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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Jun 12. 2023

어떻게 인생이 쉽기만 할까

괴로움이 찾아오는 이유

6월에 접어들자 공기가 바뀌었다. 눅진하고 무거워서 방 안에서 잠들기 싫어 거실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TV 전원을 켠다. 화양연화가 방영 중이다. 장만옥과 양조위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쏟아내고 있다. 나는 낯선 언어를 자장가 삼아 곧 잠이 들었다.   

  

빛이 들이치는 느낌 들어 게슴츠레 눈을 뜨고 무의식적으로 빛의 출처를 찾았다. 창문 한가운데 황금빛 보름달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보름달만 보면 소원을 비는 나는, 이제는 소원 따위 빌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소원을 빌었다. 눈을 뜨지 않았다면 언제나 달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가슴 벅찬 위안을 느낀다. 달은 소원을 이루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대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수월해지는 것 같다. 기대하지 않았던 아파트 CCTV의 화질이 너무도 선명하게 정황을 포착하여 기대하지 않았던 차량 가해자를 찾았다. 뺑소니 처벌을 원하냐는 물음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보험처리만 받는 것으로 사고는 원만히 종결되었다.      


CCTV를 봐준 관리소 직원, 사건을 처리해 준 경찰관, 보상처리를 진행해 준 보험사 직원, 차량딜리버리와 수리를 해준 서비스센터 직원들까지 고맙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예전에는 이럴 때 감사함보다는 운이 좋았다는 것에 방점이 찍혔다. 이제야 사람을 보게 되었지만, 어리석은 인간임에는 변함이 없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고 그만큼 남에게 베푸는 마음도 야박한 나는 자신이 착하지 않다는 걸 분명하게 말할 수 있지만 정작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런 인간이다.     


요즘은 산책로 근처의 노점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할머니들에게서 일부러 고추, 오이 같은 것들을 사고 있다. 할머니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과 훗날 할머니가 될 나도 조그만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순수하지 못한 마음이 있다. 정제된 마음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나란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될 수 있을지 자신은 없다.   

  

인생은 순식간에 일어나고 갑자기 끝나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물 한 모금 넘기기 힘들 때도 살고 싶어서 이곳에 글을 썼다. 그런데 그 일마저 놓아버리려 했다. 사고가 해결되자마자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 또 순식간에 일어났고 갑자기 끝나버렸다. 정말이지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때 브런치 댓글 알림음이 울렸다. 보름달처럼 기가 막힌 타이밍에. 또 그렇게 사람들의 고마움을 잊었다.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지 못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넸다.    

  

퇴사 후 1년 동안 내 생애 가장 평온한 날들을 보냈다. 그 시간은 순식간에 끝났고 이어진 삶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은 당연히 알지 못했다. 나를 알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는데 정작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없었다. 명확하고 단순하다고 자부했던 내가 고통 속에 나를 방치하고 아무것도 결정 못 하는 것을 지켜보며 삶의 근간이 흔들렸다.


나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는 걸 알아서 괴로움이 계속해서 찾아오는 것일까. 어쩌면 괴로움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살리려고 이렇게 순식간에 들이닥치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일어나고 갑자기 끝나는 것들이 모두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다고 믿는 일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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