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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마 Sep 18. 2017

안녕, 달토끼야

 “넌 네가 순수문학 하는 앤줄 아니?”


 종이더미가 책상 위에 와르르 무너진다. 높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여기 신춘문예 아니고 잡지사야, 응? 팔리는 글을 써야지 이따위 걸 누가 읽니?”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고치겠습니다. 어질러진 종이들을 주워 유리문을 열고 나온다. 실적 좋은 동기가 밉게 흘끔거린다.  


 C급 잡지사에는 C급 잡지사에 어울리는 글이 있다. 주말드라마 줄거리 예측, 모 남배우의 사생활, 속궁합 기사 같은 것들. 지방대 나온 서른 두 살 여자면 현실을 깨달을 법도 한데 아직도 나는 글 쓰겠다고 뻗대던 스물 여덟살에 남아있다. 꿈은 페라리만큼 유지 비용이 많이 든다. 그걸 빨리 깨달은 저 동기가 요즘은 진심으로 부럽다.


 책상에 종이더미를 내려놓고 잠시 내려다본다. 수정해야 하는데, 아, 모르겠다. 왼손이 덜렁 가방을 집어 든다. 넌 퇴근할 때 제일 예뻐, 광고 카피를 흥얼거리며 사무실을 나선다. 될 대로 되라지.  


 평범하게 고되고 비참한 하루였다. 집 앞에 서 있는 네가 아니었다면. 밝은 달빛 아래로 네 실루엣이 빛난다. 너, 대체 왜 여깄니. 6년만에 보는 네가 졸린 눈을 하고 코를 찡긋댔다. 안녕, 오랜만이야- 하고 인사하듯이. 콧잔등이 시큰했다. 내 하얗고, 커다란, 토끼.


 너를 처음 본 것은 15년 전, 고등학생 때였다. 진로 상담시간에 별 생각 없이 창밖을 내다봤다가 식겁했었지. 집채만한 토끼가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대학교 입결이니, 취업률이니 하는 소리가 저 멀리 사라질 만큼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모두 똑같은 칠판을 바라봐야 하는 이 교실에서 나만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것 같았다. 너도 나도 토끼굴에 빠지기에는 너무 많이 자랐지만.


 아무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아무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아, 나만 보이는구나. 내가 미친건가. 팔을 꼬집는 내가 웃기다는 듯이 졸린 눈으로 햇빛을 쬐던 너. 그 새하얀 털. 훅 불면 날아갈 민들레가 떠올랐다.


 사실 네가 진짠지, 내가 미친 건지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앨리스의 토끼굴이 필요했다. 미친 모자장수이나 체셔 고양이쯤 되면 나한테 작가가 되어도 된다고 이야기해주지 않을까. 내가 재능이 없어도, 취업준비를 하지 않아도, 열심히만 하면 언젠가 작가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해주지 않을까. 너는 아무 말도 없이 해가 저물과 별이 뜰 때까지 운동장에 그렇게 앉아 있었다.


 내가 학교를 나오자 넌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깡총, 깡총, 뛰어가는 너를 죽어라고 따라갔다. 세상에, ‘깡총’이라는 수식어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줄은 처음 알았지. 헉헉대며 뛰어간 그 곳에는, 아, 노란 달맞이 꽃이 가득 핀 동산이 있었다. 밝게 뜬 달 아래 환하게 핀 달맞이 꽃. 그 가운데 네가 앉아 있었다. 넌 달토끼였구나. 안녕, 달토끼야.


 고등학교 3년 내내 넌 불쑥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난 달맞이꽃 동산에서 3년 내내 글을 썼다. 그 곳은 너무도 딴 세상 같아서 ‘작가가 되겠다’는 꿈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세상에 달토끼도 있는데, 작가가 꿈인 여고생도 있으면 좀 어때. 문창과를 들어가겠다며 시위하다가 쫓겨난 그 날도 난 달맞이꽃 동산에 갔다. 나는 많은 것을 물었지만 너는 언제나 그렇듯이 졸린 눈만 깜빡였지. 그래도 네 털이 보드라워 난 네 옆에 웅크리고 단 잠을 잤다. 결국 부모님께 허락을 받아낼 때까지.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너는 점차 뜸하게 찾아왔다. 결국 신춘문예에 3번째 낙방하던 26살 밤을 마지막으로 넌 자취를 감췄다. 어쩌면 글을 계속 쓰면 네가 올 거라고 생각하며 2년 하고도 두달을 더 펜을 붙들고 있었지만, 넌 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네가 없어지니까 달맞이꽃 동산도 갈 수가 없더라. 그래서 책상에서 글을 써야 했어. 책상도, 의자도, 참 각지고 딱딱하더라. 그래서 참 슬펐어.


 그리고 6년 만에 네가 왔어. 이렇게 힘들고 지치는 날에.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나른한 눈, 보드라운 털, 찡긋거리는 코. 마음이 먹먹해져 한참을 가만히 있으니 앉아있던 몸을 일으킨다. 넌 아무말 없이 빨리도 멀어져간다. 깡총, 깡총깡총, 깡총깡총깡총. 아, 그때 넌 날 참 많이 기다려줬구나.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속도다.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달맞이꽃 동산도 가보고 싶었는데. 고개를 돌려 집에 돌아가려는 순간, 네가 앉아있던 자리 옆에 작은 꽃이 하나 보인다. 달맞이 꽃이다.


 근처 꽃집에서 화분과 모종삽을 사와 달맞이 꽃을 옮긴다. 창가 옆, 달빛을 받게 놓아야지. 그리고 가끔 달맞이 동산을 생각해야지. 내가 이제는 그 동산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겠지. 가려고 노력은 많이 해봤으니까 괜찮아. 이 화분으로 족해. 집에 가서 달맞이꽃을 옆에 두고 오랜만에 일기를 써야겠다. 한 송이나마 예쁘게, 가꿔야지. 그러면 언젠가 나만의 동산이 생길지도 모르지.


 조금 쓰라렸고 조금 시원했다. 화분을 들고 돌아가는 발걸음이 아까보다는 가벼웠다. 인사해줘서, 달맞이꽃을 남겨줘서 고마웠어. 안녕, 달토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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