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lda Sep 19. 2021

In to the Unknown

나는, 더블린의 웨이트리스 (8)


그때 희정은, 벌써 열 달째 고갈티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희정보다 서너 달 먼저 그곳에 취직했던 미승의 소개 덕분이었다. 사실 아이리쉬 펍에서 한국인 직원을 보는 일은 그리 흔치 않았다. 그들이 한국인을 선호하지 않는 건지, 한국 학생들이 펍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더블린에서 2년 7개월을 살며, 아이리쉬 펍에서 한국인 직원을 본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니 미승이, 어떻게 고갈티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상상하건대, 처음 일을 시작할 땐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승은 당찬 아가씨였고, 덕분에 똑 부러지게 일을 해냈으며, 사장 마틴은 그런 미승을 총애했다. 때문에 더블린에서 단짝으로 지내던 희정을 고갈티에 소개해 줄 수 있었고, 희정 역시 그곳에서 일을 잘 해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열 달이 지난 후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St Patrick's Day)*를 앞두고 더 많은 스태프가 필요해졌을 때, 그래서 마틴이 미승에게 ‘고갈티에서 일할 만한, 괜찮은 친구 없어?’라고 또 한 번 물어왔을 때, 이번에 그녀는 희정의 옛 룸메이트였던 나를 떠올렸다.         




        

사실 나는 희정의 연락을 받고도 내가 고갈티에서 일을 하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앞을 지나치다 흘끗 들여다보면 고갈티는 언제나 발 디딜 틈 없이 수많은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그 흔한 패스트푸드 점 아르바이트조차 한 번 해보지 않은 내가, 그런 곳에서 버텨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때문에 희정이, 나를 고갈티에 취직시킨다는 생각에 들떠있을 때도, 정작 나는 한참 동안 머뭇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어떠한 일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훨씬 더 느리게 진행되는 것처럼, 또 어떤 일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진행되는 법. 내가 고갈티에 들어가는 일 또한 그러했다.      

     

“그냥 CV 출력해서, 옷 깔끔하게 입고 오면 돼.”   

       

라는 희정의 충고에 따라, 나는 마틴과의 인터뷰를 위해 나름 단장을 하고 정성껏 CV를 준비해 갔지만, 막상 나를 만난 마틴은 내 CV 따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나를 쓰윽 한 번 쳐다보더니        

  

“너 펍에서 일해본 적 있어?”          


라고 물었고, 딱히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내가      

    

“아니.”          


라고 짤막하게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건 좀 곤란하다고 대답하거나 아무래도 영 믿음이 안 간다는 표정을 짓는 대신,      

      

“좋아. 그럼 오늘 저녁에 시간 돼?”          


라고 물어왔다.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는 나에게 마틴은 그럼 오늘 저녁부터 당장 트레이닝을 시작하라고 말했고, 그 순간 나의 아일랜드 삶이 180도 달라졌다.        





고갈티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 열심히 나를 공부시키던 희정과 미승.


그래도 안심이 안 된 희정은 나를 또 따로 만나 고갈티의 드링크와 스태프들에 대하여 집중 과외를 해주었다.

        


그날 이후 모든 변화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 저녁, 트레이닝을 시작함과 동시에 키친에 올라가 고갈티의 음식들을 외우고, 희정과 미승을 만나 드링크의 종류와 이름을 배웠다. 새 직장을 구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의 아이리쉬 가족들에게 다음 오페어를 구할 여유를 주어야 했기에, 바로 일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게다가 당장 그 주 토요일에는 이사를 나가야 했건만, 앞으로 내가 살 곳을 구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나는 낮에는 계속 아이들을 돌보고, 밤이면 새 집을 알아보기 위해 시티센터로 나가는 일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만 했다.  




마음에 드는 집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위치가 마음에 들면 이사 날짜가 안 맞았고, 이사 날짜가 맞으면 방세가 너무 비쌌다. 그래도 오페어 일을 그만둠과 동시에 세라네 집의 방을 비워줘야 했기에 일단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때는 내가 아일랜드에 온 지 꼭 일 년이 되었을 무렵이라, 새로운 학교에도 등록을 해야 했고 동시에 비자 연장도 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대체 무엇부터 해결해야 하는지, 어떤 일이 준비가 끝났고 어떤 일이 끝나지 않았는지 어느 순간 감조차 오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흘러갔고, 결국 이러다가는 다시 또 호스텔에 짐을 푼 채 고갈티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하고 있을 무렵 기적처럼 살 곳이 정해졌다.    

       



고갈티에서 일을 시작하기 하루 전, 기적처럼 내 앞에 나타나 준 집. 나름 조용하고 보안 상태가 좋은 아파트였다. 이 아파트먼트에서 나와 함께 살았던 폴란드 남매는 내가 고갈티에서 너무 오랜 시간 일을 하느라 늘 집을 비웠고, 집에 있을 때도 피곤에 지쳐 잠만 잤기 때문에, 종종 나를 ‘ghost’라고 불렀다. 



걸어서 고갈티까지 25분쯤 걸린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시티센터에서 그만한 가격에 더블룸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나는 이것저것 따질 형편도 아니었기에 집을 보고 나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을 하기로 했다. 결국 부랴부랴 짐을 싸 다시 시티센터로 나온 것은 고갈티에서 트레이닝을 끝내고 정식으로 일을 시작하기 바로 하루 전의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섯 달 동안의 호쓰 생활을 마무리하고 새 집과 새 직장,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있는 미지의 세상으로 다시 한번 발을 내디뎠다.






*) St. Patrick's Day. 매년 3월 17일,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진 성 패트릭을 기리는 날이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축제일이기 때문에 이 날을 전후로 하여 아일랜드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접어든다. 게다가 수많은 관광객들이 아일랜드로 모여들기 때문에, 더블린의 템플바들 역시 이 시기에 가장 바빠진다. 마틴이 이때 열 명이 넘는 새로운 스태프를 한꺼번에 채용한 것도 바로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전 08화 내 동생이 되어줘서 고마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