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초연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실제 팀장님 앞에서 내 결심을 전하려니 쉽지 않았다. 나는 긴장을 숨기려고 손에 쥔 사직서를 괜히 꽉 쥐었다.
결코 꺼내기 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상사들은 입만 열면 "우린 인력이 부족하다"며 노래를 불렀다. 지난 5년 반 동안 그 호들갑을 하도 많이 들은 탓에, 과연 인력이 진짜로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모든 비효율적인 업무 처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종교적 신념인지 헷갈릴 지경이었지만 말이다.
전통적이고 권위 있는 연공서열 시스템에 따르면 나는 우리 부서에서 제법 중추적인 위치에 있었다. 부장과 팀장을 뺀 실무자 중에서 내가 입사순으로 서열 1위(?)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인력난'을 겪는 조직에서 중견급의 실무자가 떠난다고 하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기뻐하지 않을 것이 명백한 소식을 전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특히 나처럼 선량하고 다정다감하며 마음이 여린 사람에게는 더더욱.
퇴사를 하려는 이유가 뭐냐고? 거참 곤란한 질문이군
"그만둬? 왜... 왜?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에 놀라자빠진 감정을 애써 숨기면서 강지훈 팀장님이 되물었다.
그러나 나는 막상 '왜'냐고 물으니 할 말이 많지 않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왜 그만두려 하냐고? 쉽지 않은 질문이다. 내가 퇴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정말로 그냥 '이제는 직장인을 그만둬야겠다'라는 강한 느낌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 같은 것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팀장님의 질문에 대해서 "그냥요!"라고 대답하려고 온 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 바쁜 팀장님을 업무 시간에 진지한 표정으로 마주앉혀 놓고 이딴 식의 대답을 하는 건 심하게 너무한 짓이 아니겠는가. 나는 생각 없이 오기는 했지만 결코 장난을 치러 온 것은 아니었다.
나는 좀 더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퇴사 사유 스피치를 준비해 왔어야 했다는 사실을, 골때리지만 그제서야 깨달았다. 물론 이미 너무 늦었지만 말이다.
나는 우물쭈물 나는 입을 열었다.
"그냥... 제가 직장인이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직장인이 안 맞는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미처 의식하지 못했지만 우리의 회의실에서는 둘만의 잔치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무 말 대잔치' 말이다.
본격 대결! 서로서로 누가 더 '아무 말'을 잘할까
[제1탄] 지각하는 자는 직장인이 될 자격이 없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부터 아무렇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지각 문제였다. 정시에 출근하지 않는 그 지각 맞다.
"저 요즘 지각을 정말 많이 해요. 거의 매일 9시 1분이나 5분쯤 도착해요. 10월 이후로 정시 이전에 출근을 한 날이 다 합쳐서 10일도 안 될 거예요."
사실은 정시 출근을 한 날이 5일도 채 되지 않을 것이지만, 근태에 철저하신 강팀장님이 충격을 조금이라도 덜 받으시도록 나는 10일로 과장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팀장님은 충분히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놈이 어느 정도 지각을 하는 건 알았겠지만 이 정도로 노답이었을 줄은 모르셨을 것이다. (참고로 업무의 특성상, 팀장님과 나는 근무하는 사무실이 다르다.)
"저도 이게 잘못됐다는 걸 알아요. 근태는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요.
팀장님께서 어느 정도 눈 감아 주고 계신단 것도 알고요. 죄송하고 감사해서라도 지각을 하지 않으려고 많이 애썼어요. 그런데 도저히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이제 직장인을 할 수 없겠구나. 그만둬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나는 언젠가부터 평일 아침에 알람을 듣고도 결코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한 달 용돈의 대부분을 택시비로 쓰면서도 나는 이 습관을 고치려 들지 않았다. 돈을 사랑하기로는 이 구역 최고인 최알뜰, 최스크루지인 나에게 있어 그것은 크나큰 고민거리였다.
나는 아무리 해도 아침에 일어나려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 한동안 큰 자괴감과 무력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 원인 불명의 상습적 늦잠과 지각의 원인을 내면에서 치열하게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탐색의 결론이, 어느 날 "나는 이제 직장인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라는 영혼의 깨달음(?)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팀장님은 고작 그런 사소한, '정시에 출근할 수 없다'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퇴사'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당연한 일이다.
