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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마 Nov 16. 2019

백척간두

 백척간두. 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 올라섰다는 뜻으로, 위태로움이 극도에 달함.      


 어릴 적 ‘백척간두’를 사전에서 찾아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 내가 상상했던 의미와는 딴판이어서다. 아직까지도 나는 백척간두, 라고 소리 내어 읽으면 우악스러이 무언가를 잡고 놓지 않는 손아귀 힘이 느껴진다. 연속되는 기역 받침 때문인지, ‘척’이라는 글자에서 ‘ㅊ’의 파찰음을 내기 위해 올라붙는 혀 때문인지, 아니면 둘 모두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에게 백척간두는 다소 억척스럽고 굳센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억척스럽다’는 아이 있는 아줌마들을 위한 전용 단어라고 생각될만큼 ‘아줌마’라는 말에 자주 따라붙는다. 그러나 25년째 아줌마인 우리 엄마는 25년 내내 전혀 억척스럽지 못한 사람이었다. 여린 구석이 있어 모질지 못했고 쉬이 울고 웃었다. 엄마는 내가 중학생 때 처음으로 운전을 배웠는데, 운전 초보 시절에는 ‘나 이거 못하겠어’ 하며 도로 한복판에서 펑펑 울어버리는 일도 왕왕 있었다. 그러면 나는 조수석에 앉아 한숨을 한 번 깊게 내쉬고 그런 엄마를 살살 달래가며 갓길에 주차를 시켰다.      


 나는 어려서 그런 엄마의 모습이 싫었다. 엄마는 아버지와 다투거나 일에서 험한 말을 들으면 내 앞에서 잘 울었는데, 나는 그러면 그 앞에서 멀뚱히 앉아 그녀를 다독거려야 했다. 덕분에 타인에게 소위 ‘적절하게’ 위로하는 법, 다시 말해 내 심력을 너무 소모하지 않고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말을 짐작하는 법을 일찍 깨쳤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엄마와 내 자리가 바뀌어있다는 느낌, 그리하여 내가 어린 아이로서, 아니 딸로서 누려야 할 무언가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억울함은 가시지를 않았다.       


 중학교 2학년 까지만 해도, 나는 설핏 드는 억울함을 잘 갈무리해가며 엄마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엄마에게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이 닥치기 전까지는. 중학교 2학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차선을 못 바꾸겠다며 울던 사람이 그 과정을 겪으면서는 어떠했을지 말하지 않아도 상상이 가리라 믿는다. 그리고 아마 그 상상보다 현실이 더 끔찍했으리라는 것도. 나와 엄마는 각자 긴 터널을 걸었다. 내 터널은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아이’로서의 터널이 아니라 ‘사별을 겪은 여자의 딸’의 그것에 가까웠다. 나는 더 이상 엄마를 ‘살살 달래지’ 못했고, 어느 순간 그러려는 노력조차 포기했다. 어느 순간 나는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는 대신 ‘어머니’ 라고 불렀고, 그녀가 울먹거리기 시작할 때면 ‘니’자를 짧게 잘라 부르며 대화를 끊었다.      


 그래서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그 집, 아니 정확히는 엄마에게서 탈출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부풀었다. 매일 새벽같이 집을 떠나 온종일을 학교에서 지냈고 밤이 이슥해서야 도둑고양이처럼 슬그머니 집을 찾았다. 엄마와 내 생일을 붙인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면 엄마는 신발장 앞에 서서 나를 반겼다. 어이구, 우리 딸 공부하느라 고생했어, 많이 바쁘지? 엄마가 부추 계란말이 해놨어, 좀 먹어봐, 응?     


