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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Dec 12. 2023

견디지 않는 게 더 어렵다.

유감스럽지만은 이것이 나의 방식이다

방문 밖에서 들리는 전화통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벽시계는 새벽 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막을 새도 없이 어딘가에서 툭 떨어진 이 감정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오래되어 생소하게 느껴졌지만, 전에 분명 느껴봤던 감정이었다.      


소개팅으로 만난 Y에게 푹 빠진 적이 있었다. 나는 Y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라는 철저한 을이 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시름 앓다가도 그가 출몰할 것이란 소식을 전해 들으면 부리나케 뛰쳐나가 우연을 가장하는 앙큼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2~3개월 동안의 처절한 짝사랑은 사랑해 마지않던 Y가 긴 머리를 한쪽으로 넘긴 내게 마당쇠 같다고 빈정대는 순간에 끝이 났다. 그 순간에 나는 생각이라는 걸 하기도 전에 그를 향한 마음이 완전히 툭 떨어져 나간 것을 알았다.      


몇 개월 만에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떨어져 나갔다고 믿었던 마음이 새삼스레 다시 툭 떨어지는 것에 어리둥절했던 거다. 아무 감정이 없었어야 했다. 뉘 집 개가 짖냐 정도의 반응이었어야 했다. 그를 싫어한다는 감정조차도 용납하기가 싫었다.      


드라마 최고의 이혼에서 배두나는 차태현을 두고 사랑하지만 좋아하진 않는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것이 배우자를 향한 보편적인 감정이 아닐까. 원만한 부부 관계를 위해선 사랑하진 않지만 좋아하는 감정이 더 적합할 것 같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더럽게 질긴 게 부부의 연이라던 엄마의 말처럼 부부라는 관계의 특수성은 사랑하지도 않고 좋아하지 않아도 이어지는 것에 있다. 그러나 이 특수한 관계도 다른 관계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면 끊어진다. 나는 그를 싫어하기도 싫었다.    

  

그렇다고 그를 향한 어떤 감정도 남아 있으면 안 된다고 나를 몰아세우진 않기로 한다. 대신에 내가 더 하고 싶은 일, 다시 잠을 잔다. 그러면 아침이 오기 마련이니까.    

  

요즘은 아침마다 작은 애들을 기다린다. 가끔 에어컨 실외기 선반의 좁은 공간으로 새가 쉬러 온다. 한 번은 덩치 큰 까마귀가 갑자기 날아드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랐더니 저도 그런 날 돌아보고 움찔 소스라치게 놀라 달아난 적이 있다.(놀라는 까마귀의 눈을 본 적이 있는가?) 줄행랑치는 까마귀 뒤꽁무니에 대고 미안하다고 외쳤지만, 까마귀들한테 소문이 났는지 그 뒤로 그들의 방문이 끊겼다.      


까마귀 대신 까치들이 날아오던 차에 처음으로 작은 새가 날아왔다. 나는 찌르르 뾰롱 거리는 어여쁜 소리를 듣고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새는 좁은 공간을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다시 한번 찌르르 뾰롱 뾰롱 울어대기 시작했다. 곧이어 다른 작은 새가 날아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공간을 살펴보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날아가 버렸다. 혼자 남은 새는 잠시 황망히 앉아있다가 날아간 새를 향해 날아갔다.      


아쉽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다시 날아왔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불렀다. 뾰롱 뽀룡 찌르르릉 뾰롱 (자기야. 다시 한번만 봐죠. 제발.) 그녀가 돌아왔다. 찌르르 뾰롱 (음.. 다시 봐도 별로야. 자기 실망이야.) 그녀가 날아갔다. 그는 그녀를 향해 외친다. 뾰 뾰롱 찌르르 뾰로로롱옹 (아.. 자기야 같이 가. 내가 잘할게!) 그리고 그도 떠났다.     


혼자 산 지 1년이 넘어가자 나는 새가 하는 말을 알아듣게 되었다. 다시 오지 않는 그 애들은 철새일지도. 먹이가 풍부한 곳을 찾아 떠나고 자신에게 맞는 온도의 새 보금자리를 찾아갈 순발력과 행동력이 내겐 없다. 사계절을 묵묵히 견디며 한 곳에 있기를 더 선호한다.      


100m 달리기는 꼴등이면서 오래 매달리기는 턱 아래 피멍이 들 때까지 버텨서 1등을 하는 인간에게 견뎌야 할 만큼의 힘든 일은 애초에 하지 않는다던 누군가의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견디지 않는 걸 더 어려워하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마당쇠 한마디에 마음을 돌렸던 산뜻한 상태도 오래 매달리기 마냥 견디고 있는 상태도 아니다. 딱 이 정도의 평온을 얻기 위해 나름 치열하게 징그럽도록 느리게 움직이며 견뎠다. 유감스럽지만은, 이것이 나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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