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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May 21. 2023

다시 걷는다.

나는 걷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알지 못한다.

앞으론 계절을 꽃과 나무로 구분하고 떠올리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5월 초에 나는 아카시아 꽃향기를 흠뻑 맡을 수 있었다. 5월 중순에 접어드니 아카시아 꽃은 지고 장미꽃, 찔레꽃, 괴불주머니꽃, 산딸나무꽃이 만발하고 수국은 이제 막 봉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빨간 뱀딸기가 길가에 보이고 매실이 알알이 굵어지고 있다.      


매일 오르는 산책로에 매실나무 한 그루가 있다. 열매를 따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손을 뻗다가 알았다. 나무는 사람들이 손을 뻗어서 닿을 만한 가지에는 잎과 열매를 만들지 않았다. 여러 해를 거친 경험으로 그런 과감한 결정을 했으리라. 나무도 절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바위의 눈으로 고요히 천지 만물의 움직임을 지켜본 적이 있다면 그대도 알리라. 비록 그대가 바닥을 기더라도 땅과 바람과 비와 벌레와 해와 새와 물고기와 풀과 나무와 같은 세상의 모든 것이 온 힘을 다해 그대를 돕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산에 산다 中 –최성현)     


걷다 보면 그들이 온 힘을 다해 나를 살게 한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 걷는다. 생명이 넘치는 곳으로 간다. 그들은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알 수가 있다.     


나는 먹고, 자고, 보고, 듣고, 읽고, 쓰지만 말을 하진 않는다. 사람을 만나지 않기 때문인데 어느새 아쉽지가 않았다. 사람들이 입 밖으로 내뱉는 말들이, 내가 내뱉은 말들이 공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갑갑함이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었다.    

  

말하는 순간, 말은 의미를 상실하고 흩어졌다가 끝내는 나를 짓눌렀다. 주체하지 못해 넘쳐나는 마음을 쏟아내면 잠시 숨 쉴 구멍이 생기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말들 속에 갇혀버린 내가 아등바등하는 것이 보였다. 마음을 표현하기에 말은 적합하지 않고 실은 내 마음 또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말로써 이해받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말하면 말할수록 그저 외로워질 뿐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차라리 입을 다물고 산책을 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것이 현재 상황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다. 죽을 것 같으면 우선 뛰쳐나간다. 걷는다. 그럴 땐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음악은 감정을 증폭시켜 버린다. 나는 걷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알지 못한다. 걷고 나면 쓸 힘이 생기고 회복이 되면 읽고 듣기가 가능해졌다. 그러면 다시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된다.      


내년 5월이 되면  또다시 달콤한 아카시아 향기를 흠뻑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걸어왔던 과거의 내가 있어 지금의 내가 견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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