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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진고먐미 Feb 04. 2024

눈물이 주룩주룩 퇴사 면담
─ 팀장님 편(4)

갑자기 아무 말 대잔치가 되어 버린 퇴사 면담 : 은행대출 편

[지난 편]



나는 더 이상 내 업무(교육)의 가치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무도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다고. 교육 담당자인 나조차도 "2023년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내용이 과연 필요할까?" 의구심이 드는데, 뻔뻔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이걸 들어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난처한 표정의 팀장님이 내놓은 대답은 "네 말은 사실이지만 우리 부서가 살아남으려면 이거라도 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었다. 그 대답을 들은 순간 내 머릿속에는 아래와 같은 문장들이 정리되었다.


'우리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도,
직업인으로서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는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이 일을 한다.
우리가 겉보기처럼 단순업무만 반복하는 멍청한 부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뭔가 근사해 보이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이 회사에 존재해도 괜찮다는 정당성을
입증하고 증명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한다.'


언제나 감성이 전진하고 이성이 후퇴하는 나로서는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명쾌한 정리였다!


비록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하도 어안이 벙벙하였던 탓에 나의 얼굴 근육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였다. 팀장님의 말씀을 경청하던 담담한 표정 그대로, 단지 눈가에 갑작스럽게 수도꼭지가 틀렸을 뿐이었다. 내 눈깔에서 눈물이 주르르륵 흘러내리는 꼴은 마치, 어떤 아침드라마의 '예나, 선정이 딸이에요'라는 대사를 들은 아저씨의 입가에서 주스가 주르르륵 흐르던 모습과 꼭 같았다.


그렇잖아도 부하직원의 갑작스러운 사표 공격만 해도 심리적 타격이 컸던 강지훈 팀장님은, 내가 눈물까지 내보이자 더더욱 동요하기 시작했다.






절정으로 치닫는 두 사람의 아무 말 대잔치

[제3탄] 세상에 자아실현을 하는 직장인이 어디 있나


가엾은 강팀장님은 내게 무슨 말이든 해 줘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에서 자아실현,
그런 거 하는 직장인이 어딨겠니.
다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일, 시키는 일 하고...
그러면서 월급 받고, 자식 먹여살리고, 그러면서 사는 거 아니겠니.

직장생활이 원래 다 그런 거지...
생각을 하면 안 돼. 그냥 할 일을 하는 거야."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나를 위로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원래 직장은 그런 거라고, 너무 생각을 많이 해서는 안 된다고.


그의 어조는 진지했고, 표정은 슬펐으며, 눈동자는 공허했다. 어쩌면 강지훈(43세, 직장인)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그의 따뜻한 마음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하지만 나를 이 직장에 계속 붙잡아놓고 싶었다면, 그는 그런 말들만큼은 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말을 들으면서 했던 생각은 정확히 아래와 같았기 때문이다.


'오, 맞아요! 바로 그겁니다. 예, 바로 그거예요!
공교롭게도 저는 정확히 그렇게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직장인을 그만두겠다고 마음 먹었답니다!'


나는 이 상황이 오히려 기쁘고 웃기기까지 했다. '이것 봐,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역시 그만두는 게 맞는 거야.'


이딴 고민에 대해 그럴듯한 답을 얻기는 글러먹었다는 걸 영특하게 파악한 나는, 대화를 성급히 다른 테마로 대화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해묵은 허영미 부장과의 갈등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제4탄] 나 최멋고는 관료제에 실망했다, 저런 놈에게 권력을 부여하다니


"제가 작년에 허영미 부장님이랑 싸웠을 때 말이에요."


'아, 드디어 본론인가' 하는 표정으로 팀장님은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줄곧 뜬구름 같은 소리만 늘어놓더니만 이번 이야기는 좀 들을 만하겠다고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그래, 역시 부장 때문에 그만둔다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부장님한테 제가 화가 많이 났었죠. 부장님 한 명이 모든 업무분장과 조직의 체계를 다 일그러뜨린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 업무분장 그런 거 없이 그냥 자기 편한 사람한테 일을 막 시키는 분이니까."


허부장님에게 나보다 훨씬 오랫동안, 훨씬 많이 시달려 왔던 강팀장님은 한숨을 쉬며 공감했다.


"게다가 막내였던 양지혜 선생님을 만만하다는 이유로 입사 직후부터 엄청나게 괴롭혔죠."


팀장님은 '원래 막내는 고생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허부장이 양지혜 선생을 심하게 괴롭혔다는 사실은 인정하는 듯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너무 화가 났고 부장님이 미웠어요. 부장님을 바꿔야 이 조직이 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생각해도 무례할 정도로 부장님에게 쏘아붙였죠. 그런데, 부장님은 전혀 바뀌지 않더라고요."


"부장님을 바꿀 수 있나? 그 사람은 절대 안 바뀌어."


팀장님이 빈정댔다.


"맞아요, 그땐 몰랐지만 이젠 알아요. 제가 절대 남을 바꿀 수는 없다는 걸요. 그래서 부장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올해는 작년과 달리 부장님 때문에 화나는 일도 많이 없었죠."


순간 '아예 없진 않았지만요.' 하는 생각이 든 나머지,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한때 저 사람만 없으면 일이 훨씬 효율적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했는데요. 잘 생각해 보니까, 제가 단단히 헛다리 짚은 거였더라고요."


