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표현하는 'I love you'는 욕망의 표현이지 사랑의 표현이라고 보긴 어렵다. 욕망은 단순히 나의 결핍을 채우려 하는 표현에 가깝다. 나는 널 사랑하지만 그는 날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그를 그 자체로 보는 게 사랑이지. 내가 널 사랑하면 너도 날 사랑해 는 이치에 맞지 않고 사랑이란 말을 담기에 부족하다.
사랑은 이해가 먼저다. 비록 그 내면에는 사랑의 존재를 얻고자 함이 깔려있을 수 있겠지만, 사랑한다는 것이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는 건, 사랑을 하는 순간 '우리'라는 개념이 새롭게 성립되기 때문이다. 얼핏 우주적 관점에서도 바라볼 때, 최초 시작된 개인의 원자가 서로 결합되며 지금 이 세상이 만들어진 것 같이 원자인 우리는 사랑을 할 때는 소중했던 원자적 개인의 모습을 탈피하고 우리라는 것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이 본능적으로 '내'가 먼저라고 생각이 들기 때문에 나에게서 우리로 나아갈 때 본능적으로 내가 희생된다고 생각하거나, 그가 좀 희생해 주길 바란다. 각 원자로써의 삶이 너무 즐거웠기에 우리라는 초월적 상태로 나아가려면 원자의 삶은 포기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되기 위해선 먼저 나와 그는 서로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야 하고 나의 사랑이 타인의 사랑과 결합될 때 사랑을 할 수 있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칼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도 인류와 우주를 연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힘은 결국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사랑이 우리 개개인이 사랑하는 흔하디 흔한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닌,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나아가 우주의 모든 생명이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여 연대하고 지식을 계속적으로 전수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근본이 바로 사랑 때문이다라고 안내한다.
종교적으로 볼 때, 기독교에서는 아가페적 사랑, 즉 조건 없는 사랑을 먼저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하거나, 이웃을 나와 같이 사랑하기. 원수도 사랑하기 등 단순하게 보면 "이게 말이 돼?"라고 여길 것이 사실 근본적으론 다 맞는 말이다. 우주적 존재인 하나님이 인류를 만든 것이 사랑이며, 당연히 인간도 그것을 본받고 인간적 조건인 혈연, 지연 또는 이익 등을 넘어서 무조건적 사랑에서 희생적인 사랑을 말하고, 나아가 스스로 십자가를 통해 자기희생을 강조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보편적 연민 또는 자애를 포함하는 '자비'를 사랑과 같이 표현한다. 또한 불교에서의 '연기사상'은 모든 것이 맞물려 있다는 우주적 연대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표현이 다른 두 종교모두 사랑은 나의 경계를 넘어선다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내가 소중하듯 그도 소중하다. 눈이 안 보이게 태어난 사람이건 귀가 안 들리게 태어난 사람이건 당연히 모두 소중하다. 나아가 네 발 달린 짐승도 소중하고 냄새가 지독하거나 독을 가진 동물이나 곤충도 식물도 소중하다. 이 세상은 소중하고 사랑받을 것 투성이다. 나와 이 세상 모든 것들과 서로 아끼고 사랑하여 연대하자.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고 가장 우리 다울수 있다고 판단한다.
사랑은 한다 또는 시작했다 등의 표현으로 쓰지 않는다. 한글에서는 사랑에 "빠지다", 영어에서도 "Fallin in Love"라고 하듯 사랑은 빠지는 것이다. 즉, 나를 내려놓고 그쪽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꼭 행성이 새롭게 탄생을 위해 블랙홀에 빠져 흡수되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