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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Nov 01. 2023

누가 날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도서관은 해리단길의 끝자락에 있다. 도서관에 가까워질수록 세련된 가게 앞에서 조잘대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허옇게 갈라진 뒤꿈치를 드러낸 채로 경계석에 앉아 잡화점 할머니와 담소를 나누는 아주머니나 시들어 빠진 채소들을 태연하게 늘여놓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도서관에 들어서면 방금 봤던 사람들이 모두 환영이었던 듯 다른 행성에 뚝 떨어진 기분이 든다. 토요일 오후의 작은 동네 도서관은 그런 곳이다. 손에 들려질 5권의 책이 일주일 운명을 결정 지으므로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고 천천히 책을 고른다.   

    

그렇게 30~40분을 서서 책을 고르고 나면 작은 인간들이 모여있는 소파에 벌러덩 드러눕고 싶다.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다시 지구별로 나간다.    

  

요즘은 책을 읽는 시간이 가장 좋다. 특히 토요일 저녁 소박하지만 맛있는 안주와 750ml 막걸리 한 병을 두고서 방금 빌려온 책을 꺼내 드는 순간은 무척이나 설레고 읽는 동안에는 한없이 나른하고 말랑해진다. 이것이 행복이 아니면 무엇을 행복이라 부를 수 있을까.     


혼자 지내기 전에는 토요일마다 안주와 술을 들이붓고 온몸에 휘감기는 불쾌감에 몸서리를 쳤었다. 언젠가부터 술상을 준비하고 치우는 것 모두 나의 몫이 되었고 그는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과연 내가 저 사람의 아내일까? 그때의 나는 이 집에 고용된 가사 도우미 같았다. 소파에 뻗어서 잠든 남편을 지켜보며 감겨 오는 두 눈을 부릅뜨고 견뎠다. 내장은 꽉 차고 마음은 텅 빈 날들이었다.     


요즘 나의 술상은 멸치볶음, 소금과 참기름이 발리지 않은 직접 구운 김같이 간단하고 소박한 것들이라 먹고 나면 속이 편할 뿐만 아니라 치우기도 가뿐하다. 기꺼운 마음으로 설거지를 하고 소파에 드러누워 마저 책을 읽는다. 그러다 발끝까지 찌르르한 잠기운이 돌면 버티지 않고 그대로 잠에 빠져든다.   

  

작년 이맘때쯤 산 정상에 올라 엄마에게 인증샷을 전송했었다. 등산할 정도의 정신력과 체력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도와는 달리 엄마는 일 년이 지난 뒤에야 사진을 보고 울었노라고 고백했다. 다시 찾아본 그때의 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서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에 가득 찬 공허함만은 숨기지 못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 화장실을 들락거리다가 무심결에 거울에 비친 나를 보았다. 오렌지빛이 도는 갈색 눈동자에 생기가 담겨있다. ‘너 지금 상당히 괜찮은 모양인데?!’ 나는 새삼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고 놀란다.   

   

먹고 싶었던 족발, 치킨을 시켜놓고 막상 몇 입 먹지 못하거나 몇 번이나 봤던 쿵푸허슬을 보고 또 박장대소할 때면 함께 웃고 마셨던 기억이 갑자기 튀어나온다. 그럴 때마다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냐고 나에게 물어본다. 아니다.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밤톨 같은 아이를 가운데 두고 걸어가는 또래의 부부를 보면서도 묻는다. 너는 저 사람들이 되고 싶어? 아니. 나는 그들이 부러워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도 지금의 내가 더 좋았다.      


홀로 지내다 보면 1년, 365일, 8760시간이 축복이 아니라 재앙같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나는 혼자되기를 택한다. 그때의 눈동자는 주성치처럼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데 예전의 내가 아니라서 좋은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결혼생활을 이어갈수록 점점 자신을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 여기게 되었다. 나도 내가 별로였다.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이 나 같으면 신나서 이혼하겠다고 말했을 때도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역시 내가 등신이라 그렇다고 여겼다.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만 같았다.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느꼈다. 한동안 그 절망감에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누가 날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그게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그들의 사랑이 뭐가 그리 중요해? 내가 나를 사랑하면 되는데 말이다.    

  

여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등신이라 여겼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그건 혼자 있는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방법과 같다는 것을. 나는 그 방법을 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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