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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Jun 29. 2023

우연히, 그의 아버지를 만나다.

미움이 지나간 자리

바다로 향하는 산책길은 그의 부모님이 사는 아파트를 가로질러 걸어가야 한다. 하지만 오래된 아파트의 곳곳을 지키고 있는 멋진 나무들과 음지에 빼곡하게 돋아난 이끼 같은 것을 보느라 그의 부모님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곤 한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한 시간. 음지라 유난히 길게 뻗은 나무 터널을 올려다보던 중 낯익은 노인이 약간 절뚝거리는 그 특유의 걸음걸이로 아파트 경로당을 향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는 내가 디자인했던 짙은 보라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여전히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지 않는지 삐쭉삐쭉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변했다.      


홍가시나무 뒤에 숨어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느릿느릿한 발걸음을 옮겨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제는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저 고관절 수술 후 겁이 나서 왼쪽 다리에 힘을 빼고 오른쪽 다리에만 체중을 지탱해서 걷고 있는, 무료한 저녁 시간을 보내기 위해 경로당을 가는 쓸쓸한 노인일 뿐이었다.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예상치 못했던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를 미워했던 나의 마음은 베푼 만큼 똑같이 받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다섯 번 밥을 사면 한 번은 사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밥 열 번을 사야 밥 한 번을 얻어먹을 수 있는 현실이 불만족스러웠다. 아니면 고맙다는 말 한마디라도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나 역시도 나의 부모님이 밥 열 번을 사면 밥 한 번을 사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듯이 나 역시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은 한 번도 서운함을 드러내지 않았고 더 해주지 못해서 언제나 안타까워했다. 거기엔 베푼 만큼 똑같이 받고 싶은 욕구와 기대감 대신 나와 남편에 대한 사랑만이 존재했다.      


그의 부모와 나의 부모가 같을 수는 없다. 그들이 내게 기대하는 마음은 나의 부모와는 다른 마음일 것이다. 딸 같은 며느리를 원한다는 여느 시부모님들처럼 나 역시 어처구니없이 나의 부모님과 같은 시부모님을 원했다.


기대감이 반복해서 좌절되자 그들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마음을 접었다. 미움만이 남았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결과적으로 나를 너무나 힘들게 했다. 그래서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는 일은 이타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애적인 행위에 가깝다.


나를 위한다면 미워하는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매주 이천 원 치의 로또를 사는 마음처럼, 당첨되면 좋고 낙첨되도 상관없는 적당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랑했어야 했다.   

   

사는 동안 몇 번의 집착적인 관계의 끝맺음을 경험했다. 나는 좋았든 싫었든 간에 관계가 끝났을 땐 아쉬움과 괴로움만 보느라 이면에 있는 자유로움을 알아채지 못했다. 불현듯 홀가분함을 느꼈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자유로움이었다. 미워하지 않아도 되고, 좋아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그의 아버지가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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