"아니, 그건 그냥 아침에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면 되는 거잖아. 5분, 10분만 더 일찍 일어나면 되지."
아무래도 나는 퇴사라는 거대하고 심각한 담론에 대한 첫 근거로, 너무도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았다. 그리고 5분이나 10분 일찍 일어나라는 그의 원론적인 조언 역시 얼토당토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예전 같으면 '아, 빨리 일어나야지, 빨리 나가야지. 빨리 뛰어야지.' 했을 거예요. 지각하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지각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아요.
직장인은 이러면 안 되죠. 그래서 이제 직장인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 말을 하면서 나는 스스로가 '직장인으로서의 결격 사유'를 일부러 만들어서 회사에서 쫓겨나기라도 하고 싶은 걸까 싶었다. 이렇게 기본 소양도 갖추지 못한 못난 나를 어서 내쫓아달라고, 직장인 자격 미달이라고 인정해 달라고, 떼를 쓰듯이.
이러나 저러나 속시원하지 않은 화법이다. 이 스토리 속에서는 내 삶의 주체도, 결정의 주체도 내가 아니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지각쟁이의 습관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패배주의적 논리가 지금 돌이켜 보니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차라리 "회사에 나오기가 너무 싫어서 아침에 일어나지도 않는 지경이다. 이렇게 싫은데 어떻게 더 다니겠느냐. 그냥 그만두겠다."라고 솔직하고 시원하게 얘기하는 게 훨씬 쿨했을 테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몹시 혼란스럽고 정신상태가 오락가락한 상태였으니 부디 그러려니 해 주기 바란다.
아무튼 왜 '5분, 10분 더 일찍 일어나는' 간단한 일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은 강팀장님은 한층 더 혼란에 빠진 얼굴이었다. 도대체 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치 '아침에 왜 안 일어난다는 거지? 자기가 안 일어나 놓고 왜 갑자기 회사를 그만둔다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고작 아침에 지각하는 것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말이 아닌가.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혼돈에 빠진 팀장님의 얼굴에 얼마간 슬픔을 느끼면서, 나는 다음 말을 이어갔다.
[넋두리] 과연 지각 이야기로 운을 떼야 했을까
이제서야 하는 생각이지만, '지각'처럼 지나치게 솔직하고 구질구질한, 그리고 누군가에겐 예민할 수 있는 이유 말고, 좀 더 근사하고 멋들어진 이유를 가장 먼저 말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역시나 너무 늦었지만.
다음 편에는 조금은 더 그럴듯한 퇴사 면담 내용을 담을 것이다. 예를 들면 업무에 대한 애착, 비전, 일의 가치와 의미, 업무를 통한 성장, 그리고 조직과 시스템에 대한 실망 등등... 그리고 다음 편에는 나보다 팀장님의 '아무 말'이 더 두드러질 것이다.
사실 아침잠이 많고 시간관념이 부족해 지각이 잦은 것은 나의 가장 크고 오래된 콤플렉스다. 어릴 때부터 이 때문에 워낙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욕을 많이 먹었고, 고치려고 온갖 짓을 다 해 봤으나 그다지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대표적인 ADHD의 증상이었다.)
그래도 취직하고 나서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죽을 용을 쓴 덕에 지난 세월 동안 지각은 그럭저럭 면해 왔건만. 직장에서 마음이 뜨니까 소싯적 지각대장의 소울이 다시 깨어났는지, 최근 내가 생각해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소소한(?) 지각이 잦아졌다.
이번 편을 다 쓰고 난 후에도 이런 노간지의 끝판왕인 지각 얘기는 통째로 빼 버리고, 간지나는 면담 내용만 담아서 발행할지를 많이 고민했다. 닉네임이 '멋진' 고먐미일 정도로, 나는 세상에 멋쟁이로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대한 솔직한 글을 쓰는 것이 내 목표였기 때문에, 그냥 이대로 두기로 했다. 혹시라도 어딘가에 나처럼 직장에 마음에 떠서 매일 지각하며 위축된 이가 있다면, 여기에 비슷한 부류의 인간이 또 한 명 존재했다는 사실에 조금이라도 위로를 얻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