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맛, 순대볶음
남편과 나는 만난 지 84일 만에 결혼했다. 우연히 만나게 되어 불같은 사랑을 하고 하루라도 빨리 함께 살고 싶어서 결혼을 서둘렀다고 말하고 싶지만……, 좀 더 냉정히 생각해보면 타이밍이 맞았던 것 같다. 80일이면 세계일주도 하는데 결혼이라고 못할쏘냐. 남편도, 나도 쿨하게 생각했다. 아마 그때 그렇게 일사천리로 결혼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결혼이란 걸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결혼은 타이밍이다. 죽을 만큼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결혼에 이르는 것도 아니고, 사랑인 듯 우정인 듯, 아니면 모호한 그 어떤 감정이든 간에 결혼을 할 수 있는 시기에 만나면 또 결혼까지 하게 되는 것 같다. 남편도, 나도 이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나누는, 뭐랄까 이제는 운명 공동체와 같은 관계이기에 가감 없이 오픈하는 나의 결혼 스토리다.
석 달이 채 안 되는 연애 기간 동안 나는 밤 10시 이전에 퇴근하는 일이 없는 매우 바쁜 삶을 살던 사람이었고, 남편은 밤 9시만 되면 꿈나라에 들어가야 하는 사람이었기에 서로가 만날 시간이 참 없었다. 주말에도 내가 일을 해야 해서 데이트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어쩌면 만날 시간이 없어서 바로 결혼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 짧은 연애 기간 중 또렷이 기억나는 데이트는 바로 신림동에서 백순대볶음을 먹었던 날이다. 기억에 각인될 만큼 좋았던 데이트와 순대볶음이라니 참 낭만적인 조합이다.
예상에 없던 갑작스러운 만남이었고, 늦은 시각이라 갈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서 어딜 가야 할까 고민하던 참에 순대볶음을 좋아하는 남편이 데려가주었는데, 나에게는 살짝 충격인 장소였다. 그 많은 점포가 실내에 들어서 있는 것도 이색적이었고, 빨갛지 않은 순대볶음도 처음 보았다. 나는 순대 자체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빨갛든 하얗든 순대볶음을 먹어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평소 식탐도 없고 야식도 안 먹는 남편이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잘 먹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도 좋았다. 사실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싫은 내색을 전혀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술을 잘 마시는 나는 혼자서 맥주를 마셨고, 술을 못 마시는 남편은 순대볶음만 열심히 먹었다. 순대볶음을 다 먹고 나서는 남편이 먼저 나를 데려다주고, 헤어지기 아쉬워서 내가 또 남편을 데려다주기를 몇 번 반복했다. 도저히 감기는 눈을 주체할 수 없어 하는 남편을 보고서야 손 흔들며 헤어질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을 법한 평범하고 흔한 연애 스토리. 지나고 보니 그런 평범한 데이트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그로부터 약 9년이 지난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택배아저씨의 부름을 받았다. 택배 상자 속에 들어 있던 것은 꺼내도 꺼내도 끊임없이 나오는 순대였다. 어디서 할인 행사를 했는지 엄청나게 많은 양의 순대를 남편이 주문한 것이다. 이따금씩 남편이 주문한 택배 상자를 열어보면 어이없고 황당할 때가 있는데, 마침 그런 날이었다. 이 많은 순대를 먹고도 순대에 물리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9년 전의 다소곳하고 너그러웠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남편의 표현에 따르면)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남편을 통박했다. 나는 냉장 혹은 냉동 보관이 필요한 식재료를 대량으로 구입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내가 살 집도 없는데, 순대의 월세까지 내주며 살 순 없다고 생각했다.
순대의 월세 대납을 최대한 빨리 중단하기 위해 순대볶음을 만들기로 했다. 사실 나는 누린내 같은 잡냄새 때문에 순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엇보다 누린내를 잡는 게 중요한데, 주로 향신채와 생강술(청주에 슬라이스한 생강을 얼마간 담가둔 것)을 이용한다. 일단 널찍한 웍에 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을 볶아 향을 냈다. 그런 다음 순대를 넣고 생강술을 조금 두른 뒤, 센 불에서 볶았다. 생강술 혹은 청주가 없다면 식초를 조금 넣어줘도 된다. 비슷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간장을 조금 둘러서 향도 내고 간도 배게 했다. 약간 단짠단짠한 느낌을 내기 위해 맛술도 조금 넣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슬라이스 가래떡도 넣고, 향이 진한 깻잎도 썰어서 넣었다. 여기에 청양고추 한두 개를 썰어 넣으면 칼칼하고 잡내도 제거되면서 느끼한 맛도 사라진다.
불을 끄고 볶은 깨를 뿌렸다. 참기름을 약간 둘러주면 고소하다. 물론 생략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뜨끈뜨끈하게 볶아서주니 남편이 얼마나 잘 먹던지. 핀잔 줬던 게 살짝 미안하기도 했다.
순대볶음의 다소 느끼한 맛을 상쇄해줄 얼큰하고 시원한 콩나물 김칫국도 끓였다. 진하게 우린 맛국물에 시큼한 묵은지, 꼬리만 살짝 제거한 콩나물을 넣고 한소끔 푹 끓인다. 다진 마늘(혹은 슬라이스한 마늘)을 넣고, 묵은지 국물과 까나리액젓으로 간을 맞춘다. 깍두기 국물이 있으면 넣어주면 좋다. 어떤 국물이든 무가 들어가야 시원하고 맛이 깊어진다. 마지막에 후춧가루 톡톡 뿌려서 내면 남편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잘 먹는다. 이런 국은 살짝 칼칼해도 어느 정도 봐준다.
순대와 어울릴 만한 반찬을 생각하다 냉동실에 소분해두었던 오징어가 떠올랐다. 순대볶음과 오징어 초무침의 조합은 어울리는 듯 안 어울리는 조합이긴 하다. 내 입맛 기준으로 무언가 상큼하고 새콤달콤하고 시원한 느낌이 드는 음식이 있으면 순대볶음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장 김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내고, 깍두기도 냈다. 후식은 시원하고 달달한 배를 깎아서 냈다.
남편의 성격을 빼닮은 둘째가 아빠만큼이나 순대를 좋아한다. 부자가 나란히 앉아서 순대볶음을 먹는데 입을 오물오물하는 모습이 꽤 닮았다. 나를 많이 닮은 첫째는 나처럼 순대를 좋아하지 않아서 시큰둥했다. 이런 걸 보면 정말 유전자의 힘은 놀라운 것 같다.
- 칼칼하고 개운한 콩나물 김칫국
- 추억과 낭만이 어려 있는 순대볶음
- 오징어 초무침과 전장 김 그리고 깍두기
- 달달한 배 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