움과 사랑과 슬픔 온갖 감정을 느끼고 성장할 수 있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나도 헌신할 수 있고 맞춰주고 져주고 절절 기고 다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자존심이란 단어를 잊었다. 슬플 것이다. 많이 슬플 것이다. 전화가 오고 이야기를 듣고 통화를 종료하는 순간 슬플 것이다. 궁금해도 참자. 쩨쬬도 충분히 슬퍼할 수 있게 정말 사랑스러웠던 쩨쬬 안녕! 건강하길!
도대체 언제 전화를 하겠다는 거지? 말도 안 되게 제 3자에게 협박을 받고 있다던지 드라마처럼 "사실...... 나 불치병에 걸렸어?" 이러는 건 아니겠지?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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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생겼어"
"......"
"환아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15년의 추억을 망쳤어"
"내가 뭐 잘못했나?"
"아니야 네가 잘못한 거 없어...... 내가 이런 사람이야"
"언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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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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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의 어느 여름날.
풋풋한 새내기였던 나는
맞은 편에 앉은 한 아이를 보고 말았다.
정말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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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너무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