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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 겨울 Feb 08. 2019

타인의 진심을 느끼다

위로의 맛, 보쌈 정식

결혼기념일이 있던 주간에 동네에 새로 생긴 솥밥집에서 외식을 했다. 솥밥과 함께 보쌈도 작은 걸로 하나 주문했다. 집에서 보쌈을 만들 땐 식구들이 비계를 좋아하지 않아서 주로 살코기로만 되어 있는 사태를 썼는데, 삼겹살로 만든 보쌈을 살코기만 잘라서 먹으니 훨씬 맛이 좋았다. 하지만 저렴한 가격만큼 양이 너무 적었다.

딸아이가 손도 대지 않은 솥밥도 잊은 채 보쌈을 더 시켜 달라고 졸랐다. 남편도 얼마 먹지 못했는지 아쉬워했다. 그래도 고기를 추가하면 솥밥을 못 먹게 될 게 뻔해 집에서 푸짐하게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겠다며 딸을 겨우 달랬다.


마늘 볶음을 곁들인 삼겹살 보쌈

며칠 후 약속대로 신선한 통삼겹살 두 덩이를 구입했다. 두툼한 통삼겹살을 비계 부위가 옆으로 가도록 해서 두꺼운 냄비에 넣고, 물, 통후추, 양파, 대파, 마늘, 생강가루, 청주, 고추씨, 조선간장과 콜라를 조금 넣고는 두 시간 동안 삶았다. 생강가루는 생강을 늘 구비해두기 어려워서 말린 뒤 갈아놓은 것이다. 고추씨는 특유의 향과 칼칼한 맛이 돼지의 냄새를 잡아주기 때문에 사용하였다. 돼지고기를 삶을 때 보통 된장을 많이 사용하는데, 나는 주로 조선간장을 넣는다. 된장이나 조선간장이나 원재료가 같기 때문에 비슷한 효과를 나타낸다고 보면 된다. 오히려 된장보다 염도가 센 조선간장을 넣어서 돼지고기를 삶으면 은은하게 간이 배어서 더 맛있게 느껴지고 또 간이 밴 고기는 냄새도 덜 난다.

의외의 재료 중 하나인 콜라는 대학 때 아르바이트했던 고깃집에서 배운 ‘비법’이다. 대학교 4학년 때 연탄 불고깃집에서 일했는데, 작고 허름한 그 고깃집의 월 매출이 몇 천이나 되었다. 그 고깃집이 그렇게 인기 있었던 이유는 한 접시에 5,000원이던 연탄 불고기의 맛과 향 때문이었다.

나는 한번 맛보면 끊을 수 없는 중독적인 맛을 가졌던 그 연탄 불고기의 레시피가 너무도 궁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장님은 고기 양념을 할 때면 나에게 꼭 심부름을 보내서 양념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럴수록 호기심은 더욱더 커져만 갔고, 최대한 빨리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곤 했지만, 양념 만드시는 걸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 고깃집에서 수개월간 일하는 동안, 사장님 내외분은 점차 내게 마음의 문을 여셨고, 나중에는 최선을 다해 일하는 나를 굉장히 아껴주셨다. 너무 말라서 안쓰럽다며 수시로 먹을 것을 챙겨주셨고, 새벽 4시에 마감할 때면 다른 아르바이트생 몰래 만 원씩 더 주시곤 했다. 당시 시급이 2,000~2,500원 정도였으니 거의 네다섯 시간에 해당하는 시급을 더 챙겨주신 것이다.

그때가 아마 우리 집 가정 형편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나는 식비가 없어서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기 힘들었던 키 작고 깡마른 졸업반 학생이었다. 내가 유일하게 푸짐한 식사를 원 없이 할 수 있었던 시간은 바로 저녁 여섯 시, 아르바이트 출근하던 때였다. 사장님은 배고픈 고학생이던 나를 위해 일부러 연탄불을 미리 피워 불고기를 구워주시기도 했고, 집에 가서 식구들과 구워 먹으라며 양념한 불고기를 싸주시기도 했다. 장사 끝난 후 싸주신 거면 남아서 싸주시는 거겠거니 했을 텐데, 장사 시작 전 양념한 고기를 제일 먼저 싸주시곤 했다. 그때 사장님의 마음이 내게 얼마나 큰 단비 같은 것이었는지 모를 것이다. 사장님이 싸주신 고기로 부모님, 할머니, 동생이 정말 원 없이 행복하게 밥을 먹었다.

어느 날엔가 사장님이 양념하는 시간에 나를 부르셨다. 그러더니 하나씩 필요한 양념을 내게 직접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날따라 심부름을 시키지 않는 사장님이 의아했지만 속으론 무척 좋았다. 돼지불고기에 들어가는 양념은 간장, 마늘, 생강, 소주, 콜라 그게 다였다. 그중 콜라는 정말 의외였다.

사장님은 내가 다른 의도 없이 순수하게 요리 자체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양념 비법이 궁금해서 심부름을 빠르게 다녀온다는 것도 알고 계셨다. 다른 아르바이트생은 심부름을 보내면 천천히 다녀오는 편인데, 나는 평균 이상으로 빨리 다녀왔으니 그래서 눈치를 채셨나보다.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시다가 몇 달 동안 나를 겪어보시고는 드디어 비법을 알려주신 거였다. 꾀 안 부리고 열심히 하니 그렇게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며, 혹시라도 취직 못 하고 이것저것 다 해봐도 안 되면 연탄 불고깃집이라도 하라고 가르쳐주는 거라고 하셨다. 사장님도 갑자기 사업 실패로 빚더미에 앉게 되었는데, 마음씨 좋은 어떤 분의 도움으로 연탄 불고기 레시피를 전수받아 빚을 다 갚고 이제 모으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울컥한다. 살면서 타인의 진심을 느끼기가 쉽지 않은데, 그 어린 나이에도 사장님의 진심과 애정이 느껴졌다. 사람이 고마움을 잊으면 안 되는 건데, 졸업도 하기 전에 인천으로 취업을 나간 나는 객지 생활에 적응하느라 사장님께 연락드리는 것을 잊었고, 핸드폰을 바꾸면서 연락처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고 찾아갔을 때는 그 연탄 불고깃집은 사라지고 새로운 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그때 사장님이 알려주신 레시피를 수첩에 잘 옮겨 적어놨었는데, 그만 잃어버렸다. 스물세 살의 나는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일이나 무언가 좀 더 그럴듯해 보이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오히려 15~20년 후쯤 아이들이 다 자라서 자립하면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처럼 작은 식당을 차려서 소박하고 따뜻한 가정식 백반을 파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꾼다.

