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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마 Nov 17. 2019

풀과 바람이 많던 코스모스 꽃밭

[게임 규칙]

1. 2인용 게임이다.

2. 빨간 난쟁이 말과 초록 꺽다리 말이 경주한다.

3. 자신의 턴이 돌아오면 손에 쥔 네 카드 중 하나를 버린다. 버린 카드에 쓰여져 있는 수만큼 전진한다. 새로운 카드를 하나 뽑고 나면 턴이 상대방에게 넘어간다.

4. 함께 결승선에 들어갈 경우 새로운 보드게임으로 연장전이 치러진다. 혼자 결승선에 들어가면 게임은 끝난다.      


 빨강 난쟁이는 몇 번이고 카드를 헤아렸다. 손에 쥔 건 1, 2, 3, 4. 그 중 어떤 카드를 내도 게임은 끝났다. 마지막 칸, <풀과 바람이 많은 코스모스 꽃밭> 너머로 결승선이 보였다. 장장 3년을 달려 온 레이스의 끝이라기에는 초라한 엔딩이었다. 난쟁이는 다시금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아냐, 아직은 아닌 것 같애. 난쟁이는 꽃무덤 위에 덜걱 앉아버렸다. -5 같은 카드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아냐 -3, -1이라도. 그러면 이 길을 돌아가서 초록색 꺽다리를 만날 수 있을텐데. 하지만 기다린다고 없던 카드가 생길 리 없었다. 그 자리에 꿈쩍 않고 앉아있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구름이 느리게 흐르고, 가끔 조롱박이가 휘파람을 불었다. 난쟁이는 가끔 뒤를 돌아보았으나, 초록색 꺽다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를 뒤쫓아 오지 않을까. 와서 미안하다고, 우리 함께 결승선을 넘자고 이야기해주지 않을까. 난쟁이는 풀이 흔들릴 적마다, 바람이 불 적마다, 꺽다리에게서 나던 코스모스 향이 날 적마다 그가 나타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꺽다리는 나타나지 않았고, 난쟁이는 <풀과 바람이 많은 코스모스 꽃밭>에 앉아 실망과 기대를 반복했다.      


 사실 난쟁이는 일부러 <풀과 바람이 많은 코스모스 꽃밭>에 앉아 있었다. 많이 기대하고, 빨리 실망하고 싶었다. 실망의 필요량을 채워야만 이 카드들을 털고 결승선으로 나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실망과 기대를 남겨두고 나아가기에는, 꺽다리에 대한 기억들이 너무 많았다. 출발점에 같이 나란히 서 있던 날부터 다투어 높은 숫자를 내며 함께 달리던 날까지. 그 때는 우리가 함께 이 결승선 앞에 설 거라고 생각했다. 함께 이 게임을 끝내고 새로운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반환점을 돌고 나자 변했다. 난쟁이는 4를 내고 저만치 뛰어갔지만, 꺽다리는 자꾸 1을 내며 꾸물쩍거렸다. 곧 둘 사이의 거리는 둘 사이의 키 차이만큼이나 멀어졌다. 난쟁이가 꺽다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악어가 사는 호숫가 옆>이었다.      


 “너 왜 요즘 계속 1을 내는 거야? 같이 도착점까지 뛰어가자고 했잖아.”


난쟁이의 추궁에 꺽다리는 입을 열었다.      


 “네 도착점이 내 도착점일까? 어쩌면 내 도착점은 다른 곳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난쟁이는 꺽다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언뜻 달빛이 비친 꺽다리의 얼굴이 서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하는 신음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건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였다.      


 “난쟁아, 넌 너무 작고 난 너무 커.”


 “그래도 우리 잘 해왔잖아. 내가 조금 더 열심히 달렸고, 너는 조금 더 천천히 걸었잖아. 그러면 된 거 아냐?”


 꺽다리는 난쟁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더 이상 그러고 싶을 만큼 널 사랑하지 않아, 난쟁아.”     


난쟁이는 악어가 달빛을 먹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까맣게 내려앉아서 꺽다리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끔. 하지만 악어는 달빛을 먹을 수 없었고, 난쟁이는 꺽다리의 얼굴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4 카드를 내고 그 칸에서 도망쳤다.      



 순서가 꺽다리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두어 시간이 걸렸다. 난쟁이는 도망치는 데 자신의 턴을 소모했다. 꺽다리가 자신을 뒤따라오지 않는 이상 다시 그의 손을 잡을 일은 없었다. 그녀는 세달 간, 1카드만 내며 천천히 전진했다. 수도 없이 뒤를 돌아보았고, 수도 없이 실망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마지막 칸에 와 있었다.          


 코스모스가 넘실댔다. 코스모스를 내밀며 고백하던 꺽다리가 떠올랐다. 긴장해서 덜덜 떨리는 손과, 필사적인 눈과, 그 뒤를 따른 밝은 미소. 그 미소가 꽃밭보다도 어여쁘던 시절이 있었다.      


 난쟁이는 다시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미련과 집착으로 구질구질해진 카드들이 보였다. 처음 경주를 시작할 때 카드는 아주 깨끗했다. 그 때 난쟁이와 꺽다리는 카드를 들고 고민하지 않았다. 사실 카드가 중요하지도 않았다. 손을 잡고 걷다가, 카드를 제시할 때가 되면 그제서야 주머니를 뒤져 빳빳한 카드들 중 숫자가 제일 높은 것을 골라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카드를 붙잡고 상대 몰래 고민하는 일이 늘었다. 꺽다리는 숫자를 고민했고, 난쟁이는 카드를 보면서 꺽다리의 심중을 고민했다. 무서워서 직접 묻지도 못하면서, 카드만 만지작거리며 예감하는 것들을 애써 부정했다. 그러는 사이 카드는 손때를 탔다. 귀퉁이가 구겨져 종이가 몇 겹으로 갈라졌다. 아, 카드도 종이였구나. 코팅되어 말끔한 줄만 알던 카드도, 사실 젖고 찢어지고 구겨지는 종이였구나. 난쟁이는 생각했다. 

     


 난쟁이는 왈칵 서러워져 안으로 말린 귀퉁이의 종이를 더듬어 폈다. 손을 떼자마자 종이는 원래대로 도르르 말렸다. 난쟁이는 다시 귀퉁이를 폈다. 이번에는 편 채로 손바닥 사이에 넣어 오래도록 다림질을 했다. 그리고 손을 뗐다.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하자 종이는 조금씩 펴졌다. 안쪽으로 말리는 대신 예전에 그 사각 귀퉁이의 모양새가 살아났다. 난쟁이는 손 쓸리는 것은 개의치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마침내 귀퉁이가 온전히 펴졌을 때, 난쟁이는 그 카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펴진 귀퉁이에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남아 있었다. 난쟁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해야 그 주름을 없앨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은 그럴 수 없음을 알았다. 


 난쟁이는 헤진 카드들을 조금 쓰다듬었다. 이제 그 카드를 손에서 놓을 때가 됐음을 알 것 같았다. 게임은 2인용이지만, 그렇다고 혼자 게임을 끝낼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손에는 카드가 남았고, 걸어갈 수 있는 발이 있었다. 난쟁이는 눈물을 닦고 일어서 코스모스 꽃밭을 돌아봤다. 아름다웠다. 좋은 풍경이었다고 난쟁이는 생각했다. 새로운 풍경을 찾아볼 시간이었다. 난쟁이는 카드 4를 버렸다. 그리고 걸음을 옮겨 결승선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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