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장에 좋은 맑은 탕
주경 씨는 어젯밤 속상한 마음에 맥주를 4캔이나 마셨다. 평소 한, 두 캔이면 충분했지만, 어제는 너무나 속이 상해 4캔이나 마셔버리고 말았다. 남편 역시 평소 한 병이면 충분한 소주를 두 병이나 마셨다. 주경 씨 부부가 그렇게 평소보다 많은 술을 마실 정도로 속이 상했던 것은 아들의 성적 때문이었다.
그동안 학원도 열심히 보냈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학원으로는 부족하겠다 싶어 큰맘 먹고 영어, 수학 과외까지 시작했다.
요즘 교과과정은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제대로 된 시험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으로 성적이 기록이 되고, 진학에 영향을 미치는 시험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주경 씨의 아들이 바로 지금 중학교 2학년이고, 이번에 처음으로 시험을 치렀다. 주경 씨는 아들에게 시험은 그리 잘 보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평소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내심 제법 기대를 하고 있었었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선생님들이 성실하고, 수업을 잘 따라온다며 칭찬이 자자했다. 유치원 다닐 때도,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모두 우수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학교에서 우수상, 독서상, 봉사상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상장들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받은, 다방면으로 뛰어난 아들이었다.
같은 반의 아들 친구 엄마들도 아들이 어떤 학습지를 하는지, 어느 학원을 다니는지 물어봤다. 그럴 때면 주경 씨의 어깨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정비소에서 기름밥 먹으며 열심히 일하는 남편도, 식당에서 일을 하는 주경 씨도 아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에 하루하루 고된 노동조차도 즐겁게 여길 수 있었다.
그. 런. 데!! 어제 중학교 첫 시험을 치르고 받은 성적표를 보고선 그 즐거움이 와장창 깨져버리고 말았다.
평균.... 74점?!!
'어? 뭐, 뭐지? 내가 잘못 본 건가??'
주경 씨는 성적표를 몇 번이나 보고 다시 또 봤다! 믿을 수 없는 성적이었다. 아들이 부담스러울까 봐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전교 1등은 몰라도, 반에서 1등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다른 부모들이 어떤 공부를 시켜서 아이가 그렇게 공부를 잘하냐고 물어보면 무슨 말을 해줘야 하나 즐거운 고민도 했었다.
수학과 영어 과외를 하고 있다고 하면 과외 선생님 소개를 해달라고 할 텐데, 어떡하지? 소개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즐거운 고민까지 했었다.
그런 행복한 고민이 어제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 말았다. 반에서 1등은 고사하고 중간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았다.
아들의 점수는 주경 씨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아들 역시도 그동안 주위의 반응과 부모의 기대에 본인이 잘하는 편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제법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풀이 잔뜩 죽어 있었다.
그런 아들에게 주경 씨와 남편은 차마 뭐라고 쉽게 말을 할 수 없었다. 괜찮다고 위로를 했지만, 그 위로는 아들에게도 자신들에게도 전혀 위로가 되진 않았다. 아들이 방으로 들어가고 남편과 둘이서 속상한 마음을 달래려 술을 마셨다.
초등학교 때부터 다녔던 학원과 받아보던 학습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한 영어와 수학 과외.
돌아서면 학원비고, 돌아서면 교재비고, 돌아서면 과외비였지만, 그래도 아들이 잘 배우고 있는 것 같아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는데, 그건 단지 주경 씨만의 착각이었단 사실이 이번에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오늘은 주경 씨가 식당일을 쉬는 날이라, 친구와 함께 해장도 할 겸 대구탕을 먹으러 왔다.
“아... 속 쓰려.”
주경 씨가 인상을 쓰며 말하자, 전화 통화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모두 다 들은 친구가 주경 씨 구박을 했다.
“그러게, 너도 못한 공부를 왜 자식한테 기대하고 그래? 한 달에 과외비로만 백만 원도 넘게 써가면서. 남편이랑 네가 그렇게 피땀 흘려가며 열심히 돈 모아서 그렇게 써버리면 아깝지도 않냐? 그냥 하지 말라니까?”
“그게 그렇게 되니?”
“안될 건 또 뭐냐? 그냥 과외 끊어버리고, 그 돈으로 여행이나 다니라니까? 그 돈이면 서너 달에 한 번은 가족들끼리 해외여행을 다녀와도 되겠다. 공부도 좋지만, 여행 다니면서 보고 듣고 스스로 느끼는 게 더 중요하다니까?”
“그래도... 아니, 과외를 해도 이런데, 하지 않았으면 더 시험을 망쳤을 거야. 일단 과외선생님한테 말해서 앞으로 점수를 좀 더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지.”
“허이구~~ 너도 참......”
“탕 나왔습니다~”
대구탕 가게 여자 사장이 대구탕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청양초 다진 것 좀 주세요.”
“네~”
주경 씨는 맑은 대구탕에 청양초를 넣어 칼칼하게 먹는 것을 좋아했다.
속이 시원~하게 깔끔해지는 느낌? 신기했다. 뜨거운데, 시원~한 맛이 난다는 것이. 어릴 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어른이 되고, 술을 마시고, 아이를 키워보고 나니 뜨거운데 시원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여기 청양초 다진 것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청양초를 푹 떠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대구탕에 넣고 휘휘 저었다.
“너도 넣을래?”
“됐어.”
“진짜?”
“그래. 너도 적당히 넣어. 속도 쓰리다는 애가...”
주경 씨는 친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작은 그릇에 담겨있는 청양초를 숟가락으로 싹싹 긁어 대구탕에 모두 다 넣었다.
“헐....”
주경 씨는 친구가 그러거나 말거나 대구탕에 다진 청양초를 듬뿍 넣어 휘휘 저어서는 한 숟갈 떠서 입에 텁 넣었다.