 매일 문을 열면 엄마가 현관에 나와 있었다. 아마 내 발자국 소리를 알아듣고 방에서 나와 기다렸을 테다. 내가 대학에 붙기 전, 난 엄마 발걸음 소리를 알았다. 엄마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 머리가 그걸 구분하기도 전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는 그 내려앉은 심장을 먼저 느꼈고, 그 내려앉음 탓에 그 소리가 엄마 발걸음인 줄을 알았다. 아마 엄마도 그렇게 내 발걸음을 알았을 테다. 주인 기다린 강아지처럼 마음이 살랑이고, 그 살랑임을 보고 내 발걸음인 줄 알았을 거다. 나는 엄마의 그런 감정의 골을 샅샅이 알았다. 나는 엄마의 얼굴만 보고도 엄마가 하루 종일 집 밖에 나가지 않았고, 그래서 나한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할 시간을 온종일 기다렸다는 것을 알았다. 20여년동안 엄마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런 것쯤은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졌다.      


 나는 엄마한테 “응, 바빴어”, “피곤해”, “주말에 얘기하자”, 하고는 방에 들어갔다. 주말에는 과외를 뛰고는 밤에 들어와 “피곤해”, “평일에 얘기하자”고 했다. 나는 나의 ‘모른 척’을 열심히 방어했다. 나는 전액장학금을 받았고, 내 생활비를 벌면서 엄마한테 매달 10, 20만원씩 용돈을 부쳤다. 그 정도면 20대 초반치고는 꽤 남부끄럽지 않은 딸이라 여겼다.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 주, 친구들과 술을 한 잔 했다. 술을 잘 못 하는데도 오랜만의 자리가 흥겨웠다. 막차를 타고 집에 들어가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살짝 초점 풀린 눈으로 카카오톡을 확인했다. 잘 들어가~ 하는 친구의 메시지였다. 피식 웃다가 손이 미끄러져서 카톡방 창이 친구 목록으로 넘어갔다. 거기에 ‘생일인 친구’가 떠 있었다. ‘어머니’. 아, 엄마 생일이었다.      


 생일날에 맛있는 저녁을 먹자고, 학교 근처에 맛있는 파스타 집이 있다고, 내 월급으로 쏜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그랬더니 엄마는 아니라며 학식을 사달라고 했다. 대학교 학식 먹어보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뭐라고 사들고 가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러나 시간이 시간인지라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술 냄새를 풍기며, 뛰어다니느라 땀으로 범벅한 패잔병의 몰골로 새벽 2시에 집에 들어갔다. 엄마 생일이 끝나고도 2시간 후였다. 문을 여니 엄마가 현관에 나와 있었다. 눈물을 흘린 얼굴과 오랜 시간 동안 꺽꺽거리며 운 얼굴은 다르다. 엄마는 후자의 얼굴을 하고 파리한 입술로 우리 딸 왔어, 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하트 모양 케이스를 꺼냈다. 페로로 로쉐 9개가 들어 있는, 철 지난 발렌타인데이용 포장이었다. 집 앞 편의점에서 겨우 집어 온 선물이었다. 반딱반딱한 금박 케이스가 싸구려 티를 팍팍 냈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놨다. 오늘 학회 회식이었는데, 내가 학회장이라서 빠질 수도 없고, 상황이 좀 난감해서, 미안해, 엄마,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엄마가 웃었다. 울음자국을 고스란히 갖고 하나도 울지 않은 사람처럼 웃었다. “응, 딸, 고마워”, 하고 그 자리에서 하나를 까 입에 넣었다. “너무 맛있다” 하고는 또 한 번 웃었다.      


 ‘백척간두’라는 말을 읽으면 그 얼굴이 생각난다. 보통 사람은 불편해하고 말 일에 절망하고 통곡하는 우리 엄마가 그토록 굴곡 많은 삶을 살아 왔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 선물에까지 환히 웃어내는 마음을 지키며 결핍밖에 없는 삶을 사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지, 또 얼마나 억척스러운 일인지. 장대 끝을 쥐고 손 마디마디가 하얘질 때까지 그 곳을 버티어 내는 엄마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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