목소리가 갈라진 나는 잠시 목을 축였다. 팀장님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문제는 허영미 부장님이 아니었어요.
단지 연차가 쌓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사람에게 그 정도의 권력을 부여한 시스템이 문제였고,
그 시스템에 저항하는 제가 문제였죠."


말하자면 우리 회사는 관료제에 따라 운영되었고, 허영미 부장은 그 연공서열 시스템이 합법적으로 부여한 권한을 마음껏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일을 잘하든 못하든, 실무자들을 존중하든 하지 않든,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의 결재를 받아야만 하도록 설계된 시스템 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까맣게도 모른 채 눈앞에 보이는 가엾은 허영미 부장만 두들겨패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 일 좀 똑바로 하라고.


하지만 회사는 말할 것이다, 너야말로 우리 회사가 돌아가는 시스템을 똑바로 보라고. 원래부터 너는 저 사람의 수하에 있도록 고용된 것이라고. 저 사람의 업무 지시를 듣는 것이 너의 역할이라고.


"시스템이 그렇게 짜여 있는데 제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었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저는 이 시스템이 안 맞는 거 같아요. 저를 바꾸고 버리면서까지 이 시스템에 들어맞으려고 애쓰고 싶진 않아요."


빈 컵을 쓸데없이 만지작거리며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저는 직장인은 더 이상 못 할 것 같아요."






[제5탄] 이게 다 갚아야 할 빚이 없으니 하는 경거망동이야


내 말을 다 들은 팀장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한숨을 연거푸 내쉬고 겨우 한 마디를 쥐어짜냈다.


"교육 말고 다른 업무를 해 보고 싶은 건 없니?"

"네, 이 직업이나 직장인 신분 자체에 회의감이 들어서요. 다른 업무를 해도 마찬가지일 거 같아요."


(실제로는 사양산업이 되어 버린 이 직업과 업종에 관한 대화도 길게 이어졌지만 글에서는 생략한다.)


장벽이나 다름없는 나의 태도에 손쓸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는 듯, 강팀장님은 낮게 읊조렸다.


"...차라리, 네가 이직을 한다고 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마음이 복잡하진 않았을 것 같다."


마침 불과 반년 전에도 이직자가 있었다. 똑똑하고 일 잘하던 진연아 선생님이 입사 2년 만에 다른 곳으로 떠났던 것이다. 연아쌤은 줄곧 무능한 허영미 부장의 행태, 그리고 후배들 말을 들어주는 척하다가도 결국 부장 편을 드는 팀장들, 이곳의 패배주의적인 분위기에 분노하고 분노하다 결국 능력을 살려 훨씬 좋은 곳으로 가 버렸다.


'평생 직장'으로만 여겨지던 이곳에서 이직자가 나오니 선배들은 상당히 충격을 받았더랬지. 젊은이들은 진심으로 축하했었고. 이직 얘기가 나오니 연아쌤이 보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 나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갑자기 팀장님이 밑도 끝도 없이,


"너는 집 안 사니?"


하는 것이었다. 이 맥락에서 웬 뜬금없이 집 이야기람. "네? 집이요?" 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는 이게 다 네가 빚이 없어서 하는 생각인 것 같아."

"네?"

"다달이 갚을 빚이 있으면 이런 생각 못할 텐데. 요즘 부동산도 많이 내렸는데 빚을 내서 집을 좀 사 봐."


이게 도대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야? 우리 강지훈이, 드디어 스트레스 과부하로 고장이 나 버리고 만 것이야?


"네에에? 진심이세요?"


문자 그대로 '아무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소리에 나는 그만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큰 웃음은 건강에도 좋고 인간을 행복하게 하므로 언제고 마다할 일은 아니다.


"진심이지, 그럼! 원래 빚내서 차부터 사고 집부터 사야 이런 허튼 생각을 안 하는 거야."


팀장님의 얼굴은 한사코 무표정하고 진지했기에 나는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게 아닌데. 엄격하고 진지하고 근엄한 분위기 속에서 사직서를 딱, 던지고 일어서야 그림이 사는데. 웃음은 언제나 분위기를 말랑말랑하게 누그러뜨리고 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피차 상처와 피로만 남은 퇴사 면담


"아무튼 간에 나는 절대, 절대로 허락 못해. 그, 손에 쥔 그 종이는 뭐야? 사직서야?"


나는 뻘쭘한 표정으로 고이 접은 사직서를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생각해 봐. 물론 이미 많이 생각했겠지만. 일 쳐내라고 내가 뭐라 안 할 테니까, 그냥 앉아서 월급이나 몇 달 더 받으면서, 조금만 더 생각해 봐."


어? 일을 안 해도 된다고? 이렇게 솔깃할 수가. 그럼 그냥 회사에서 가마니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된다는 건가? 괜찮은데?


교활하고도 순진한 나는 그 제안에 순간 군침이 싹 돌았다. 예상보다 오래 걸린 면담에 지친 나머지 제정신이 아니긴 했던 모양이다. 설마 그렇게 땡보처럼 앉아서 돈만 챙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가뜩이나 사람도 없는데 지금 네가 나가면 나랑 차팀장 죽는다. 네가 중간에서 무게를 잡아 줘야지. "


나와 마찬가지로 지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팀장님의 휴대폰이 때마침 울렸다.


그는 문자 알림을 확인하더니, "아, 처장님 오셨다네. 나 결재 받으러 가야 된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아무튼 간에 안 된다! 퇴사하지 마라!"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는, 마치 처장님이 구원자라도 되는 듯이 회의실을 바람처럼 빠져나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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