따뜻한 밥 한 끼의 가치와 소중함을 깨달은 지금의 내가 혹시라도 그 시절로 타임 슬립 할 수 있다면, 스물세 살의 나에게 “그 레시피 넣어둬, 넣어둬.” 했을 텐데……. 그랬다면 나는 엄청 인기 있는 메뉴를 가진 밥집의 사장님이 되었을 텐데!

돼지고기는 뚜껑을 열고 센 불에서 삶아야 냄새를 최대한 날릴 수 있다. 센 불에서 한참 끓이다 보면 맛국물이 반으로 줄어든다. 그때 물을 더 추가해서 역시 센 불로 가열하고, 끓으면 불을 중불 혹은 더 약하게 줄여서 부드러워지도록 삶으면 된다. 총 두 시간 정도 삶은 것 같다. 각자 선호하는 식감이 다를 테니 두 시간보다 적게 삶든 더 삶든 그건 개인의 자유이다. 고기를 센 불에서 먼저 팔팔 삶아서 냄새를 날린 뒤 압력솥으로 옮겨서 삶으면 적은 시간과 화력을 투자하고도 쉽게 부드러운 맛을 낼 수 있기도 하다.

삶은 고기는 건져내지 않고 그냥 맛국물에 그대로 두었다. 식히려고 건져두면 고기가 좀 딱딱해지는 것 같다. 식힌 뒤 썰어야 예쁘게 썰 수 있지만 나는 뜨거울 때 손가락을 후후 불어가며 썰었다. 그래야 식구들이 적당히 온기가 있는 상태에서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드럽기도 하고.

고기를 썰면서 맛보았더니 고소하고 입안을 감싸는 감칠맛 같은 게 느껴졌다. 식구들도 정말 잘 먹었다. 비계를 싫어하는데 어쩐 일인지 비계도 떼지 않고 먹었다. 오랜 시간 푹 삶아서 비계에 있던 좋지 않은 식감의 성분들이 빠져나갔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식구들이 모처럼 정말 잘 먹어서 기분이 참 좋았다. 내 것을 남겨주지 않고 먹는데도 언짢지 않았다.


오징어 초무침

아들이 어쩐 일인지 며칠 전부터 오징어 초무침을 해달라고 했다. 마침 소분하여 냉동해둔 오징어가 있어서 한 팩 꺼냈다. 손질하여 물과 함께 얼려둔 오징어는 자연 해동한 뒤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 양념과 당근, 미나리 등과 함께 무쳤다. 초고추장은 고추장, 참치액, 설탕, 매실청, 식초 등을 섞어서 기본양념을 만들어두었다가 먹기 직전, 다진 마늘과 참기름, 통깨를 넣어 마무리한다. 참치액은 양조간장 대신 넣은 것인데, 불 냄새가 밴 듯한 은은한 생선 향이 초고추장의 풍미를 살려준다. 참치액이 없으면 그냥 양조간장을 넣어도 무방하고, 고추장이 간이 약하다면 참치액과 함께 양조간장을 조금 넣어주는 것도 괜찮다.

쌈은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담은 것이다. 가격도 매우 저렴했다. 텃밭이 있어도 모든 종류의 쌈 모종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이렇게 마트 쌈 코너를 이용할 때도 있다. 남편은 이런 각종 쌈 채소를 줘도 늘 상추만 공략하고, 나는 흔한 상추 외의 색다른 채소를 공략한다. 그런 습성은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남편은 늘 먹던 것으로, 나는 안 먹어본 것으로 선택한다. 내가 생각할 때 남편은 정말 화성에서 왔고, 나는 금성에서 온 것 같다.


깻순 무침
알배추 겉절이, 모둠 쌈, 묵은지

깻순도 까나리액젓, 설탕, 식초, 통깨 간 것, 참기름, 고춧가루, 다진 마늘 등을 넣고 무쳤다. 고기 먹을 때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보쌈에 빠질 수 없는 배추 겉절이. 알배추를 반으로 잘라서 소금에 절인 뒤 김치냉장고에서 숙성 중이던 양념으로 재빨리 버무려냈다. 나는 깍두기 만들고 남은 양념을 김치냉장고에 넣어두고 급할 때마다 동원한다. 풋마늘도 데쳐서 무쳐 먹고, 이렇게 알배추도 무쳐 먹는다.


갓 무친 김치에 한 점, 묵은지에 한 점씩 번갈아 싸 먹으니 보쌈을 어느 순간 다 먹었다. 맛이야 보쌈 전문점이 더 낫겠지만 같은 가격으로 푸짐하게 먹을 수 있으니 집에서 ‘내식’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다.




<오늘의 식단>

- 알록달록 모둠 쌈과 삼겹살 보쌈

- 깻순 샐러드

- 매콤 새콤 달콤한 오징어 미나리 초무침

- 올드 앤 뉴, 묵은지와 알배추 겉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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