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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Sep 19. 2021

내 동생이 되어줘서 고마워

나는, 더블린의 웨이트리스 (7)



여기서 잠깐, 희정의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희정을 만난 건 더블린에 온 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 그러니까 내가 오랜만에 해보는 학생 노릇에 한창 재미를 붙여가고 있을 때였다.


그날은 우리 반 선생님이 하루 휴가를 가는 바람에, 다른 upper-intermediate* 반과 합반을 해야 했는데, 바로 그곳에 희정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수업 도중 한두 마디 나누고 헤어졌던 희정이      


“우리 반에 한국 여자애가 한 명 있는데, 말이 꽤 잘 통해. 같이 점심이나 한 끼 먹자.”


라고 말한 제나를 따라 내 앞에 다시 나타날 줄은 몰랐다.                     


지금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처음부터 희정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이 사람이 나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이 될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아봤던 건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얼마 후 희정과 함께 살기로 했던 제나가, 그 집은 너무 지저분해서 살 수 없다며 이사를 나간 후 희정의 새로운 룸메이트가 된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예민하고 까다롭기 그지없는 내가, 누군가와 함께 방을 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비교적 저렴한 방세와 단 20분이면 학교까지 걸어갈 수 있다는 장점은 그 집으로 이사를 들어갈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나와 희정이 여섯 달쯤 함께 살았던 거리. 그녀도 이 사진을 보면, 우리의 옛집을 한 번에 찾아낼 것이다. 



사실 희정은 나와 닮은 데가 전혀 없는 아이였다. 내가 아일랜드의 소박함이나 자연친화적인 점들을 좋아했다면, 희정은 이 도시의 조용하고 심심한 점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유럽의 중세 도시에 심취해 있었다면, 희정은 화려한 불빛으로 빛나는 아시아의 대도시들을 더 좋아했다. 나는 우울할 때면 더는 슬퍼할 게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혼자서 그 생각에 몰두하는 편이었지만, 희정은 그렇게 웅크리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워서 ‘나가자. 우울할 때는 밖에 나가야 돼!’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너무나 외로워져 I'm so lonely here today라고 적어놓은 내 글을 보고, 희정이 다가와 내 침대에 앉았다.     

 

“언니 오늘 왜 외로웠어?”

“그냥, 그냥 외로웠어.”

“아무 일도 없었는데?”

“응.”     


그러자 희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외로울 수 있는 거지?’라고 생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너는 그럴 때 없어? 갑자기 외로운 날?”

“음, 잘 모르겠어. 나는 감정이 되게 단순한가 봐.”

“그래도 이렇게 외국에 나와서 혼자 있는데, 외롭지 않아?”

“왜 혼자야? 난 친구들도 있고, 언니도 있는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언니는 감수성이 풍부해서 그래. 나는 그냥, 즐겁고 화나고 그러지, 갑자기 외롭지는 않아. 그래서 언니가 써놓은 거 보고 생각했잖아. 응? 외로운 게 뭐지? 대체 왜 갑자기 외롭다고 느끼는 거지? 그런데 생각해 봐도 모르겠더라고.”     




희정은 그런 사람이었다. 귀엽고 감정 변화가 크지 않고 솔직 담백한.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가진. 언제나 즐거운 기운을 잃지 않는. 그래서 누구에게라도 자신 있게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소개해주고 싶은.


그 해 4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다섯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시티센터에 있던, 그 낡고 지저분한 집에서, 그럼에도 어쩐지 꽤 행복해하며 함께 지냈다. 그때 이미 고갈티에서 일을 하고 있던 희정은 내가 잠들고 난 새벽녘에야 들어오기 일쑤였고, 그런 희정이 한창 잠들어 있을 이른 아침에 나는 학교에 가곤 했지만. 그런 생활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소리나 움직임을 성가셔해 본 적이 없었다.


“언니, 괜찮아. 나 잠귀 어두우니까 드라이기로 머리 말려도 돼.”

“희정아, 뭐 먹을 거면 불 켜고 먹어. 여기까지 불빛 안 와.”


그렇게 나의 예민한 신경마저도 온순하게 만들어 주던, 희정이라는 사람.  




여름이 다가오며 아일랜드의 해는 길어졌고, 8월쯤에는 밤 10시가 될 때까지도 창밖이 환했다. 그 밤거리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더블린의 시내 한가운데서 시골의 정겨운 냄새를 맡곤 했다. 나와 희정이, 더블린에서 함께 좋아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 냄새였다.      


“어릴 때 말이야. 막 골목에서 놀고 있으면, 저녁에 이런 냄새가 났잖아.”

“맞아. 이거 딱 저녁밥 짓는 냄새 같지 않아?”

“그러게 말이야. 여기 사람들은 밥도 안 지을 텐데 왜 이런 냄새가 나나 몰라.”   

  

그렇게 맞장구를 치며 함께 걷던 더블린의 거리는 정말로 따뜻했다. 왜 진작 이곳으로 떠나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올 만큼. 지금이라도 이곳으로 떠나와서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될 만큼. 그 거리는 따뜻했고, 그래서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고, 그 기억의 한가운데 희정이 나와 함께 서 있다.  



희정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난 후에도, 우리는 거의 한 주에 한 번은 서로를 만났다. 단언컨대, 희정은 더블린에서 내가 찾아낸, 가장 소중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 해 가을, 나는 희정을 남겨놓고 그 집에서 먼저 이사를 나왔다. 결국 일자리를 구하는 데 실패한 내가, 늘 나의 ‘Last option’이라고 말하던 오페어 생활을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내가 희정에게,

     

“나 이사를 나가야 할 것 같아.”     


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딱히 서운함을 표하지는 않았다. 희정은 감정 표현이 많지 않기도 했고, 감정 그 자체에 나보다 조금 덜 예민한 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를 붙잡고, 너와 함께 이곳에서 지낸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에 대해 말해주는 대신 나는 그냥,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있잖아, 희정아. 내 인생에 나타나 줘서 고마워. 이렇게 불쑥 내 인생에 나타나서, 나의 동생이 되어줘서 정말로 고마워. 


이후 희정은 새로운 룸메이트와 지내게 되었고, 나는 호쓰에서 생활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함께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크리스마스엔 함께 여행을 갔고, 내년에는 또 무엇 무엇을 하자고 함께 계획을 세우곤 했다. 그리고 내가 호쓰에 갇혀 지낸 지 꼭 다섯 달이 지났을 때, 희정이 나를 다시 시티센터로 나올 수 있게끔 손을 내밀어준 것이다.           






*) 당연히 모든 어학원은 입학 당시 레벨 테스트를 치르고, 그 결과에 따라 반을 배정받는데 당시 내가 다니고 있던 어학원은 ‘Elementary, Pre-intermediate, Intermediate, Upper-intermediate, Advanced’ 다섯 개로 레벨로 반이 나누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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