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은 소개팅처럼
인천 공항에서 캐리어를 끌고 만난 친구의 얼굴은 묘했다. 정말 묘하다는 표현이 정확한 표정이었다. 빠르게 출국 수속을 마치고 한국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위해 방문한 인천공항 푸드코트에서 묘한 표정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술이 아니라 순두부 찌개와 함께하는 면접 후기라니.
일단 임원 면접 답게 고위직급이 면접에 들어왔는데, 사기업에서 버티어 임원까지 올라간 사람 답게 일단 기가 매우 강했다고 했다. 그러나 3주간의 면접 준비는 절대 배신하지 않으리라. 친구는 임원의 질문에 차분하게 하나씩 대답해나갔다고 했다. 준비도 오래했고 신입도 아니었으며 '내가 이 회사에 뼈를 묻겠다'는 태도까지 뭐가 문제인가 싶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문제는 친구가 아니었다.
면접은 회사가 나를 선택하는 과정이자 내가 회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잘 맞는지를 확인하는 일종의 '소개팅'인데, 만약 한 쪽이 너무 무례하다면 그 소개팅은 절대 성공하기 어렵다. 그리고 친구의 면접은 정확히 이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대답을 하면 'ㅎ그거 아닌데' 식의 비꼬는 듯한 태도, 지속적인 경력에 대한 의심성 질문, 너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봐주는거다'라는 고압적인 태도는 면접자의 멘탈과 회사에 대한 호감도를 저 세상으로 날려버렸다. 이렇게 면접이 끝났으니 오랫동안 기대하고 준비해왔던 친구의 표정은 묘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야, 면까몰이니까 우리 기다려보자"라는 청춘물 스타일의 멘트와 함께 우리의 해외여행이 시작되었다.
*면까몰 : 면접은 까보기 전에 모른다
유과랑은 워낙 해외여행 자체를 같이 많이 다니기도 했고, 미국 유학에 해외 출장업무 경험도 있는 친구인지라 여행은 매우 스무스하게 진행되었다.
염소와 함께 둘러보는 베트남 '호치민'
동양의 파리(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역사가 있다)라는 별명이 너무나 잘어울리기도 했지만, 경제문화의 중심지답게 화려하면서도 베트남스러운 모습은 여행의 설렘을 한껏 끌어올렸다.
같은 콘텐츠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 둘은 '박물관/미술관' 투어를 정말 좋아하는데 (이래저래 둘이 여행스타일이 잘 맞는 편) 호치민에서도 시립미술관과 전쟁기념관을 들렸더랬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가 있기에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고통이나 아픔을 엿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웬 걸?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았고 내 또래 친구들은 깊이 알지 못하는 베트남 전쟁의 비극에 대한 내용이 작품들에 녹아있었다.
대다수 미술작품의 주제도 전쟁의 비극이었고, 특히 전쟁기념관에서는 고엽제의 피해 등을 정말-정말-정말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어린이, 노약자, 심약자는 추천하지 않는다.) 나한테는 가수 김추자님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로만 인식되고 있었던 베트남 전쟁이 남긴 상흔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계기가 되었고 한국에 돌아가서 더 자세히 공부해보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대망의 무이네! 생애 첫 일출을 베트남에서 보았다. 오토바이도 재밌고 일출도 너무너무 예쁘니까, 새벽에 일어나는거 하루만 감수하시고 꼭 가보시길!
역시 여행의 핵심은 맛집과 술, 맛집에서 맥주 정말 많이 마시고 왔더랬지. 우리가 느낀 하노이는 부산과 서울이 합쳐진 느낌이었달까? 베트남 느낌이 물씬 나는 노상식당도 많지만, 루프탑 바나 1군에 대사관 거리를 가보는 것도 추천한다. 마치 연남동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외국인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베트남과 유럽의 문화가 합쳐진 분위기가 나기도 했고 거대하고 특이한 카페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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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여행 시점이 나는 백수가 된지 한 달도 안됐을 때였기에 아무 생각없이 재밌게 놀기만 했는데, 친구의 시선은 중간중간 핸드폰으로 가곤 했었다. 노력한 만큼 애타는 마음이 이해도 가고 저러다 친구 멘탈 다 갈리겠다 싶은 생각에 차라리 빠르게 결과가 나왔으면 나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여행 중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친구는 한국에 돌아가서 한 번의 결과 지연 통보를 겪고 2주를 기다리고 나서야 최종 불합격 통보를 받을 수 있었다.
3달을 피말리게 기다린 것에 대한 결과로는 너무 잔인했다. 취업도 인연이려니 더 좋은 회사가 나타날거라고 위로를 하는 것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기에, 더 좋은 회사에 취업할 수 있길 간절히 빌었다. 사실 이 시기에 겪은 친구의 불안하고 이상한 마음을 내가 깊이 이해하게 된 건 먼 훗날의 일이었다. 평행이론 팔자답게 비슷한 일을 겪었지.. (유과의 취업기는 다음에 다시 이어집니다.)
우리의 아홉수가 지난하고 고단할거라는 플래그였나 싶은데 둘 중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저출산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과 다르게 베트남은 정말 젊은 사람도 아이도 많았다. 문득, 유튜브에서 90년대 영상을 보면 이런 느낌이었는데 싶게 활기찼다. 어딜가든 젊은 사람이 많아 재밌었다는 어른들의 90년대 회고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 그 즐거운 기분을 베트남에서 잠깐이나마 느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이렇게 베트남과 나의 인연은 마무리되나 싶었지만 그 다음 여행도 베트남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도 쉬면서 해외를 2번이나 다녀오다니, 성공한 휴식이다.
티저 : 나 혼자 산다 '팜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