꿀꺽 넘어가는 소리와 동시에 입에서 탄성이 터지듯 흘러나오는 말.
“어~~~시원~~하다!!”
“야! 쫌... 조용히 해!”
주경 씨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주경 씨 쪽을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음식에 남녀가 있겠냐만, 보통 그런 탄성은 전날 술을 잔뜩 마신 남성들이 해장을 하며 내지르는 탄성이었다.
“왜?”
“아, 쫌 그렇잖아?”
“그렇긴 뭐가 그래? 시원~ 해서 시원하다고 한 건데.”
친구는 주경 씨에게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움 반, 안타까움 반이었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온 친구. 사춘기도 함께 겪었고, 수줍음 많던 소녀의 모습도 함께 나눴다. 그렇게 부끄러움도 많이 타던 친구가 지금은 막노동 공사판의 아저씨처럼 요란하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에휴~ 자식이 뭐길래...’
친구는 주경 씨가 자식이 아니었다면 절대 식당에 일을 하러 갈 성격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직업에 귀천이 있겠냐마는 평범한 회사도 아니고, 설거지에, 청소에, 손님들의 갖은소리까지 다 들어가며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외향적인 성격의 친구가 전혀 아니었다.
주경 씨가 대구살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와사비간장에 폭 찍어 입에 넣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음~ 너무 맛있다. 난 먹을 때가 제~~ 일 행복해.”
“풋.”
주경 씨의 친구는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이 표정과 이 말투만큼은 학창 시절의 주경 씨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도 이런 표정으로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던 주경 씨.
“아, 지애야. 주은이는 좀 어때?”
주경 씨가 친구 지애 씨에게 물었다. 지애 씨에게는 딸 주은이라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학폭이니 뭐니 한창 시끄러웠다.
“뭐, 그냥 그렇지 뭐. 나도 잘 모르겠어. 우리 주은이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말하면 엄마니까 그런다고 사람들이 또 뭐라고 하겠지?”
주은이는 친구들과 함께 단톡방에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들 중 누군가 다른 친구 한 명을 험담했고, 그 험담에 단톡방의 모든 친구들이 맞장구를 치자 함께 장단을 맞춰줬었다. 그런데, 그게 학폭이라며 신고가 된 것이었다.
딸 주은이는 엄마 지애 씨에게 솔직히 단톡방에서 험담한 것에 대해 전혀 미안한 마음은 없다고 했다. 학교에서 너무 잘난 척도 많이 하는 친구이고, 늘 혼자 잘난 맛에 사는 아이라 대부분의 친구들이 싫어하는 아이라고 했다.
“아마 다른 애들도 엄청 걔 흉 많이 볼 걸? 우리처럼 톡을 주고받은 내용이 유출되지 않아서 그렇지.”
알고 보니 단톡방에 들어와 있는 친구들 중 한 명이 평소 잘난 척을 많이 하고 다니는 아이와 친한 사이였고, 일부러 먼저 잘난 척하는 아이에 대한 욕을 하며 다른 친구들의 동참을 유도한 것이었다. 단톡방에서 먼저 욕을 시작한 아이가, 다른 아이들이 욕을 한 내용을 캡처해 피해자라는 아이에게 건넸고, 피해자라는 아이의 부모는 그것을 학교와 교육청에 학폭으로 신고를 한 상황이었다.
“조만간 학폭위가 열린다고 하는데, 아니 생각해 봐. 우리 때도 서로 재수 없는 년들 뒤에서 욕하고 다 했잖아? 심할 때는 서로 치고받고 싸우고 하기도 했는데, 이런 톡 몇 번 주고받았다고, 주은이랑 친구들이 평생 학폭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살아야 하는 거니?”
지애 씨는 딸이 잘한 건 아니지만, 크게 잘못을 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학폭위가 열린다고 연락이 오고 주은이가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길래 캡처한 내용을 읽어봤는데, 심한 욕설이 적혀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누구나 흔히 뒤에서 험담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대화 밖에 없었다.
“아니, 겨우 이런 내용으로 학폭이라고요?”
지애 씨가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물었다.
“어머님. 죄송하지만, 요즘에는 단체 톡 방을 만드는 것부터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뭐라구요? 그럼 아이들끼리는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라구요? 설마 한 명 한 명 모두 따로따로 톡을 주거나, 전화를 해서 서로 소식을 전하라는 건가요?”
“번거롭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어머님. 단체 톡으로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유익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도 있지만, 이번처럼 이런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희도 학교에서 단톡방 개설하지 말라고 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단톡방을 만든 학생도, 그곳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도 모두 똑같은 잘못이 있는 거죠.”
선생님의 말에 지애 씨는 고구마를 열 개나 한꺼번에 먹은 것 마냥 갑갑해져서 몇 마디 더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주경 씨가 밥을 먹다가 말고 지애 씨를 향해 물었다.
“그래도 주은이가 공부는 잘하잖아?”
“잘하긴. 그저 그렇지 뭐.”
지애 씨가 말은 그렇게 해도 딸이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우리 승원이가 주은이 절반만 따라가도 좋겠다.”
“참 너도 별소릴 다한다. 이제 겨우 시험 한 번 쳤는데, 뭘 그러니? 앞으로 더 열심히 하면 되지. 나야말로 진짜 우리 주은이가 승원이처럼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면 좋겠다. 이상한 애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밥도 잘 먹고.”
“뭐, 들어보니 주은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만. 너도 너무 걱정 마.”
주경 씨와 지애 씨는 말로는 서로를 위로하고 다독이면서도, 속으론 그래도 내 형편이 너보단 더 낫구나 생각하며 대구탕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